출리산방의 엽서(26) - 채움과 비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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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리산방의 엽서(26) - 채움과 비움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3.09.20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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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인 항산 김승석

백로가 지나자 아침저녁으로 한결 서늘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과원의 숲속에는 귀뚜라미 소리가 요란하나, 울안의 난타나(Lantana)는 아직도 여름인 듯 ‘옹말종말’ 구름처럼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흰색, 노란색, 주황색, 분홍색, 붉은색 등 일곱 번이나 색깔이 변한다 해서 ‘칠변화’라는 예명을 가진 화려한 꽃이기에 호랑나비들이 자주 찾아옵니다. 그 옆에서 꿀을 먹으려고 ‘박각시’ 나방도 쉴 새 없이 날개 짓을 합니다.
대추는 볼이 붉어가고, 누렇게 시들어 가는 감나무 이파리 사이로 노란 빛깔의 토종 감 몇 개가 보이지만 그 아래 국화는 추일秋日이 아니 온 듯 꽃을 피우지 않고 있습니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기도 하지만 조락凋落의 계절이기도 합니다. 감나무의 동쪽 편 노거수 벚나무는 벌써 잎을 다 떨어뜨려 나목처럼 서 있습니다. 이른 봄에 뿌리에서 물을 빨아 올려 꽃을 먼저 피운 후 연분홍색 새싹이 돋아나고 그로부터 이삼일 지나면 어두운 분홍색이 되었다가 연한 새순의 색, 그 다음엔 녹엽의 색, 그 다음엔 청엽의 색으로 순차 변하면서 초가을엔 황엽이 되어 줄기로부터 끊어져 떨어집니다.  

나무들은 이와 같이 계절의 순환법칙에 따라 채우고 비우기를 반복합니다. 뒷짐을 진 채 바라보는 저 하늘과 말없이 눈앞에 펼쳐진 초록생명들의 무상함은 나에게 무정설법無情說法을 하는 것 같습니다. 
주말에는 난 이와 같은 시공간을 즐깁니다. 경전 공부를 하면서 느끼는 법열도 있지만 한 조각 뜬구름과 시원한 바람은 쓸데없는 생각들로 가득 찬 마음을 청소하고 묵상黙想케 하기 때문입니다.   
주중에는 주로 개인과 개인 간에 얽힌 송사訟事를 상담하는 일을 봅니다. 사람들은 재산상 이해관계에서 자기네 몫을 더 차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다투고 있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소유에 바탕을 둔 이해관계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삶은 소유하기 위해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법창法窓에 비친 세상사를 통해 나는 무소유의 참뜻 같은 걸 터득하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법답게 재물을 얻고, 친척들과 스승들과 더불어 명성을 얻고, 오래 살고 긴 수명을 가진 뒤, 죽어서 몸이 무너진 다음에는 좋은 곳, 천상세계에 태어나기를 바랍니다. 
이 네 가지는 세상에서 얻기 어려운 것이기에 강력한 탐욕에 지배된 마음으로 머물면서 하지 않아야 할 일을 하고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잘못을 범하게끔 견인합니다. 
제 마음속엔 탐욕의 주머니가 있어 반평생 자꾸만 채우려고 애쓰다가 오히려 허물 주머니만을 하나 더 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게송을 짓고 매일 외우며 수심修心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남보다 더 많이 소유한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나와 남과 동등하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나는 남보다 더 못 가졌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 대신에 모든 물욕은 괴롭고 변하기 마련인 법이다.”라고.  
마가다국의 빔비사라 왕이 고따마 붓다께 출가 경위를 여쭈자 세존께서 석가족의 가문에서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서 재난을 살피고, 그것에서 벗어남을 안온으로 보고 출가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주도 섬 마을에서 태어나 출가사문이 된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불교 대중화의 밑거름이 된 조계종 포교원 설립의 초석을 다지고 ‘일곱 가지(절, 돈, 솜옷, 모자, 목도리, 내복, 장갑)가 없는 칠무七無 스님’으로 칭송받은 무진장 대종사는 무소유의 계율을 지킨 사표師表가 되는 분입니다.
출가와 재가의 차이는 소유의 유무에 있고, 성자와 범부의 차이는 해탈·열반을 향한 정진의 강도에 달려 있다고 말합니다.  
노자의 《도덕경》(제46장)에는 “통치자가 탐욕스러우면 전쟁을 일삼는다. 남의 국토를 침범하고 목숨을 해치고 엄청난 재앙을 가져온다.”라고 말하며 죄악의 원인은 탐욕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마치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의 푸틴을 두고 미리 예언한 것 같습니다.   
  
소설 <분노의 포도>로 퓰리처상을 수상하고, 또 <에덴의 동쪽>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존 스타인벡(1902∼1968년)은 단편소설 <진주>(1947년)를 통해 인간 내면 깊은 곳에 숨어 있는 탐욕의 위험을 지적하였습니다. 
이 작품의 주제는 진정한 자유와 ‘무소유’의 의미를 다루고 있습니다. 전갈에 물린 아들의 병원비로 노심초사하던 ‘키노’ 부부에게 생긴 행운(진주)으로부터 물질이 얼마나 큰 화를 불러오는지에 대한 경종을 울려주고 있습니다.  
물질은 욕계의 인간들에겐 소유의 대상입니다. 인간의 소유와 집착이 빚어내는 갈등과 대립은 소유욕에서 시작됩니다. 욕망을 비울 때 진정한 자유와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다는 결론을 유도한 <진주> 작품의 서사구조는 불교의 ‘무소유’와 맞닿아 있다고 보여 집니다.
 
채움과 비움은 자기 자신에 달려 있습니다. 지붕이 부실하게 이어진 집에 비가 스며들 듯이 이처럼 수행되지 않은 마음에 욕망이 스며듭니다(법구경13). 
갖고 싶은 것을 소유하려 하고 욕망을 충족하려고 하는 강렬한 목마름 속에서 세속인들은 윤회의 수레바퀴에 매이지 않을 수 없고 격심한 고뇌의 바큇살 사이에서 뒤틀리고 찢기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 욕망의 근원은 바로 ‘나[我]’가 있다는 관념입니다. “나는 어디에도 누구에게도 결코 속하지 않는다. 어느 곳에서든 누구에게 있어서든 내 것은 결코 없다.”는 세존의 가르침을 지혜롭게 잡도리할 때 ‘무소유’의 도를 닦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앙굿따라 니까야 A4: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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