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4·3에 희생된 스님의 후손입니다. 세 번 째 이야기 제주 불교 4·3 피해 증언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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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4·3에 희생된 스님의 후손입니다. 세 번 째 이야기 제주 불교 4·3 피해 증언마당
  • 김익수 주필·대기자
  • 승인 2023.09.20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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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3일 제주특별자치도의회 대회의실에서 열려
제주불교4·3피해 증언마당 (왼쪽부터) 김진희 기획국장, 광순 스님, 혜일 스님
제주불교4·3피해 증언마당 (왼쪽부터) 김진희 기획국장, 광순 스님, 혜일 스님

(사)탐라성보문화원과 제주특별자치도의회4․3특별위원회가 공동 주최, ‘저는 4․3피해 스님의 후손입니다’라는 주제로 제주불교 4․3피해 증언마당이 지난 13일 제주특별자치도의회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사)탐라성보문화원 김진희 기획국장이 진행한 제주불교 4․3피해 증언마당을 제주불교신문의 지면을 통해 2회로 나뉘어 만나게 된다. 지난 제1332호 전 명법사 주지 광순 스님의 증언에 이어서 제1333호에는 정방사 도학 혜일 스님이 증언하는 고인봉 스님에 대한 증언마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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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일 스님의 ‘고인봉 스님 편’

정방사 주지 혜일 스님의 증언
정방사 주지 혜일 스님의 증언

 

제주불교계의 원로인 이일선 스님이 
제주시 산지포구 바다에서 수장당하여 죽음을 맞게 되자,
고인봉 스님은 부산을 경유하여 일본으로 피신하게 됩니다.”

 제주도의 가장 서쪽에 있는 한경면 고산리에 가면 다른 마을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드넓은 평야지대가 펼쳐있다. 이 들판 끝의 바닷가에 우뚝 솟아있는 아름다운 오름이 바로 수월봉이다. 
1944년경 창건된 은수사는 이곳 수월봉 부근에 세워졌던 사찰이다. 창건주는 고인봉 스님으로 관음사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1943년 제주로 귀향했다. 
그 후 스님은 한림읍 판포리에 소재한 사찰에 잠시 머물다가 1944년 쯤 고향인 한경면 고산리로 이전하여 은수사를 창건했다.
고인봉 스님은 해방 후 1945년 12월 열린 조선불교혁신 제주승려대회에서 은수사 대표로 참여하였으며, 그 대회가 열리기 전 11월 30일 제주도불교청년단 결성식에서 청년단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특히 스님은 불교계의 최대 과제였던 ‘왜색 불교의 청산’에 적극 앞장섰다. 스님들은 일제강점기 35년 동안 친일을 반성하며, 왜색화된 불교풍토를 정화하고 의식을 개혁하고자 하는데 힘썼다.
“아무래도 제주도는 무속신앙이 짙을 수 밖에 없었고, 35년 동안 일본의 지배를 받으면서 왜색불교를 타파하려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특히 이일선 스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이일선 스님은 공부를 굉장히 많이 한 스님으로 기억했고, 정법 불교을 포교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신 분입니다. 스님의 영향으로 고인봉 스님도 계몽운동에 많이 힘썼으며, 불교에 흡입된 칠성단이나 조항단 없애기 운동 등을 했지만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1948년 4·3이 발발하면서 불교혁신을 주장하던 스님들 대다수가 토벌대에 의해 희생되는데, 고인봉 스님은 당시 불교계 연락책을 맡고 있었다. 이러한 연유로 한차례 투옥되었다가 이후 지명수배를 당하여 피신생활을 하게 된다. 그 후 1950년 예비검속의 광풍이 몰아치면서 제주불교계의 원로인 이일선 스님이 제주시 산지포구 바다에서 수장 당하여 죽음을 맞게 되자 고인봉 스님은 부산을 경유하여 일본으로 피신하게 된다.
그 후 은수사는 인적이 끊겨 폐허로 남아 있다가 4·3이 끝나자 고인봉 스님의 속가 모친이 사찰 유지를 위해 고산리 마을 안으로 사찰을 이전하는 등 재건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여의치 않았고, 결국 폐사를 맞았다.
고인봉 스님은 일본으로 건너간 후 동경에 관음사를 세워 조총련 조선불교동맹위원장을 역임했다. 스님은 1970년대 동경에서 열린 세계불교도대회에서 한국 측 부단장으로 참석한 서울 법륜사 덕암 스님과 인연을 맺고 한국에 왕래할 수 있게 되었다. 
고인봉 스님과 정방사 주지 도학 혜일 스님의 인연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혜일 스님은 덕암 스님의 상좌로 당시 일본 유학을 꿈꿀 무렵이었다.
“1983년 봄, 덕암 스님의 도반인 도쿄 관음사 주지 고인봉 스님의 후원으로 일본으로 갈 수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현지 보증인이 없으면 출입국이 어려웠죠. 제주출신이신 고인봉 스님의 물심양면의 후원에 힘입어 일본 대정대학교에서 학사와 석사학위를 취득할 수 있었습니다. 저 또한 정법원을 개원해 교포들과 유학생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할 수 있었습니다. 이럴 수 있었던 게 바로 고인봉 스님의 덕분이었습니다.”
그 후 조총련에서 탈퇴하여 민단으로 옮긴 후 일본 선종사찰에서 머물렀으며, 1988년 입적했다. 은수사는 현재 수월봉 부근에 사찰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터만 남아있다.

제주불교4·3피해 증언마당에 참석한 불자들
제주불교4·3피해 증언마당에 참석한 불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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