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리산방의 엽서(28) - 진리의 흐름에 선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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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리산방의 엽서(28) - 진리의 흐름에 선 사람들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3.10.18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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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인 항산 김승석

지난 10월 10일 어리목광장과 오목교(해발 965m) 부근에서 첫 관측된 한라산 단풍은 이제 만산홍엽을 이루고 있습니다.  
단풍이 드는 것은 일교차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초록색 엽록소가 파괴돼 엽록소에 의해 가려져 있던 색소들이 나타납니다. 밤낮의 온도차가 크면 클수록 붉은빛을 띠는 색소인 안티시아닌과 노란빛을 띠는 색소인 크산토필의 화학 작용이 활성화되면서 단풍은 울긋불긋 더 아름답게 물들고 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빛깔로, 가장 아름다운 몸짓으로 단풍이 곱게 물드는 이유는 나목이 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춘하추동의 사계에 따라 나무가 변신하듯이 고대 인도의 바라문 계급은 인생의 시기를 크게 네 가지로 나누어 각각의 시기에 행해야 할 의무를 결정했습니다.  
아슈라마(Asrama)라고 불리는 이러한 시기 구분은 인생 100년을 4등분하여 학습기, 가정생활기, 은둔기, 유랑기의 넷으로 나누고 처음 두 단계는 주로 세속적인 생활을 중시하고, 나머지 두 단계는 탈세속적이고 보다 높은 이상과 궁극의 진리를 향하여 여생을 보내는 것을 덕목을 삼았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떳떳한 직업에 종사하며 정신적 향상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불자인 나 자신도 배우고 궁구하고 이해하고 실천해야 할 법(dhamma)을 믿고 따르게 된 시기는 때늦은 50대 후반에 들어서입니다. 
변호사로서의 20년 삶이 시공을 뛰어넘어 사물을 그대로 통찰하는 ‘지금·여기’의 앎[知]과 봄[見]을 실현하는 지혜로운 삶이 아니라 법(law)지식을 파는 상인이었다는 성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법法이란 명칭은 같으나 세간의 법, 사회법은 출세간의 법인 불법佛法과 대조하면 그 대상과 공부방법이 매우 다릅니다. 법률 지식은 행위 지침 혹은 평가기준으로 기능하거나 억제와 자유, 분쟁해결과 자원분배라는 사회적 기능을 수행할 뿐, 윤회의 세상으로부터 해탈하는데 방해가 되는 10가지 족쇄, 즉 올가미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옥죄는 역할을 합니다. 
세속적 삶이란 올가미에 속박된 삶이 아닐까 싶습니다. 욕망과 분노의 올가미, 그릇된 견해와 투쟁의 올가미 등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내 안을 들여다보면 애증으로 얽혀 있는 가족관계나 대인관계 역시 올가미입니다.

온갖 종류의 올가미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을 불교에선 범부凡夫라 부릅니다. 출가와 재가의 차이는 소유의 유무에 있고, 성자聖者와 범부의 차이는 해탈·열반을 향한 정진의 강도에 달려 있지만 정진으로 점화되고 노력으로 지펴진 돈오頓悟의 불꽃이 광휘롭게 빛나는 데는 어떠한 차이점도 없습니다.
범부에서 벗어나겠다고 고시 공부하듯이 몇 년간 초기경전 공부에 몰두했습니다. 그 결과 나[我]라는 개념적인 존재를 5온蘊·12처處·18계界 등의 법들로 해체해서 보는 눈이 열렸습니다. 
‘쪼개고 분리하는 앎’이 참다운 지식, 지혜임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자 불법승 삼보에 대한 믿음은 흔들림이 없이 단단하고 튼튼해졌습니다.
나이 듦에 따라 경험적 지식은 늘어나지만 오히려 나에 대한 집착이 강해지고 아집이 견고해지면 이기심과 자기중심적 생각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 자아의식이 10가지 족쇄의 첫 번째인 ‘유신견有身見’입니다. 이것은 오온을 ‘나’라고 ‘나의 것’이라고 고집하는 견해를 뜻합니다. 
우리 범부중생들이 말하는 ‘자아’란 ‘경험자아’에 불과합니다. 시종을 알 수 없는 윤회 속에서 사람과 사물과 관계를 맺어 온 습관, 성향, 방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관계 설정 시에 좋아하고 싫어하는 느낌이나 생각을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고 이를 ‘자기 동일시’한다는 것을 위빳사나 수행을 하면 자각할 수 있습니다.     

믿음을 따르면 법을 따르는 자로 변신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경우에 따라 화를 잘 내고 자만하며, 때때로 탐욕도 일으키고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그는 들어야 할 법도 듣고, 정진을 가하여 해야 할 바도 하고, 견해로 꿰뚫어야 할 것도 꿰뚫고 일시적인 해탈도 얻기 때문에 몸이 무너져 죽은 뒤 특별함으로 향하게 되고 쇠태로 향하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런 경지에 도달한 자를 ‘법의 흐름에 든 자(dhammasoto nibbahati)’라고 명명하면서 일곱 생 안에 열반에 든다고 보증하셨습니다.

아비담마 문헌의 여러 곳에서 열 가지 족쇄 가운데 처음의 셋을 보아서[見, dassana] 버려야 할 법이라고 정리하고 있고, 나머지는 닦아서[修, bhāvanā] 버려야 할 법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견도[dassana-magga]에 의해 예류자가 되고, 수도[bhāvanā-magga]의 성취 정도에 따라 차례대로 일래자, 불환자, 아라한이 된다고 합니다.
저가 존경하고 재가 수행의 거울로 삼고 있는 역사적 인물로는 법을 설하는 자들 가운데서 으뜸인 ‘짓따’ 장자, 사섭법으로 회중을 잘 섭수하는 ‘핫따까’, 다문 제일의 ‘쿳줏따라’ 청신녀 등이 있습니다. 이 세 분은 모두 견도를 성취하여 진리의 흐름에 든 자(예류자)입니다. 
  
저가 배우고 익힌 초기경전 가운데, 가슴속에 깊이 새겨둔 법구경의 게송(Dhp178) 하나가 있습니다.
“이 땅 위에서 왕이 되는 것보다 / 또는 천상에 태어나기보다 / 더 나아가 우주 전체를 지배하는 자보다도 / 소따빳띠 팔라(sotāpattiphala)를 성취하는 것이 훨씬 낫다.”
빠알리어, 소따빳띠(sotāpatti)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진리의 흐름에 들어서는 자’를 뜻하고, 여기서 ‘진리’는 사성제이고, ‘흐름’은 성스러운 팔정도를 말합니다. 팔정도는 선처와 열반으로 향하게 하는 도道라는 조건(magga-paccaya)으로서 성자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진정한 깨달음은 예류도(수다원)부터입니다. 이 경지에선
기도와 의식에 기대지 않고 오로지 법을 따르므로 법안을 가졌는지, 아니한지는 법의 거울로 학인 자신을 비추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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