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보리분법 -깨달음으로 이끄는 수행의 로드맵- 오력을 통한 사마타와 위빳사나 수행 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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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보리분법 -깨달음으로 이끄는 수행의 로드맵- 오력을 통한 사마타와 위빳사나 수행 Ⅰ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3.10.18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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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는 5월 초부터 대략 20여 회에 걸쳐 진용스님께서 (사)21세기불교포럼에서 월 1회 정기적으로 ‘37보리분법’이라는 주제로 법문하신 내용을 연재하려고 합니다.

선정수행을 전혀 하지 않는 채 위빳사나 수행만으로 아라한이 된 성자(聖者, ariya) 모두가 상수멸정(想受滅定)에 들어갈 수가 있을까요? 이것은 무리인 듯합니다. 
아라한이든, 단순한 선정수행 범부(凡夫)이든, 수행할 때는 반드시 색계의  제1선정으로부터 시작하여 서서히 단계를 밟고 올라가 제4선정까지, 그리고 무색계의 제5. 공무변처부터 최고인 제8. 비상비비상처까지 도달하나, 성자인 불환자나 아라한은 상수멸정까지 이릅니다. 
그런데 모든 성자들이 상수멸정을 체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상수멸정은 다른 선정과 마찬가지로 일시적인 상태입니다. 위빳사나 수행만으로 아라한에 이른 분들은 상수멸정을 경험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사마타 수행을 통한 선정수행을 병행 수행한 분들만이 경험합니다. 
결국 상수멸정은 수행자가 사마타와 위빳사나 수행의 병행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단계입니다. 번뇌가 완전히 소멸된 것이 아니라 가라앉고 고요해진 상태입니다. 그렇지만 일시적인 소멸로 이끌어 열반을 순간적으로 체험하기도 합니다. 상수멸정을 성취했다고 해서 완전한 열반을 성취한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조금 어렵게 생각되겠지만, 선정의 단계는 계단 오르기와 같습니다. 깨달음의 첫 번째인 예류도에 도달하면 일곱 생의 윤회 하는 동안에 반드시 아라한에 이르지만, 선정(사마타)수행자는 색계의 선정인 초선에서 멈추는 사람도 있고, 무색계 선정의 처음인 공무변처에서 멈추는 사람도 있는데 수행자의 흥미나 노력에 따라 다양합니다. 
더구나 선정은 깨달음과 관계없이 깨달음에 이르는 도구밖에 되지 않으므로 부처님도 선정은 계발하여도, 하지 않아도 굳이 문제없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선정에 들기 위한 준비에서 가장 간단한 설명은 ‘욕구(탐욕)와 불선을 떨쳐버리는 일’입니다. 
수행자가 욕계에의 집착을 떨쳐버리지 않으면 색계 선정의 세계로 마음이 향하지 않습니다. 욕구에 근거하는, 분노에 근거하는, 무지에 기초를 두는 불선은 당연히 청정한 마음 상태를 유지함에 방해가 됩니다. 
‘욕구와 불선을 떨쳐버리면 색계의 하나인 첫 번째 선정에 들어간다.’는 명구는 가장 간단하게 입정(入定)을 설명하는 말입니다. 아마 이것은 불교 외의 사람들이 다만 선정에 들려고 할 때도 최소한 명심해 두지 않으면 안 되는 명언입니다.
불교가 아닌 선정의 경우는 다만 무엇인가 하나의 대상에 집중해서 마음이 산란하지 않고 통일되어 집중이 강해졌을 때 선정에 든다는 정도의 설명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불교가 아닌 경우는 선정으로부터 일상생활로 돌아오면 또다시 욕계에의 집착도 일어나고, 불선도 일어나기 때문에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불교에는 선정에 들기 위한 마음가짐이라든지 방식이 좀 더 자세하게 나타나 있고, 일단 선정에 드는 것이 성공하면 더 나아가 깨달음의 일부도 발견할 수 있으므로 마음이 청정해져 두 번 다시 욕구나 불선에 돌아오지 않게 됩니다. 부처님은 이와 같이 불교에 특유한 올바른 깨달음으로 이끄는 선정을 만드는 방법을 설명하셨습니다. 
부처님 자신이 선정에 들고 나서 한발 나아가 깨달음을 이루었을 때의 체험을 말한 것과 제자 비구들이 이처럼 수행해서 깨달았다는 것은 경전의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불교적으로 올바른 선정을 만드는 방법>은 실은 선정 그 자체의 체험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선정을 사용하든 아니든 가능한 한, 편하고 빠르게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프로그램의 일환입니다. 
그래서 성자의 경지를 성취하는 것은 어떤 특정한 경험에 의해서 결정되기보다 수행자 스스로 수행을 통하여 자신이 번뇌의 속박으로부터 얼마나 벗어났는가를 확인하는 것으로 증명됩니다.
불교에 특유한 올바른 깨달음을 이루는 데 필요한 힘이기도 한 믿음·노력·사띠·집중·지혜의 오근(5력)이 강조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❶ 믿음(信)
불교적으로 올바른 수행의 첫걸음은 우선 불교의 가르침을 듣는 것과 믿음의 확립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붓다가 출현한 대사건이 있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은 사람은 붓다에 대한 믿음을 얻는 것이 출발점입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빛나고 당당하고 압도적인 온화함이 있는 부처님을 나의 소원을 비는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그 가르침을 들어 “아! 이 가르침이라면 진짜다.”라고 납득하는 확신입니다. 가르침과 세트의 믿음입니다. 
이것이 올바른 수행을 위한 출발지점입니다. 깨달음으로 향하는 첫 단계에서도 부처님의 법(가르침·진리)에 따라 진행되는 형식(type)과 부처님에 대한 믿음 따라 진행되는 형식의 2종류가 있지만, 올바른 수행으로 나아가는 경우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같은 마음가짐으로 시작합니다. 
수행이라고 말하면서 수상한 신비 체험 등에 헤매기 쉽지만, 결단코 깨달음의 길을 벗어나지 않게끔 처음부터 진리를 믿고 목표로 하는 길을 확실히 알아서 수행을 시작해야 합니다. 
부처님과 법에 대한 믿음이 있으면 길을 잃어버리거나 진척되지 않아서 단념하고 싶어졌을 때, 길은 이쪽이라고 하는 이정표가 반드시 나타나 언제나 올바른 방향으로 수정해 줍니다. 
그렇기에 믿음은 오력을 강하게 해주는 근본입니다. 믿음이 강해질수록 노력이 함께 강해집니다. 강한 노력의 힘이 있어야 사띠의 힘이 강해집니다. 사띠의 힘이 강해지면 집중의 힘도 깊어집니다. 집중의 힘이 강해져야 지혜의 힘이 성숙합니다.
들숨과 날숨, 행주좌와의 네 가지 자세 등에 사띠가 끊임없이 이어져서 완전할 때는 수다원(예류도)에 이르러서 마침내 열반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보증합니다. 
믿음을 가지지 않거나 반신반의하면 노력을 기울이지 않게 됩니다. 남들이 하니까 따라 하게 되고 확고한 믿음을 가질 수 없기에 바른 법으로부터 자꾸 멀어지게 됩니다. 믿음이 약해지면 부처님의 바른 수행법으로 완전한 열반에 이를 수 있다는 확신이 들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노력도 포기하게 되고, 더불어 무엇이든 대상을 만날 때 알아차리려고도 하지 않게 되고, 집중할 수 없어 쉽게 포기하게 되어 어리석은 행위들로 사악도에 떨어질 인연만 짓게 됩니다. 
그래서 오력 가운데 믿음이 우선하는 것이고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반드시 바른 믿음이어야지 어리석은 믿음이어서는 아니 되기에 믿음은 지혜와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또한 사마타 수행을 하는 자는 선정에 이를 수 있다는 강한 믿음을 가지는 것이 좋고,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 자는 삼법인의 특성에 대한 지혜가 강한 것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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