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한철의 『표해록』 해부 (16) -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상태바
장한철의 『표해록』 해부 (16) -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3.10.25 13: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771년 1월 3일 흐림

장선비 눈이 총총거렸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 보는 배였다. 
크기가 얼마인지 분간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로 배는 컸다.

장선비는 두건 쓴 임준, 호당, 진중을 따라나섰다.
배의 바닥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언제 나타났는지 사공 이창성이 쪼르르 장선비를 따랐다.
층계를 따라 내려가는 것이 누각을 내려가는 듯했다.

배가 아주 넓어서 세로로 1백여 보나 되었다.
배는 길어서 가로로 2백여 보나 되었다.
주) 성인 1보는 짐작건대 70㎝ 쯤 된다. 바다에 떠 있는 배에서 걷는 걸음이라 치면 그래도 50㎝는 된 것이기에 50㎝ 곱하기 100보는 50m 세로길이, 50㎝ 곱하기 200보는 100m 가로길이, 그 당시 이만큼 큰 배가 있었을까? 요즘 말로 하면 항공모함 정도인데……. 장한철의 조금은 과장된 표현이라 치더라도 상당히 큰 배 임에는 틀림없다. 장한철 일행 29명이 탔던 배와 그와 비슷한 크기의 다른 배가 있어 두 척 배를 큰 배 밑창에 싣고 다닌다니…….

배 한쪽 구석에는 파와 채소를 심었다.
배에다 파와 채소를 심었다? 
하기에 요즘 말로 베란다에 파와 채소를 심기는 한다만…….

닭과 거위가 한가롭게 있는데, 사람이 가까이 가도 놀라 달아나지 않았다.
닭과 거위를 기르고 있다?
하기에 요즘은 개도 집에서 키우기도 하니까.
배의 다른 한쪽 구석에는 땔나무를 많이 쌓아두었다.
땔감 나무가 있다?
그걸로 밥도 지어 먹고 추위에 불도 쫴야 한다는 거로 봐서 한번 출항하면 수개월을 다니는 거로 봐야 할 듯…….

또 다른 한쪽 구석에는 생활에 쓸 물건들이 쌓여 있었다.
처음 보는 이상한 물건도 있었다. 
웬만한 돌 항아리 정도 크기였다. 
위로는 둥그렇고 아래로는 네모졌다. 
옆에 구멍이 하나 뚫려 있었고, 붉은 칠을 입힌 손가락만 한 나무못으로 구멍을 막아놓았다. 
그 못을 빼면 물이 솟아나듯 흘러나온다. 그 위에 전자(도장 글씨)로 쓴 작은 명문(조각한 글)이 있었지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장선비가 신기하게 이리저리 눈을 돌리는 걸 보고 두건 쓴 임준이 다음과 같이 글을 써서 보여 주었다.
“이는 물을 담아두는 그릇이오. 배가 바다 위로 나오면 먹을 물을 얻기 어렵소. 따라서 그릇에 물을 채워놓아 물의 양을 측정하며 없어지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게 하오.”

장선비는 두건 쓴 임준을 따라 층계를 내려 아래로 갔다. 
거기에는 쌀과 비단과 온갖 동전을 저장할 수 있도록 한쪽 구석을 구분해 따로 나누어 놓았다.
다른 쪽 구석에는 양과 염소를 가둬놓고 또 개와 돼지를 치고 있었는데, 혹 짝을 이루거나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다시 층계를 따라 아래로 한 층 더 내려가니 배의 밑바닥이었다.

정리해 보면 사람은 맨 위층에 살고 있으며 방들이 서로 이어져 있었다.
그 아래 3층은 우물 정자처럼 가지런히 사이를 나누고 온갖 물건들을 모두 쌓아놓고 그릇들을 가지런히 놓았다. 
온갖 씀씀이가 다 갖추어져 불편한 점이 없게 되어 있다.
가만히 보니 배의 밑바닥 창고에는 작은 배가 두 척 있었다. 
그중 한 척은 호산도에 정박했던 장선비 일행 배였다.
희한한 일이다.
어떻게 장선비 배가 이 배의 밑바닥 창고에 있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아마 일행을 큰 배에 오르게 할 때 섬에 있던 파손된 장선비 배를 건져 올려 싣고 가 수선하여 쓸 요량인지 모르겠다.

‘대단히 큰 배로구나.’
장선비는 속으로 감탄했다. 
주) 큰 배 밑바닥에 물을 조금 채워 작은 배를 띄울 수 있게 했다. 또 판자로 된 문이 바다로 통하게 반은 물에 잠기고 반은 바다 위로 나와 있었다.

장선비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짐작하건대 이 문을 통해서, 작은 배가 나가고 들어오는구나!’
배의 설계를 자세히 살피니, 판자 문을 여닫을 때 바닷물이 배 밑바닥을 통하여 어느 정도 들어오면 더 물이 차지 않게 만들었으며, 둥근 나무통을 통하여 물을 빼내면 배 바깥쪽은 폭포가 떨어지듯 물이 쏟아진다.
이 나무통은 길이가 두 길(길이의 단위를 나타내는 말, 8~10자 정도) 남짓이고 지름이 한 아름이나 된다.
아래는 통이 크고 위는 통이 가늘어 마치 나팔 모양으로 생겼다. 
가운데는 비어 있고 바깥은 곧았다. 나무통 아래 두 개의 고리가 있어, 그 두 개의 고리를 잡고서 왼쪽으로 돌리거나 오른쪽으로 돌리면 노랫소리 같은 소리가 들리며 배 밑바닥의 물은 나무통 따라 바깥으로 쏟아져 나간다.
그 이치가 펌프 역할을 하기에 대단히 신기하고 교묘하여 가히 제작 방식을 파악할 수 없었다.

장선비는 속으로 중얼거렸겠지?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