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한철의 『표해록』 해부 (20) 최초 설문대할망 문헌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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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철의 『표해록』 해부 (20) 최초 설문대할망 문헌 기록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3.12.07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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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떠 보니 주위는 컴컴하다. 갑판 기둥에 기대어 조금 있으니 동쪽이 슬슬 밝아 온다. 해가 뜨려나 보다. 해가 뜰 무렵 동북쪽에 큰 산이 보였다. 한라산이었다. 언뜻 보면 멀지 않은 듯하지만, 한라산이 가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개 비가 오려면 멀리 있는 물체도 가깝게 보이는 법이다. 장선비 일행은 먼발치서 보이던 한라산이 가까워지자 기뻐서 소리 질렀다. 장선비는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로 울면서 말했다.
“슬프게도 우리 부모가 저 산꼭대기에 올라 내가 오기를 애타게 고대하는구나! 슬프게도 내 아내와 자식이 저 민둥산에 올라 바라보며 애타게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는구나!”
장선비가 큰소리치자 어떤 사람이 일어나 한라산을 향해 절을 하면서 큰 소리로 빌었다.
“흰 사슴을 탄 신선이시여, 나를 살려주십시오. 나를 살려주십시오! 설문대여신(할망)이여,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탐라 사람들로 전해오는 말로는 신선 할아버지가 흰 사슴을 타고 한라산 위에서 노닐었다고 한다. 또 전해오기를 태초에 설문대여신이 있었는데, 걸어서 서해를 건너와 한라산에서 노닐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지금 설문대여신과 흰 사슴 신선에게 살려달라고 빈 것은 다른데 하소연할 수가 없어서 그런 것이다. 장선비 또한 슬픔과 기쁨이 마음에 가득해 일이 잘못될 것을 깨닫거나 헤아리지 못했다.

장한철 표해록 중 설문대할망 관련 일기
장한철 표해록 중 설문대할망 관련 일기

장영주(설문대할망, 2012)에 의하면 설문대신화는 탐라(탐라국 이전)를 창조한 제주도 최초의 신화로 보았다. 장한철의 『표해록』(1771) 「초닷새 일기」를 보면 설문대신화를 추측할 수 있는 내용이 있다.
「해가 뜰 무렵, 큰 산이 보인다. 동북쪽에 있다. 바로 한라산이다. 보기엔 먼 것 같지 않지만, 한라산은 가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대저 하늘에 비 올 기색이 있으면 바다 위에 보이는 산도 모두 가까운데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표류하던 우리 일행은 문득 한라산을 가까이 눈앞에 보고는 기쁨이 지나쳐 저도 모르게 목을 놓아 호곡한다. “슬프다. 부모님이 저 산봉우리에 올라가 보셨겠지. 처자들이 저 산에 올라가 기다렸겠지.” 혹은 일어나 한라산을 보고 절하며 축원한다. “백록선자님, 살려주소. 살려주소. 선마선파님, 살려주소. 살려주소.” 대저 탐라 사람에게는 세간에서 전하기를 선옹이 흰 사슴을 타고 한라산 위에서 놀았다 하고, 또한 아득한 옛날에 선마고가 걸어서 서해를 건너와서 한라산에서 놀았다 한다(정병욱 옮김, 1979 : 79).」

위 인용문에 나오듯이 뱃사람들이 백록선자/선마선파(설문대여신)에게 살려 달라고 기원하는 내용을 보더라도 오래전부터 제주인들은 설문대여신의 존재를 인식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신에게 전적으로 위탁하여 살려달라는 간절한 호소 장면을 보면 설문대여신은 제주도를 지켜 주는 수호신이었음을 짐작게 한다. 

또 전해오기를 태초에 설문대여신이 있었는데, 걸어서 서해를 건너와 한라산에서 노닐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지금 설문대여신과 흰 사슴 신선에게 살려달라고 빈 것은 다른데 하소연할 수가 없어서 그런 것이다.
나 또한 슬픔과 기쁨이 마음에 가득해 일이 잘못될 것을 깨닫거나 헤아리지 못했다.

우리 일행이 나에게 말했다.
“우리가 곧장 탐라로 가는 길을 택한다면 한 끼니 먹을 때 만한 시간이면 족히 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만약 이 기회를 놓친다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이 어느 해에나 가능할지 알 수가 없으니 곧바로 이 배에서 떠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떠돌이 신세가 된 것이 아내와 자식에게 무슨 죄이며, 부모는 어떤 마음이겠습니까?”
내가 대답했다.
“나도 어찌 그런 마음이 없겠소? 그렇지만 그대들은 그렇게 혼줄 난 일은 생각하지 못하고, 호랑이에게 물려 상처를 입어서도 밤길을 경계하지 못하는 것이오?”
나는 소리 내어 울고 있는 우리 일행에게 지금까지 겪었던 어려움을 상기시켰다.
그러나 내 말이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저쪽 사람들이 우리가 소리 지르며 우는 것을 보고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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