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리산방의 엽서(32) - 붓다의 꿈과 범부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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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리산방의 엽서(32) - 붓다의 꿈과 범부의 꿈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3.12.21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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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인 항산 김승석

12월 22일(음력 11월 10일)은 계묘년 동짓날이면서 본지 1339호 발행일입니다. 예로부터 동지를 ‘작은설’이라 하였습니다. “동지를 지나야 한 살 더 먹는다.” 라는 말이 있듯이 동짓날은 한 해를 잘 마무리하고, 또 오는 해를 맞이하는 뜻 깊은 날입니다. 

한해를 돌아보고 새해의 꿈을 담아봅니다. 창밖을 쳐다보니 봄을 기다리는 나목(목련)의 우듬지에는 벌써 손톱만큼 크기의 새눈이 돋아났습니다.
연초에 세웠던 계획은 실천했습니까? 자애와 명상의 삶은 뿌리를 내렸습니까? 이렇게 자문자답을 해봅니다. 내놓을 게 없습니다. 교학은 어느 정도 마스터했지만 아직도 탐·진·치를 내려놓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해 한용운 선사는 「나의 꿈」라는 시에서, 당신이 “맑은 새벽에 나무그늘 사이에서 산보할 때에 작은 별이 되겠다고, / 무더운 여름날에 낮잠을 잘 때 맑은 바람이 되겠다고, / 고요한 가을밤에 독서할 때 귀뚤귀뚤 울겠다.”고 읊조렸습니다. 이처럼 내면의 벗을 발견한 자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며 의연하게 나 홀로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누구나 꿈과 소망을 갖고 있으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평소 마음속에 생각하는 바가 몽환적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간화선에서, 화두 공부가 어느 정도 되었는지를 점검할 때 ‘꿈에서도 화두를 드느냐’고 물어보는데, 아마도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정신의학적으로, 사람들은 전체 수면시간의 약 20%정도 꿈을 꾼다고 하는데, 하루 7∼8시간 잠을 잔다면 1시간 반 정도 꿈을 꾸는 셈입니다. 
꿈은 마음의 자연스런 상태이며, 오감이 깨어 있는 상태와 숙면의 중간쯤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오감들이 그 대상들을 인식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마음은 무의식의 기억들을 회상하기 시작하면서 잠재된 욕망이 그 욕구를 채우려고 꿈을 꾼다고 합니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꿈은 어떤 신神의 계시에 의해 꾸는 것이 아니고 꿈을 꾸는 그 사람이 그 꿈의 작자이고 연출자이고 배우라고 말합니다.
징후(徵候, pubba-nimitta)로서의 꿈과 악몽의 경우는 매우 특이합니다. 전자는 예시적이고 신비적이라면, 후자는 사대四大의 부조화 또는 아주 피로한 경우에 일어난다고 합니다.

 석가모니 세존께서 아직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한 보살이었을 때 다섯 가지 큰 꿈을 꾸었다는 이야기가 「꿈 경」(A5:196)에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다섯 가지 꿈은 범부는 물론이고 대왕, 전륜성왕, 상수제자, 벽지불, 정등각도 꿀 수 없고 오로지 일체지를 가진 보살 한 분만이 깨달음을 실현하기 바로 전날에 이러한 다섯 가지 큰 꿈을 꾼다고 『앙굿따라 니까야』의 주석서는 설명합니다.

“꿈에서 이 대지는 큰 침상이었고, 산의 왕 히말라야는 베개였으며, 동쪽 바다에는 왼 손을 놓았고, 서쪽 바다에는 오른 손을 놓았고, 남쪽 바다에는 두 발을 놓는 것을 보았다. (그 꿈의 징후들로 인해) 여래·아라한·정등각에 의해서 위없는 정등각은 성취되었다. 이것이 첫 번째 큰 꿈이다.”
여기서 우주의 대지가 화려한 침상이 된 것을 꾼 것은 부처님이 될 징후였고, 히말라야를 베개로 꾼 것은 일체지지의 징후였고, 두 손과 두 발이 우주의 정상에 있는 것을 꾼 것은 법륜을 후퇴시킬 수 없는 징후였고, 두 눈을 뜨고 본 것처럼 안 것은 천안을 얻기 위한 징후였다고 해석합니다.

“꿈에서 따리야 풀이 배꼽에서 자라서 구름에 닿은 뒤에 멈추는 것을 보았다.” (그 꿈의 징후들로 인해) 여래·아라한·정등각은 팔정도를 깨달은 뒤 모든 신과 인간들에게 잘 드러내었다. 이것이 두 번째 큰 꿈이다.”

“꿈에서 검은 머리를 가진 흰 벌레가 두 발에서 위로 기어올라 양 무릎을 덮는 것을 보았다. (그 꿈의 징후들로 인해) 흰옷을 입은 많은 재가자들이 여래께 평생을 귀의하였다. 이것이 세 번째 큰 꿈이다.”

“꿈에서 각기 다른 색깔의 새 네 마리가 사방에서 와서 발아래 떨어지더니 모두 흰색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 (그 꿈의 징후들로 인해) 네 가지 계급의 끄샤뜨리야와 바라문과 와이샤와 수드라들은 여래가 선언한 법과 율에 의지해서 집을 나와 출가한 뒤 위없는 해탈을 실현한다. 이것이 네 번째 큰 꿈이다.” 

“꿈에서 분뇨로 된 큰 산 위에서 경행을 하였는데 분뇨에 묻지 않은 꿈을 꾸었다. (그 꿈의 징후들로 인해) 여래는 의복과 탁발음식과 거처와 병구완을 위한 약품을 얻지만 여래는 그것에 묶이지 않고 흘리지 않고 집착하지 않으며 위험을 보고 벗어남을 통찰하면서 수용한다. 이것이 다섯 번째 큰 꿈이다.” 

저 자신도 예시적인 꽃 꿈을 꾼 적이 여러 번 있습니다. 고향 옛집을 찾아 온 손님들의 신발이 온통 꽃으로 변한 꿈은 첫 아들의 태몽이었고, 아까시야 꽃이 피는 꿈은 사법시험 합격의 길몽이었고, 내자와 함께 어떤 산길을 걷다가 
복사꽃 핀 농장을 꿈에 본 뒤 도심의 아파트를 떠나 아란야 농원으로 이사하게 된 것이 그러합니다.
돌이켜보면 이 꿈들 모두가 범부들의 꿈처럼 욕망의 잠재적 성향들이 현몽한 것이 아닐까요. 나이 듦에 따라 욕망의 그물이 찢어지고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취하는 버릇이 많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내 말과 행동을 지배해 왔던 확증 편향적 사고의 잔재가 어른거립니다.   

한해의 변곡점에서 필요한 것은 무한 욕망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현상과 실재를 제대로 들여다 볼 줄 아는 지혜의 눈을 밝히는 것입니다. 
연말을 세모라고 합니다. 그럼 새해는 네모입니까? 순백의 ‘달항아리’ 백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둥그런 달 항아리 안에 마음먹은 만큼, 마음 씀씀이만큼 지혜롭게 헛것을 담지 않고 보살의 꿈을 담아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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