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전통문화 계승 및 역사고증을 위한 학술대회 - 제주 법화사의 가치 조명을 중심으로 -제주불교의 전개와 법화사의 위상
상태바
불교전통문화 계승 및 역사고증을 위한 학술대회 - 제주 법화사의 가치 조명을 중심으로 -제주불교의 전개와 법화사의 위상
  • 김익수
  • 승인 2023.12.21 23: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불교전통문화계승 및 역사고증을 위한 학술대회가 지난 5일 제주법화사에서 개최됐다. 학술대회에서 ‘제주 법화사의 가치 조명을 중심으로’ 제주불교의 전개와 법화사의 위상에 대해 제주대학교 전영준 교수의 주제 발표문을 요약 게재한다.
법화사의 가치 조명을 중심으로 주제 발표하고 있는 제주대학교 전영준 교수
법화사의 가치 조명을 중심으로 주제 발표하고 있는 제주대학교 전영준 교수

전근대사가 특히 고려시대 제주의 사정을 전하는 문헌 기록은 그리 많지 않다. 특히 고려시대의 제주 또는 탐라국 후기의 시대상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매우 제한적이다. 탐라의 고려 접촉은 동아시아의 전통적 조공질서 속에 포함되어 부정기적인 진헌무역이 이루어졌고, 팔관회 참여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불교가 수입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탐라국 후기인 고려 전기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수정사, 법화사, 원당사, 오등동 사지 등에서는 10~11세기의 유물이 출토되는 사실은 제주고고학의 연구 성과에도 잘 부합한다. 이와 함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특정되어 있는 수정사, 법화사, 원당사, 묘련사, 서천암, 보문사, 산방굴사, 존자암, 월계사, 문수사, 해륜사, 만수사, 강림사,  소림사, 관음사의 15처 내외의 寺名은 고려불교를 전승하였다는 의미이므로, 이를 숙고하면 탐라국 후기에 전래된 고려의 선진불교가 지방 정부 편입 이후에도 지속되어 수많은 寺庵의 수축과 중창으로 이어졌음을 알게 한다. 이러한 탐라와 제주의 불교전통은 조선 초기에 이르러 비보사찰의 지위를 갖거나 사원통폐합의 시기에 사원노비가 대폭 감축되는 등의 역사적 현장에 놓여 있었다고 판단된다. 불교의 전래는 寺院증물에 해당하는 건축술, 제지술, 판각술 등의 다양한 문화적 요소도 함께 전승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이른 시기부터 관련 수공업도 성장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현재 제주불교는 고려 또는 그 이전 시기부터 전승된 정체성을 바탕에 두고 이해하여야 할 것이며, 문헌학과 고고학이 상호 협력하는 연구방법론의 개발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제주법화사는 비보 사찰의 위상으로 존재하였는데, 규모로는 수정사보다 훨씬 컸을 것으로 보고 있다. 총 8차에 걸친 조사에서 건물지 10동, 계단시설, 보도시설, 폐와 무지, 담장, 추정 蓮池 등을 비롯한 수많은 유구가 확인되었다. 출토유물로는 명문와를 비롯한 각종 기와, 청자를 비롯한 각종 도자기, 도기, 청동등잔, 화폐 등이 다량 출토되었다. 또한 법화사지는 총 4 단계의 시설변화가 있었음을 지적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1차 시기의 유물중 ‘至元六年己巳始重刱十六年己卯畢’ 의 명문와 1269년 중창을 시작하여 1279년에 마쳤다는 사실을 기록하였다는 점에서 이 시기 이전에 사찰이 존재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중창 시기인 1269년 즉 13세기 중반 이전의 중요한 유물은 개원통보, ‘法華經前燈 盞此樣四施主朱景’ 銘 청동 등잔과 청자 양각 연판문 대접, 고급 도기 등이다. 개원통보의 뒷면 상단에 초승달 모양이 새겨진 형식으로 이 양식의 사용 시기는 무종회창년간 (武宗會昌年間, 841~846)이다. 출토 유물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며, 일부 도기 중에는 10세기 이전의 제작 수법을 가진 것들이 있다. 청동 등잔 또한 남송 때의 등잔과 유사하여 10~11세기 유물로 판단하고 있다. 
또한 폐와 무지에서 발견된 청자도 비교적 이른 시기의 녹청자 계열로 11세기경을 중심연대로 하는 것이어서 12세기 이전에 법화사가 운용되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법화사가 부각되기 시작한 시점을 원의 탐라총관부가 설치되는 충렬왕 원년 (1275)이후이며, 중창시기와 맞물린다는 점에서 원 관리들의 사찰운영 개입과 재정적 지원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강정동 대궐터’라는 유구와 법화사와 서아막 및 동아막과의 지리적 위치를 보면 법화사의 지정학적 위치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법화사의 유물이 비교적 이른 시기의 것이고, ‘至元’명 명문와의 존재는 법화사의 초장을 미루어 짐작할 때 자체적으로 생산한 기와의 사용을 알려주는 내용인 셈이다. 즉, 상당히 고급기물이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이미 사찰의 초창부터 건축자재로 사용되었을 기와 제작은 수준 높은 단계에 이르렀을 것으로 생각된다.

학술대회를 경청하고 있는 참석자들
학술대회를 경청하고 있는 참석자들

아울러 함께 발굴된 용과 봉황문이 장식된 元式 기와는 포목흔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원의 와장에 의해 제작된 막새기와임을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은 막새기와를 사용하여 축조된 건축물은 원의 목수와 기술자들이 제주에 이주하여 조영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며, 元世를 비롯한 원의 기술자에 의해 탐라에 원 세조의 피난 궁전이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것은 원의 기술자가 투입되어 제작된 원식 기와나 원나라 상도 궁성에서 확인되는 주좌각원 주초석의 축조 및 용과 봉황문 막새의 사용은 원나라 황실 건축 기술이 그대로 적용된 건물이었음을 의미하며, 원 순제의 피난궁은 법화사 경내에 존재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러므로 법화사는 제주가 원의 지배 아래 놓였을 때는 그들의 신앙처로 적극 활용되었을 것이며, 그 이후에는 제주의 비보사찰의 위상과 함께 막대한 경제력과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찰이었음이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확인된다.
 

법화사 구화루
법화사 구화루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