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한철의 『표해록』 해부 (23) -꿈속 하얀 옷 입은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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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철의 『표해록』 해부 (23) -꿈속 하얀 옷 입은 여인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4.01.10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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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1년 1월 6일 바람

[주] 사람이 죽음에 이르는 어려운 순간에 먼저 떠오르는 것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 가장 사랑스러운 추억, 가장 그리워하는 것들이다. 장선비는 그 어려운 순간에 상상의 연인을 그려내었다. 이 상상으로 그는 생존을 이어나가며, 20세의 과부인 조씨를 만나게 되었고, 감언이설과 언변의 기술로 한밤을 보내고 난 후, 과거의 약속을 이어가겠다고 다짐했다. 이 이야기는 홍랑 홍윤애 이야기나 춘향 성춘향 이야기에서 추론할 수 있는 것들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저녁 무렵, 우리 배는 노화도 서북쪽에 이르렀다. 노화도는 장선비 일행이 바람을 잘못 만나 맨 처음 표류하기 시작했던 곳이다. 해가 저문 뒤에는 서북풍이 세게 불고 눈과 비가 뒤섞여 내렸다. 큰 파도가 하늘에서 방아질을 하듯이 출렁거렸고, 모진 바람이 바다를 흔들어댔다. 이에 일행이 모두 소리쳐 울부짖었다. 사공 이창성이 울면서 장선비에게 말했다.

“이제 어찌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몸을 감싸고 포장’하여 죽음을 기다리겠습니다.”

주위를 살펴보니 사공 이창성은 목수건으로 머리를 감싸고 밧줄을 당겨 자신의 몸을 묶고 있었다. 여러 사람은 사공 이창성이 하는 것을 보고 더욱 놀라 큰 소리로 곡 소리를 일제히 냈다. 모두가 살아날 가망이 없음을 미리 예견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어른거리다가 도깨비들이 이상한 모습으로 장선비 눈앞에 붙어 있었다. 이때 장선비 머리에서 혼이 빠져나가 죽음과 삶 사이에 놓여 있었다. 갑자기 꿈인지 생인지 비몽사몽 간에 어느 아름다운 여인이 하얀 옷을 입고서 장선비에게 밥을 갖다 주었다. 아름다운 여인은 귀신이었으리라. 나중에 보니 ‘조’ 씨였다.
키가 어지럽게 부딪치며 배 옆쪽 갑판을 때렸다. 키가 부딪히는 것을 그대로 두면 배 갑판이 파손되어 깨지는 것을 기다리는 꼴이기에 장선비는 일행에게 명령해 부서져 가는 키를 구하도록 했다. 이에 두 사람이 나섰다. 탐라 상인 김복삼과 이득춘 두 사람이 뱃머리로 기어가서 키를 잡으려 했다. 그러나 세찬 바람에 날려 두 사람이 바다로 떨어져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이 사라지자 일행은 27명으로 줄어들었다.

이때 비바람이 아주 험하고 파도가 산만큼 높아 배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파도를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요동치고 점차 위험한 지경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장선비 일행은 절망하여 도저히 살 길이 없다고 생각했다.

장선비는 자맥질을 하지 못한다. 일행이 탄 배는 바람을 타고 표류하면서 제멋대로 가는데 소안도를 지나 대모도와 소모도 사이를 지났다. 배의 서쪽 가장자리에서 배의 동쪽 가장자리로 기어가서 엉겁결에 배에서 뛰어내렸다. 그곳이 바위섬의 들머리였기 때문에 바닷물이 허리로부터 가슴 정도까지 밖에 차지 않았다.

장선비는 살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뻐하며 손과 발을 헤젓고 비틀거리며 50여 걸음을 나아갔다. 그러자 이윽고 해안가로 나오게 되었고 땅을 밟을 수 있었다. 다행히도 산기슭의 바위 줄기가 해안가에 50여 걸음 들어간 것이 장선비가 살 수 있는 길로 인도해 준 셈이었다.
장선비는 육지에 올라 해안에 의지하여 앉아 있었다. 그러나 머리가 혼미해져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놀라고 두려운 가운데, 사방을 둘러보니 적막하고 사람 자취가 전혀 없었다. 사나운 물결이 해안을 때리고 천둥소리를 몰고 왔으며 큰 파도가 허공으로 솟아 물보라가 눈 덮인 산을 뒤집어 놓을 뿐이었다. 이윽고 장선비 눈에 어떤 사람이 헤엄치는 것이 언뜻 보였다 안 보였다 하더니 파도 사이에서 나왔다. 그 사람은 웃통이 벗겨져 있고 머리가 풀려 있어서 누구인지는 알 수 없는 채로, 대개 바다에 뛰어들어 헤엄치다가 파도에 치여 옷이 벗겨지고 머리가 헤쳐지는 상황이었다. 그 사람은 겨우 해안으로 올라왔지만, 쓰러져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이런 일이 있으면 대개 넋을 잃고 기운을 잃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사람은 귀신 문턱을 넘어 사람 세상으로 다시 돌아왔기에, 여러 사람은 바다를 바라보며 울음을 터뜨렸다. 육지에 올라온 일행은 서로를 안아 울음을 터뜨리며, 사람이 사는 곳을 찾아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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