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갑진년 신년기획 - 제주불교 르네상스를 꿈꾸며 - 실크로드·다르마로드를 가다➁ - “현장의 서역 구법 출발지 과주 쇄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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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갑진년 신년기획 - 제주불교 르네상스를 꿈꾸며 - 실크로드·다르마로드를 가다➁ - “현장의 서역 구법 출발지 과주 쇄양성”
  • 특별취재반 안종국(편집국장)
  • 승인 2024.01.10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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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이 강설했던 탑이사는 모래로 돌아가고
아육왕탑 허물어진 벽면엔 부서진 불타상만
쇄양성 탑이사 아육왕 불탑 유적. 이 탑은 현장의 강설을 묵묵히 들었을 역사의 증인인 셈이다.
쇄양성 탑이사 아육왕 불탑 유적. 이 탑은 현장의 강설을 묵묵히 들었을 역사의 증인인 셈이다.

현장은 구법여행을 출발할 당시 27세였다. 당시 때 아닌 서리로 당나라는 흉년이 들어 승려들에게 피해가 적은 중국 내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라는 칙령이 내렸다. 이 기회를 이용해 현장은 몇몇 도반과 함께 장안을 출발해 서역을 가기 위한 감숙성의 계곡으로 난 길을 따라 여행을 떠났다. 이 감숙주랑甘肅走廊은 몽골사막과 청해성의 척박한 고원지대 사이로 난 길로 타클라마칸 사막으로 이어져 있다. 현재의 우웨이 武威인 양주凉州는 감숙성 끝의 마지막 도시로, 사막을 넘어 몽골과 타림 분지에 이르는 실크로드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현장은 양주에서 한 달간 머물면서 서역으로 가는 방법을 모색했다. 무역상들과 승려들에게 법문을 강설하면서 이름이 알려지자, 양주 도독은 현장을 불러 당나라 수도로 돌아갈 것을 당부했다. 당시는 당나라 건국초기라 국경을 봉쇄하고 서역의 이민족들을 경계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국경을 넘어가면 엄격한 처벌이 따르는 때였다. 현장은 행동거지를 조심하며 서역으로 갈 방법을 찾으면서 양주에서 덕이 높은 승려가 보낸 두 명의 젊은 제자의 안내로 과주瓜州로 갈 수 있었다. 과주는 오늘날 안서로 불리며 광활한 사막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양식과 물품을 보급 받을 수 있는 전초기지였다. 

쇄양성. 현장은 쇄양성 북문을 통과해 하미국으로 향했다. 당시 과주는 이 쇄양성을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되어 있었을 것이다. 감숙성甘肃省 안서현安西县 경내 호주현성瓜州县城 동남쪽 약70㎞ 고비사막戈壁荒漠중 유일한 한당고성유지汉唐古城遗址 이며 과주고성瓜州故城, 진창고성晋昌故城 이라고도 한다. 주성主城은 장방형长方形이며 남북길이 470m, 동서폭 430m이다. 주성외에 4개의 옹성瓮城. 4방으로 빙둘러 성곽용도로 쓰인 축조물이 있다. 황토를 다져서 만든 높이 9m, 폭 5m정도 성벽으로 이루어졌으며 매우 견고하다
쇄양성. 현장은 쇄양성 북문을 통과해 하미국으로 향했다. 당시 과주는 이 쇄양성을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되어 있었을 것이다. 감숙성甘肃省 안서현安西县 경내 호주현성瓜州县城 동남쪽 약70㎞ 고비사막戈壁荒漠중 유일한 한당고성유지汉唐古城遗址 이며 과주고성瓜州故城, 진창고성晋昌故城 이라고도 한다. 주성主城은 장방형长方形이며 남북길이 470m, 동서폭 430m이다. 주성외에 4개의 옹성瓮城. 4방으로 빙둘러 성곽용도로 쓰인 축조물이 있다. 황토를 다져서 만든 높이 9m, 폭 5m정도 성벽으로 이루어졌으며 매우 견고하다

과주는 당시에 쇄양성이 중심지였다. 지금의 안서시내로부터 동남쪽에 위치한다. 쇄양성에 도착한 현장은 신중을 기하며 한 달간 더 머물렀다. 두 명의 안내인은 돌아가고 타고 온 말은 죽었다. 과주의 관리는 현장의 계획을 눈치 챘지만, 불자였던 그는 월경을 금한다는 황제의 칙령에 따른 명령서를 찢어버리고 신속히 그곳을 떠나라고 권했다.   
현장은 말을 새로 한 필을 샀는데, 반타(磐陀, Bandha)라는 서역인이 옥문관을 지나 다섯 봉화대를 지나가게 도와서 하미까지 안내하겠다고 나섰다. 그리고 이튿날 새벽에 야윈 얼룩말을 탄 노인을 데리고 함께 나타났다. 그 노인은 그 말이 서른 번도 넘게 사막을 횡단했다고 소개하며 사막을 건널 때 닥칠 위험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현장은 새로 산 말을 노쇠한 얼룩말과 교환하고 이른 새벽길을 떠났다. 두 사람은 소용돌이치는 물살이 위험하다는 호로하(瓠蘆河)까지 나아갔고, 당나라의 마지막 전초기지인 옥문관이 보이는 곳에서 숙영자리를 폈다.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大唐大慈恩寺三藏法師傳)에 따르면 현장은 과주에서 새벽 일찍 출발하여 걸어서 북쪽 하미방향으로 20-30리(약 8~12㎞) 이르른 곳에 호로하와 옥문관이 보이는 곳에 숙영을 했다고 한다. 이 옥문관은 수나라때 쇄양성鎖陽城부근에 세운 것으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옥문관玉門關과는 다른 곳이다. 지금의 옥문관은 당나라 시기에 세운 것으로 현장이 서역순례에 오를 때에는 그 자리에 없었다. 수나라때 이곳에 옥문관을 세운 것은 당시에도 이곳이 서역을 오가는 중요한 관문이었기 때문이다. 과주(안서)의 쇄양성은 당나라 시기에 크게 호황을 누렸다. 지리적인 중요성과 함께 실크로드 전성기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당시 쇄양성 지역은 소륵하 주변의 풍부한 수초와 녹지가 끝없이 이어져 물산이 풍부하고 토지가 비옥했다. 
쇄양성의 본래 이름은 ‘고통스러운 골짜기’라는 뜻의 ‘고욕성(苦峪城)’이었다. 그러다가 성 주변에 많이 자라는 ‘쇄양鎖陽’이라는 식물의 이름을 갖다 붙여 고쳐 부르게 된다. ‘쇄양’이라는 식물이름이 붙은 연원은 이렇다. 당나라 초기 설인귀가 서역정벌을 위해 쇄양성에 왔는데, 합밀 국 哈密國(지금의 하미)의 원수인 소보동蘇寶同의 매복에 밀려 쇄양성에 고립되어 갖히게 되었다. 당시는 엄동설한이라 성에 갇힌 설인귀의 군대는 원군이 지원을 올 때까지 식량부족에 시달렸다. 그때 병사들이 눈 속을 뚫고 나온 쇄양을 먹으면서 배고픔을 이겨내고 성을 사수할 수 있었다. 이에 당태종은 그 성을 쇄양성으로 고쳐 부르게 했다. 

쇄양
쇄양

쇄양은 고비사막의 특산품으로 사막의 산삼으로 불릴만큼 의학적인 약효가 뛰어난 식물이다. 병사들은 이것을 먹고 원기를 회복해 사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쇄양은 영하 20도 전후에서 자라는 식물로 쇄양이 자라는 곳에는 눈이 쌓이지 않는다고 한다. 
현장은 오늘날 과주의 쇄양성의 북문을 통과해 서역으로 향했다. 현장이 과주에서 한 달간 머물때 쇄양성에서 1㎞ 떨어진 탑이사塔爾寺에서 강설을 하였다. 이때 첩자가 현장의 계획을 눈치채고 관리에게 고발했으나 과주자사 독고달은 독실한 불자였기에 양주자사로부터 현장이 그곳에 오면 체포하라는 명령서도 찢어버린다. 
쇄양성은 오늘날 성벽이 4~5m정도로 깎였지만, 외성의 돈대는 외형이 잘 남아 있다. 약 20여m의 높이인 이곳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멀리까지도 물체의 움직임을 잘 포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내성은 동서길이가 700m이고 남북으로 200m의 면적이다. 쇄양성 북문 자리에는 현장이 이곳을 통과해 서역으로 향했다는 현장출성처(玄莊出城處)라는 표지석이 설치돼 있다. 당시 최전방 군사기지는 지금은 황량하고 쓸쓸한 홍류와 모래 속에 어지러이 쇠락한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구법의 열망이 강했던 현장이었을 지라도 과주를 떠날 때 그는 활기찬 이 동상처럼 호기롭지 만은 않았을 것이다.
구법의 열망이 강했던 현장이었을 지라도 과주를 떠날 때 그는 활기찬 이 동상처럼 호기롭지 만은 않았을 것이다.

현장이 강설을 하였다는 탑이사는 이미 폐허가 되어 버린 입구를 지나면 부서진 불탑이 그나마 지난날의 번성했던 영광의 흔적을 알려주고 있다. 탑이사 불탑은 황토흙으로 벽돌을 만들어 쌓아 올렸으며 형태는 남았지만, 그 속에 정좌한 불상이 부서진 채로 남아 있다. 이 불상은 아마도 구법의 열망을 간직하고 기회를 엿보던 현장의 속마음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과주는 맛있는 오이가 많이 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과주의 이 오이는 일종의 채소과일인 수박같은 큰 오이를 말한다. 맛도 달고 풍부한 과즙과 향이 수박보다 더하고 꿀같은 맛이 난다. 그래서 사람들은 과주의 오이를 ‘밀과蜜果’라고 부른다. 당도가 15%를 넘으니 꿀맛과 같았을 터이고, 제주감귤보다 달았을 것이다. 
또 과주는 초서의 대가였던 장지張芝의 고향으로도 유명하다. 이 지역을 ‘초성고리草聖故里’라고 하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장지는 한나라 말기인 헌제 때의 인물로 그의 부친은 흉노를 무찌른 공로로 흉노중랑장을 지냈다. 그러나 아들은 서법에 관심이 많아 당대 유명한 학자였던 최원崔瑗과 두조杜操의 서법을 익혔다. 장지는 두 대가의 필법을 익혀 자신만의 비법인 ‘일필서’를 완성했다. 서법가들은 그의 필법을 두고 초서의 성인이라고 일컫는데, 왕희지조차 장지를 존경했으며 장지의 필법을 익혔다. 장지는 후한 말기의 혼란한 시대에도 명예를 추구하지 않고 마음을 다스리며 서법에 매진했는데 그의 이러한 정신과 품격은 오늘날까지도 과주의 인물로 명성을 빛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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