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리산방의 엽서(35) - 제주 수선화가 나에게 가르쳐 준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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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리산방의 엽서(35) - 제주 수선화가 나에게 가르쳐 준 것들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4.01.24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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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인 항산 김승석

입춘을 앞두고 있으나 해발 200미터의 고지대라서 그런지 출리산방의 아침은 코끝이 시리고 차디찬 산바람에 몸은 움츠려듭니다. 
계절 변화에 둔감해진 감성을 일깨우기 위해 두툼하게 옷을 입고 남쪽 뜰로 나아가 겨울 목련을 바라봅니다. 
새하얀 눈이 내려 나목에 눈꽃이 언제 필까 설레어 했는데 눈은 아니 오고 우듬지마다 은빛 아린芽鱗이 돋아나서 서리 낀 마음에 봄기운을 느끼게 합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감성을 깨우는 초록생명들이 보입니다. 애기동백이 지난해 12월부터 꽃을 피우는 중이고, 그 옆 자포니카 동백도 정초부터 선홍빛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1월 중순으로 접어들자 매화가 피기 시작했습니다. 세한삼우歲寒三友의 하나인 설중매는 고결한 기품을 지니고 있으나 동백의 매력에 비할 바는 아닌 듯합니다. 
한결같은 푸른빛을 띠는 상록의 잎을 사시사철 유지하며 추위 속에 꽃을 피우는 동백의 항심恒心이 없기 때문이겠지요.  

설중화雪中花의 하나인 제주 수선화도 울담에 기대여 수줍은 듯 연노랑 얼굴에 초록 두 손을 받치고 혹한의 겨울을 견디고 피어나 뜰 안을 장엄하고 있습니다.  
문득 마스터가드너인 내자가 수많은 꽃을 기르고 정원을 가꾸면서 성산읍 신풍리 자성원에서 구근을 구해다 뜰 안에 심으며 ‘수선화 없는 겨울이란 생각할 수 없다’라고 말한 게 뇌리를 스쳐갑니다. 
그런데 내 마음의 사랑 꽃은 여전히 피지 못하고 서성이고 있습니다. 
하늬바람 따라서 수선화 향기가 뜰 안에 펴집니다. 살살 다가가서 코끝을 대봅니다. 내자 덕분에 수선화의 은은한 향기를 맛봅니다. 
삭막한 겨울에 피는 꽃들이 있어 사람들이 사는 마을마다 화색이 돌고 그윽한 향기로 인해 사람들의 얼굴에도 웃음꽃 향기가 솟아납니다. 
수선화는 먼저 봄을 알리는 알뿌리 식물 중 하나로 밝은 노란빛은 주위를 따뜻하게 하고 마음까지 밝게 하므로 ‘조건 없는 사랑’이라는 꽃말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꽃말은 어떤 조건이나 대가 없이 타인을 사랑하는 마음을 뜻하므로 불교의 자애(mettā)와 맥락이 같다고 보여 집니다.  

《이띠웃따까(Itivuttaka, 如是語經)》의 「자애 수행 경」에서. 부처님께서는 보시·지계·수행의 세 가지 공덕의 토대들은 그것이 무엇이든 자애를 통한 마음의 해탈의 16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이런 마음의 해탈은 초기불전의 여러 경들에서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四無量心으로 정형화되어 나타나는데, ‘자애’는 자기뿐만 아니라 일체의 존재들의 안전과 행복을 바라는 마음입니다. 
자애수행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냄의 위험과 인욕의 이익을 반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꽃잎이 겹꽃으로 되어 있는 제주 수선화도 있고, 금잔옥대 수선화도 있습니다. 요즘 제주시 한림읍 협재리 한림공원 수선화정원에는 겨우내 피어난 오십만 송이에 달하는 이 두 종류의 수선화의 아름다운 군무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울안과 울 밖에서, 길가의 돌담 밑이나 해안도로가에서도 볼 수 있는 야생의 제주 수선화가 있습니다. 흔하다고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제주다움의 가치를 드러낼 수 없겠습니다.  

추사 김정희는 8년의 제주유배 시절에 친구 권돈인에게 쓴 편지에서 제주 수선화를 예찬하는 글을 보냈습니다. 
“이곳의 마을 마을마다엔 한 자쯤의 땅에도 수선화가 없는 곳이 없습니다. 화품花品이 대단히 높은데 한 포기에 십여 송이, 대개는 팔구 내지 오륙 송이로서 정월 그믐과 2월 초에 피어서 3월까지 이릅니다. 산과 들, 밭두둑에 구름처럼 흰 눈처럼 드넓게 깔려있습니다. … (중략) … 그런데 토착민들은 이것이 귀한 줄을 모릅니다. 소와 말들이 뜯어먹고 짓밟아버립니다. 게다가 보리밭에 많이 자라기 때문에 농사짓는 사람들이 호미로 파내어 버리는데 파내도 자꾸 돋아나기 때문에 이것을 원수 보듯 합니다. 사물이 제 자리를 얻지 못한 것이 이와 같습니다."라고. 
추사는 ‘수선화’ 시詩에서 매화가 고상하긴 하지만 뜨락을 벗어나지 못하는데 수선화의 품격은 그윽하고 담담하여 해탈한 신선과 같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만약 꽃이 없다면 세상은 얼마나 삭막할까요. 나이가 들면서 이런 생각이 자연스레 사라진 것인지, 팍팍한 세상살이에 찌들어 겨울의 낭만을 느끼지 못하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수선화 옆에서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은 무덤덤해졌고, 조금은 무신경해졌음을 깨달았습니다. 
  
떠나는 겨울과 다시 오는 봄 사이를 헤집고 수선화는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비록 떠날 때 떠나더라도 사랑을 품고 해탈한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사랑을 많이 품는다고 해서 마음이 넉넉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비움이 채움보다 편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사랑만을 품고 싶다고 해서 이별의 슬픔을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겨울의 낭만을 한없이 즐기고 싶다 해서 초록생명들이 환하게 웃는 봄이 오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일상의 삶에도 사계절이 있습니다. 겨울이 지나 봄이 오듯 행·불행은 오고갑니다. 늘 흐름 속에 있는 고달픈 인생살이에서 사랑은 심층수처럼 막힘 없이 흘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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