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갑진년 신년기획 - 제주불교 르네상스를 꿈꾸며 - 실크로드·다르마로드를 가다➂ - 현장이 도착한 서역 첫 사막도시 하미국과 백양강 불교사원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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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갑진년 신년기획 - 제주불교 르네상스를 꿈꾸며 - 실크로드·다르마로드를 가다➂ - 현장이 도착한 서역 첫 사막도시 하미국과 백양강 불교사원유적
  • 특별취재반 안종국(편집국장)
  • 승인 2024.01.24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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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양구사찰 전경. 백양구 사찰은 당나라 시기에 번성하였고, 명나라 시기에 확장되었다.
백양구사찰 전경. 백양구 사찰은 당나라 시기에 번성하였고, 명나라 시기에 확장되었다.

하미는 실크로드 여행자들이 필수적으로 머무는 도시는 아니다. 보통은 하루나 이틀 중간 기점으로 머물다 가는 곳인데, 장기 여행자들에게는 오래 머물다 보면 볼거리가 너무나 넘쳐나 그만큼 매력이 또 많은 곳이기도 하다. 나는 하미가 조금은 남다른 의미로 가고 싶은 곳이었다. 그 이유는 당나라 권역인 과주를 떠나 다섯 개의 봉수를 거쳐 현장이 죽을 고비를 넘기고 처음 도착하는 서역도시였기 때문이다. 
이오국이 있었던 하미에서 현장은 열흘을 머물렀다. 당시 서역에 대한 국가안보 및 여러 이유로 대당서역기에서는 언기국에 도착할 때까지의 기록은 등장하지 않는다. 후에 기록된 <대당자은사삼장법사전>에서 이오국에서의 일화가 간단히 전할 뿐이다. 이오국에서 현장은 한 사찰에 머물렀다. 이 사찰에서는 중국계 승려 세 명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현장을 보자 매우 감격하여 한 노승은 부둥켜 안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어찌 오늘 고향 사람을 볼 줄 알았겠습니까?” 현장도 감격하여 동병상련의 눈물을 흘렸고, 열흘간 머물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백양구사 중앙 본당 유적. 불상은 사라졌고, 양쪽으로 천왕상을 세웠던 받침대만 남았다. 서역의 길목으로 현장이 이 사찰에 머물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백양구사 중앙 본당 유적. 불상은 사라졌고, 양쪽으로 천왕상을 세웠던 받침대만 남았다. 서역의 길목으로 현장이 이 사찰에 머물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서역의 여정은 바로 현장이 머물렀던 그 작은 사찰이 어디인지 찾는 것에서 출발한다. 오늘날 백양구불사유지(白楊泃佛寺遺祉)로 알려진 하미시 이저우 지구 서쪽으로 약 60km지점 백양강 상류에 당나라 불교 전성기의 사원 유적지가 있다. 여기에는 사찰과 부속건물들이 남에서 북으로 10km 이상 뻗어 있으며, 큰 개울 양쪽으로 들어선 시설중에 서쪽에는 주로 사찰, 석굴, 불탑이 집중되어 있다.
이곳이 바로 현장이 열흘간 머물렀던 곳이라고 추정하고 있는데, 당시 이우국에는 7개 도시가 있어 현장이 이우를 지날 때 어디로 갔는지는 역사 자료에 자세한 기록이 없다.
2014년부터 2015년까지 신장문화유적고고학연구소가 백양구 불교사원 터를 정비하던 중에 남쪽 지역에서 탑과 사원이 발견되었는데, 이곳이 바로 현장이 도착했던 곳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이 사원은 남쪽을 향하고 있으며 나란히 세 개의 요사채로 구성되어 있었다. 
현장은 물도 마시지 못하고 4박 5일을 사막을 헤매다 결국 쓰러졌다. 다섯째 날 한밤중에 서늘한 바람이 불어 현장을 깨웠고, 현장은 일어서서 말을 이끌고 10리 이상을 걷느라 애썼다. 이때 길을 알던 늙은 말이 갑자기 미친 듯이 달려와서 그 늙은 말을 따라 현장은 초원과 물을 찾았다. 그렇게 물과 풀밭에서 이틀을 쉬고 마침내 사막을 나와 이우에 이르렀다.
고창국 시기 이곳은 하미 지역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사찰이었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백양구 사원의 기원은 위나라와 진나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은 사막화가 진행되어 황무지가 되었지만, 인근 마을 사람들은 예전에 포플러나무 숲이 울창하여 낮에도 어둡고 숲이 빽빽해 양떼를 몰던 아이들은 겁이 나서 감히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원이 번성했던 1천년 전에는 이곳이 푸르른 녹지였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승방유적
승방유적

백양구 사찰 유적에서 한·당나라 백양강 고대 도시까지 직선 거리가 10km도 안 되는 거리에 무려 6개의 대규모 사찰이 있었다. 이곳에서 출토된 도자기, 농기구, 동전, 칼, 화살 등의 ‘문명의 파편’을 통해 이곳이 얼마나 번성하고 시끄러웠는지 짐작할 수 있다.

비록 대부분의 사원들이 파괴되었지만 여전히 전체적인 설계자의 조화로운 솜씨와 감각이 느껴진다. 여기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물은 본당의 대형 현실이다. 본당에는 흙으로 된 좌불상이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지만 불상은 사라진 지 오래다. 홀 옆에 두 개의 받침대가 있는데 거기에 두 명의 천왕상이 서 있었을 것이다. 본당의 동쪽과 서쪽에는 승려의 수행 동굴이 있는데, 대사원을 부처에게 바치기 위해 수행 동굴은 비교적 비좁은 편이다. 집 뒤편에는 지붕으로 올라갈 수 있는 문을 나서면 꼭대기에는 탑이 있고, 가운데에는 부처가 있는데, 이곳이 법당이 아닐까 추측할 수 있다.
백양구 불교 사원 유적은 본당 높이가 15m, 벽 두께는 1m이며 복도로 연결된 전면과 후면의 두 개의 방으로 나뉘어져 있다. 본당은 동서로 깊이 8.3m, 남북으로 폭이 8.7m이며, 대불의 잔존높이는 8.2m로 전신 높이가 15m 이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불상은 1960-1970년대에 전부 소실되었다.  

동굴의 벽화는 1950년대 철도를 건설하던 노동자들이 취사를 하면서 대부분 검게 그을리거나 훼손되었다.
동굴의 벽화는 1950년대 철도를 건설하던 노동자들이 취사를 하면서 대부분 검게 그을리거나 훼손되었다.

좌불의 뒷벽 남쪽에 작은 돔 건물은 지붕이 무너져 있는데, 세 개의 벽에 작은 부처의 벽감이 있고 그 옆에는 원래의 벽화가 있다. 주변에 11채의 건물이 남아 있다.
본당에서 남쪽으로 100m 떨어진 곳에 불탑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상부는 작고 하부는 크다. 백양구사찰터 본당 북쪽에 석굴군이 있는데 그중 한 굴의 회랑에서 면적이 2㎡ 미만인 벽화가 발견되었다. 채색은 붉고 초록빛으로 그려진 소형 천불도인데, 1950년대 후반 란저우-신장 철도건설팀이 휴게소로 이용하면서 음식을 해 먹는 등 이때 검게 그을렸다. 
기록에 따르면 ‘당나라 이저우 관할 하에 나즈현에서 북쪽으로 20리 떨어진 곳에 사찰이 있었다’고 하였는데, 이곳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 사원은 13~14세기까지 운영되다가 이슬람이 점차 자리를 잡으면서 14~15세기에 폐사지가 되었다.  

백양구사지의 제1굴. 내부의 중앙 기둥과 절벽을 파서 조성했으며 벽면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
백양구사지의 제1굴. 내부의 중앙 기둥과 절벽을 파서 조성했으며 벽면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

불교는 기원전 1세기경 서역에 들어왔다. 이후 실크로드를 통한 교류가 늘어나면서 불교는 지금의 신장지역 전역으로 퍼졌으며 중국으로 유입되었다. 위, 진, 남북조 시대에 중국 중부지역에서 발굴된 불교석굴은 이미 거대한 규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역으로 당나라 이후 중원의 대승불교가 번성하면서 구법승들은 점차 고원을 지나고 사막을 건너 서역을 여행하면서 불법을 전파하였다.
이우에서 실크로드는 길이 갈라진다. 현장은 원래 이우에서 북쪽 실크로드를 따라 서쪽으로 가려고 하였으나 고창왕의 초청으로 그 계획은 중단되었다.
고대 백양강은 수백 킬로미터에 걸쳐 굽이쳐 흐르며 하미 오아시스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을 탄생시켰고, 백양구 사찰 유적은 다양한 문화와 신앙이 융합되었던 실크로드 종교문화 교류의 역사적 표본이다. 지금은 사막화되었지만, 한때는 비옥한 식물과 강물이 풍부했던 오아시스 지대였다.

하미의 주요 유적분포도. 하미와 바리쿤은 서역을 향한 중국의 전초기지였기에 수많은 유적이 남아 있다. 필자는 1개월간 이곳에 머물며 이 유적지도를 완성했다.
하미의 주요 유적분포도. 하미와 바리쿤은 서역을 향한 중국의 전초기지였기에 수많은 유적이 남아 있다. 필자는 1개월간 이곳에 머물며 이 유적지도를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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