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한철의 『표해록』 해부 (25) - 두 사람이 바람에 날아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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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철의 『표해록』 해부 (25) - 두 사람이 바람에 날아가다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4.02.07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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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1년 1월 6일 바람

비몽사몽 간에 두 남자를 비비며, 바로 전 일이 그림자처럼 회오리 되어 나타난다. 추위와 불안에 시달려 잠들다 말다 하다 깨어 보니 어제보다 북쪽으로 밀려온 듯하다. 아마 흑산도 쪽이지 않을까 싶다.
오시(낮 11시~1시)에 비가 내렸다. 사나운 구름이 하늘에 가득히 덮였고, 서남풍이 혹 불기도 하고 혹 멎기도 했다. 배는 흑산도 쪽을 향해 떠내려갔다. 돛대가 없는 배다 보니, 뜻대로 나아갈 수 없는데, 이번에는 서풍이 불어서 배가 처음 폭풍을 만나 표류하게 된 노화도의 서북쪽으로 표류하며 돛과 노가 없었으므로 그냥 운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바람이 바뀌어 서풍이 불자, 배가 홀연 동쪽을 향해 갔다. 황혼 무렵에 노화도 서북쪽에 이르렀다. 이는 우리가 바람을 잘못 만나 맨 처음 표류하기 시작했던 곳이다.
해가 저문 뒤에는 서북풍이 크게 일고, 눈과 비가 뒤섞여 내렸다. 큰 파도가 하늘에서 방아질을 하듯이 출렁이었고, 모진 바람이 바다를 키질하듯이 흔들어댔다.
뱃사람들이 모두 소리쳐 울부짖으며 죽기만을 기다렸다.
다시 비와 눈, 회오리바람, 큰 물결이 일자, 뱃사람들은 울먹이면서 죽을 준비를 시작했다. 사공 이창성이 울면서 온몸을 감싸고 포장하여 죽음을 기다리겠다며, 마치 죽은 뒤 염습을 하듯이 만드는 것이다.
‘안돼, 우린 해야 할 일이 많아.’
장선비가 허우적거린다. 이를 본 일행은 장선비를 보는 게 아니라 사공 이창성을 더 애틋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사공이 이처럼 하는 것을 보고서, 곱절이나 더 놀라고 애통하면서 곡하는 소리를 일제히 질러대었다. 다시 살아날 가망이 없음을 눈치라도 채는 듯….
장선비도 혼이 놀라 달아나고, 능히 스스로 안정을 찾지 못했다. 소리 내어 울고자 하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곧이어 피를 몇 줌 토하고서, 어지러워 쓰러진 뒤 깨어나지 못했다. 이미 저승길에 들어서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장선비는 겨우 눈동자를 움직여 보았다. 그래도 천근만근 눈동자가 열리지 않았다. 장선비는 죽음 앞에서 제주 사람 김진용과 김만석과 끊겼던 대화를 떠올렸다.

김진용은 장선비에게 속삭였다. “쓰고 있는 탕건을 나에게 주지 않겠소?” 이 말에 이어 김만석이 입을 열었다. “만약 내게 먹을 것을 주면, 응당 그대를 위해 햇빛 가리개를 붙잡고 뒤따라가겠소이다.”
김만석은 살아있을 때 높은 관리를 위해 햇빛 가리개를 붙잡던 인물로, 김진용은 살아있을 때는 낮은 계급의 장교로서 천총의 일을 보았다.
두 사람이 사라지며 도깨비들의 괴상한 모습이 장선비 눈앞에 나타났다. 그런데 그 순간, 장선비 정신은 몸에 깃들지 못했다. 죽음과 삶의 흐름 사이에 혼자 남겨져 있었다.
비몽사몽의 세계에서 아름다운 여인이 장선비 눈에 어른거린다.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 하얀 옷을 입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꿈속에서 그리던 여인이 술상을 들고 장선비에게로 다가온다. 장선비가 눈을 힘겨워 떴을 때, 꿈에서 본 여인의 풍채는 부서지는 파도로 현실로 다가왔다. 장선비는 깊은 정신의 안정을 찾기 위해 애쓰는 중이었다.
그 순간, 꿈에서 대화했던 두 사람의 말처럼, 글 읽는 선비가 햇빛 가리개를 펼치지 않았고, 탕건을 쓰지 않았다. 그렇다면 김진용과 김만석이 언급한 탕건과 햇빛 가리개는 무엇을 상징하는지 해몽할 때가 왔다.
홀연히 들려오는 파도 소리가 배 갑판에 크게 부딪혀 닿았다. 배에서는 방향을 잡기 위해 ‘키’를 사용한다. 키가 없는 배는 마치 다리 없는 사람처럼 나아갈 길이 없다. 키가 없으면 배가 쉽게 뒤집히므로 사공은 밤낮으로 키를 잡고 다니는 것이 필수였다. 지금 배의 사공은 운명이 죽음일 것이라 여기며 키를 놓고 망연자실하게 울고 있었다. 키가 부딪치며 갑판을 때렸고, 배 갑판은 파손되어 깨지려는 상황이었다.
장선비는 다시 거짓말을 지어내어 뱃사람들에게 전했다. 호산도에서 미리 쳤다던 점이 흉하고 길할 괘인 것이라고….
그러나 사공 이창성은 울먹이며 말했다. 바닷길에 대해 자신은 잘 안다고…. 이 바다는 난서(어지러운 섬)와 험안(험한 절벽)으로 가득하며, 바람이 불지 않아도 배가 부서지고 빠지는 곳이라고 주장했다.
장선비가 뱃사람들에게 키를 구하라 명령하자, 제주 상인 김복삼과 이득춘은 키를 찾아 나서려 했지만, 바람에 키가 날려 바다로 사라지고 말았다. 두 사람도 바람에 날려 사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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