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갑진년 신년기획 - 제주불교 르네상스를 꿈꾸며 - 실크로드·다르마로드를 가다➃ - 투루판 - 찬란한 불교왕국 고창국의 영광은 사라지고 옛 성터에는 사막의 노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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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갑진년 신년기획 - 제주불교 르네상스를 꿈꾸며 - 실크로드·다르마로드를 가다➃ - 투루판 - 찬란한 불교왕국 고창국의 영광은 사라지고 옛 성터에는 사막의 노을만
  • /안종국(편집국장), 석진현(불교화가) 
  • 승인 2024.02.07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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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루판의 고창고성 불교사원 유적
투루판의 고창고성 불교사원 유적

막하연적을 지나 고창국으로
서기 500년 이후 타클라마칸 남로(南路)가 막히자 많은 여행자들이 트루판을 경유하는 북로(北路)를 선택했다. 현장법사도 629년에 이길로 서역으로 향했다. 
돈황에서 투루판까지 가려면 550킬로미터의 사막길이다. 현장은 처음에 양주(현재의 감숙성 무위)로 길을 잡았다. 무위는 당나라 안에서는 마지막으로 거치는 도시였다. 여기서부터는 카라반 행렬을 따라 서쪽으로 가야한다. 당시 양주는 파미르 동쪽의 여러나라에서 모여든 상인과 승려들이 끊임없이 오가는 중요한 국제도시였다. 
이 도시의 최고위 관리는 현장에게 중국을 벗어나는 계획을 취소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현장은 그 지역 불교승려의 도움으로 과주로 갈 수 있었다. 그리고 과주의 지방관리는 현장을 체포하라는 황제의 명령서를 폐기해버리고 가능한 빨리 떠나라고 종용한다. 현장은 그래서 돈황을 거치지 않고 과주를 통해 옛 옥문관을 지나간다. 
과주에서 하미로 갈 때 마주치게 될 장애물에 대해서 현장은 정보를 얻는데, 장이수(長離水)의 급류와 5개의 감시탑 등이다. 그리고 그 마지막에는 막하연사막(고비사막 서부지역)이 있었다. 
현장은 길을 찾기 어려웠기에 하미까지 안내해줄 석반타(石磐陀)라는 안내인을 고용했다. 석씨는 그가 원래 케쉬(kesh)지역(혹은 sharisabz,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교외)출신임을 뜻한다. 그의 이름 ‘반타’는 ‘Vandak’를 음역으로 옮긴 것이다. 반다크는 ‘신에게 충성을 바치는 하인’이라는 뜻이다. 소그드인에게는 흔한 이름이다. 이 반다크는 젊은 승려 현장에게 나이가 든 소그드인을 소개하는데 그는 하미까지 15차례의 여행경험이 있는 자였다. 반다크는 현장의 늙은 말과 소그드인의 말을 교환하여 자정이 지나서 반다크와 함께 길을 떠났다. 
그는 장이수를 따라 북쪽으로 가다가 강을 건널 수 있는 좁은 여울목에 도착해 벽오동 가지와 잎을 엮어 작은 다리를 만들어 강을 건넜다. 그곳에서 그들은 잠이 들었는데, 한밤중에 현장은 반다크가 자신을 향해 칼을 들고 달려드는 것을 보았다. 악몽인지 환상인지, 아니면 사실이 그랬는지 현장은 관음보살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기도를 올리고 이 위기를 벗어났다고 한다. 
다음날 현장은 반다크와 헤어져 홀로 서역으로 나아갔다. 첫 번째 감시탑에서는 도랑에 숨어 밤을 기다렸다가 물 저장고에서 목을 축이는데, 화살이 날아오자 구법승이라고 밝히자 감시병이 문을 열어준다. 그렇게 네 번째 감시탑까지 감시병들이 도움을 주어서 지나갔고, 야마천까지 50킬로미터를 4박 5일간 사경을 헤매며 가게 된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곳이 투르판이다. 
여기까지의 이야기에서는 몇 가지 석연치 않은 대목이 보인다. 먼저 중국관리가 황제가 보낸 체포명령서를 찢어버린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또 현장은 자기에게 칼을 겨눈 자에게 자신의 말을 주고 혼자 길을 떠났다는 부분도 설명이 석연치 않다. 그리고 안내자도 없이 그가 사막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그리고 아무리 불교 승려라지만, 두 개의 감시탑에서 국경을 넘도록 순순히 그를 도와주었다는 것도 다소 미심쩍다. 또 4박 5일간 사막에서 물 없이 버틸 수 있을까? 
이 부분은 아마도 대당서역기에서 설명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거나 아니면 미스터리로 남을 부분이다. 평소 카라반들은 모두 국경에서 통행증을 신청하게 된다. 그런데 현장은 처음부터 불법(不法)으로 나라를 넘고자 했다. 이러한 불경을 의식해 현장의 행적에는 다소의 과장이 있었다고 보여진다. 그리고 현장은 애초부터 서쪽의 서투르크 카간을 만날 염두에 두고 길을 떠난 것 같다. 
현장은 천신만고 끝에 당시 투루판 일대에 세력을 뻗치고 있었던 고창국 하미에 도착한다.  고창국의 왕 국문태(鞠文泰)는 현장을 맞이하기 위해서 사절을 보냈고, 어둠 속에서 도착한 현장을 마중하기 위해 국문태는 횃불을 들고나와 맞이한다. 왕은 현장과 밤새 이야기를 나누었고, 왕과 왕비는 현장이 자고 일어나는 숙소까지 와서 문안을 올릴 정도로 극진히 대접했다. 

이 강당지에서 현장법사가 인왕경을 강의했다고 한다.
이 강당지에서 현장법사가 인왕경을 강의했다고 한다.

국문태는 현장이 고창국에 계속 머물기를 요청했으나, 현장은 단식 등을 하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에 국문태는 현장이 고창국에서 한 달간 머무르며 인왕경을 강의하며 법회를 열고, 대신 여행에 필요한 편의를 위해 여행경비(황금 100근, 은화 3만냥, 비단 500필 등)와 25명의 수행원, 그리고 서투르크 카간과 24명의 제후국에 보내는 서찰을 만들어 주었다. 
카간의 수도는 토크마크에 있었다. 현재는 키르기스스탄에 속하며 이식쿨 호수 북서쪽 끝에 위치한다. 고창국의 왕은 카간에게 수레 2대에 비단 500필을 실어 보냈고, 맛있는 과일도 함께 보냈다. 과일은 아마도 건포도같은 말린 과일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현장이 고창을 떠난 날은 629년 12월로 보인다. 
국씨가문의 통치자들은 502년부터 권력을 잡았고 중국문화를 수용하여 표준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들은 불교를 후원했고, 관료조직을 중국식으로 개편하여 행정용어도 중국식으로 썼고 아이들에게는 한문 고전과 중국역사서를 배우게 했다. 그들은 지역언어로 쿠차어와 소그드어를 썼는데, 한문을 이들 언어로 번역해서 사용했다. 
629년 현장이 고창을 떠난 이후 640년에 당나라가 고창국과 전쟁을 통해 복속하고 오아시스를 정복한 이후 투루판은 더욱 중국화된다. 국문태는 중국에 겁을 먹고 스스로 무너졌으며, 아들은 포로가 되었다. 교하성은 중국인들의 본부가 되었고, 안서도호부가 그곳에 설치되어 서역의 업무를 총괄했다. 그리고 투루판에 토지를 재분배하면서 각 가정의 등록자수를 조사하니 당시 8,000가구에 37,700여명이 거주한 것으로 나타났다. 

고창고성의 찬란한 불교유적
오늘날 투루판지역에 남아있는 불교유적은 대표적으로 교하고성 지역의 불적과 고창고성의 현장설법지, 그리고 베제클리크의 동굴유적지 등이다. 
고창고성은 신장위구르자치구(新疆維吾爾自治區) 투루판시에서 동쪽으로 50㎞ 정도 떨어져 있다. 전한(前漢) 시기에 설치된 무기도위(戊己都尉)의 고창벽(高昌壁, 기원전 48-327)을 시작으로 9세기 중반 성립된 고창위구르국(高昌回紇國)의 도성으로 기능하다가 14세기 명나라 초기에 폐기되었다. 

고창고성 불탑유적. 다변형 탑으로 감실 흔적이 뚜렷하다 .
고창고성 불탑유적. 다변형 탑으로 감실 흔적이 뚜렷하다 .

고창고성은 총면적이 198ha에 이르며, 외성(外城), 내성(內城), 그리고 궁성(宮城) 등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성벽의 보존 상태는 비교적 좋은 편이다. 
외성 서남쪽에는 보존 상태가 비교적 좋은 10,000㎡ 면적의 대형 불교사원지가 있다. 사원지는 대문, 정원, 강당, 경루, 불전, 승방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건축의 특징과 현존하는 벽화 속 연주문을 통해 6세기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찰의 동남부와 동북부에서 수공업 공방(工坊)과 시장 유적이 있었으며, 외성 동남쪽 사원지는 다변형(多邊形) 탑과 불전으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잔존하는데, 두 벽의 벽화 양식과 탑의 조형으로 미루어 고창위구르국의 후기인 12-13세기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보의 북쪽에는 높은 대(臺) 위에 항축으로 만든 높이 15m의 2층만 남은 불탑이 있다. 
고창고성은 명대 초에 폐기된 후 대부분 경지로 변해 건축물은 거의 현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발굴과 조사를 통해 거주구역, 사찰구역, 그리고 수공업자들의 공방 구역 등 세 구역으로 구분되는 것을 확인하였다. 한편 성의 북쪽은 황막한데, 무덤구역으로서 성민이 죽으면 대부분 여기에 매장되었다. 대략 동서 5㎞에 걸쳐 있는 이곳의 아스타나-카라호자(阿斯塔那-哈拉和卓, Astana-Karakhoja) 등지에서 서진(西晉)-당대(唐代)에 조성된 500여 기의 무덤이 발굴되었다. 그리고 문서, 비단을 비롯한 직물, 흙으로 만든 묘지(墓誌), 화폐, 도용(陶俑)과 목용(木俑), 도제 명기, 회화는 물론 농작물과 과일 등의 식품까지 만여 점에 이르는 유물이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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