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보리분법-깨달음으로 이끄는 수행의 로드맵 - 위빳사나 수행에서의 삼매의 개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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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보리분법-깨달음으로 이끄는 수행의 로드맵 - 위빳사나 수행에서의 삼매의 개발 2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4.02.07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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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성장(청정함)을 방해하는 기능을 하는 탐·진·치를 그 활동적 측면에서 말하는 경우에는 5가지의 덮개[蓋]라는 호칭으로 바뀝니다. 이러한 5가지의 덮개들이 들어오지 않고, 대상에만 집중해서 머무는 사마디 상태를 마음의 청정이라고 합니다.
근행정近行定이나 안지정安止定에 도달한 마음은 정신적으로 안정됩니다. 항상 집중력이 갖추어져 있고, 감정의 물결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눈·귀·코·혀·몸·마노[意]의 여섯 감관으로부터 들어오는 정보에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해탈은 아닙니다.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번뇌가 수면상태로 된 것입니다. 해탈에 이르기 위한 작업은 지금부터입니다.
위빳사나 실천의 경우는 ‘감각을 확인한다.’라는 작업을 합니다. 이때 마음이 격렬하게 공격합니다. 그 공격이란 끝없는 사고思考·망상妄想의 흐름입니다. 사고·망상은 개념槪念을 휘젓습니다. 각 개념에는 어떤 감정이 일어납니다. 예를 들면 황금, 식사, 교과서, 라이벌 등은 개념입니다. 이들의 언어들을 하나하나 읽으면 각 개념에 어떤 감정이 생겨날 것입니다. 그 감정은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언어 자체에 감정이 따라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개념에 감정이 따라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마음속에서 개념을 휘젓는 것은 감정을 휘젓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사고·망상할 때마다 번뇌가 증가합니다. 
마음이 항상 행하고 있는 작업, 즉 사고와 망상은 위빳사나 실천의 적입니다. 적이 활발하게 활동하면 위빳사나 실천을 계속할 수 없습니다. 계율을 지키고 있음에도 마음이 상처받게 됩니다. 이때, 근행정이나 안지정이 있으면 이 문제를 해결합니다. 마음이 오염되지 않은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안정을 이루고 망상의 방해 없이 관찰을 지속할 수 있게 됩니다. 
순수 위빳사나 수행에서는 근행정이나 안지정은 언급만 하고 있고 그다지 문제 삼지 않습니다. 사고가 폭주하지 않는 안정된 정신상태에 도달하면 충분하다고 하면서 그 대신 찰나정(剎那定, khaṇika-samādhi)이 강해야 알아차림이 잘 된다고 설명합니다. 
사마타 수행을 한 수행자의 경우와 비교해 보겠습니다. 어떤 수행자는 수행할 시간이 충분하였으므로 평생에 걸쳐 수행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본적인 사마타수행부터 수행을 시작하였습니다. 색계 제1선정에서 제5선정까지 도달하고자 노력하였고, 각 개인의 정신력에 부응한 결과를 얻었습니다. 다섯 번째의 선정에 도달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제1선정에서 멈춘 사람도 있었습니다. 강력한 정신력의 소지자라면 무색계의 4가지 선정에 도전하는 것도 가능하였습니다. 어느 선정에 들어가든 불교에서는 ‘오개(五蓋)가 수면상태로 되었다’라고 설명합니다. 사마디가 높아지면 집중력이 향상합니다. 각 사마디로 체감하는 경험도 다릅니다. 무색계의 사마디에 도달하면 마음이 물질에 의존하지 않고 기능합니다. 
그 반면에 위빳사나 수행자는 어느 사마디에 도달해 있는지 묻지 않습니다. 실천적으로 말하면 무색계의 4가지 사마디에 도달하여 그대로 있으면 위빳사나 실천은 할 수 없습니다. 위빳사나 실천은 물질[色]의 작용, 마음의 작용을 관찰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마디에 든 상태로 위빳사나 실천은 할 수 없으므로 근행정이든 안지정이든 사마디 상태에서 나와 눈·귀·코·혀·몸·마노[意]의 여섯 감관으로부터 들어오는 정보를 인식하는 보통의 상태로 되돌아와서 위빳사나 실천을 시작합니다. 
위빳사나 수행에서도 사마디의 도움으로 마음이 폭주하지 않는 상태를 획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고·망상이 폭주하지 않는 상태란 어느 정도 마음이 깨끗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위빳사나 수행의 실천을 위해서는 근행정의 힘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혹은 사마타수행을 전혀 하지 않고 위빳사나 수행을 시작하여도 전혀 문제되지 않습니다. 위빳사나 수행으로 확인하는 실천을 계속하면 사고·망상이 폭주하지 않는 지점까지 정신적으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사마타 수행은 결과를 도출하기까지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므로 사마타 수행을 빼고 위빳사나부터 수행을 시작하여도 상관없습니다. 사마디의 경험이 없어도 해탈에 도달합니다. 해탈에 도달한다는 의미는 번뇌를 잠재우는 것이 아니라 부수는 것입니다. 위빳사나 실천이 진전되어서 깨달음에 가까워졌다고 하자, 그 때의 정신 상태는 제1선정의 근행정 수준입니다. 깨달음에 도달한 순간 마음은 제1선정의 힘을 갖게 됩니다. 그런 까닭으로 전통에 따라 사마타 수행을 끝내고 나서 위빳사나 수행에 입문하는 순서를 취하지 않아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위빳사나만의 방법은 결과가 빠릅니다. 
위빳사나를 실천하는 분들은 누구나 망상에 짓눌립니다. 그에 굴하지 않고 수행을 지속하면 망상의 힘이 약해집니다. 망상이 여섯 감각의 확인 작업에 방해를 하지 않는 상태에 도달하면 됩니다. 
위빳사나 실천을 시작한 분들에게는 관찰만 할 것을 주문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세상에 있는 다양한 수행에 대하여 알고 있고, 그것에 의해서 마음이 세뇌가 되어 있기 때문에 오로지 명칭으로 대상을 알아가는 이 방법에 대하여 ‘이런 것은 고도의 수행이 아닙니다.’라는 기분이 들기 쉽습니다. 
어떤 정해져 있는 말을 염송하면서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는 것이 수념(隨念 anussati 아눗사띠)입니다. 그것은 사마타 수행의 방법입니다. 이와 달리 정해져 있는 대상 없이 그때그때 나타나는 현상을 알아차리면서 적절한 명칭을 붙여서 집중하는 것이 수관(隨觀 anupassanā 아누빳사나-)입니다. 그것은 위빳사나 수행의 방법입니다. 예를 들면 호흡수행에서 사마타 수행의 경우에는 “들숨 날숨.”이라는 말을 일관되게 염송합니다. 위빳사나 수행의 경우에는 “들숨 날숨”, “팽창 수축”, “일어남 사라짐”이라고 하든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습니다. 또한 수행 중에 어딘가에 통증이 생기면 그것을 ‘통증’이라고 확인합니다. 반드시 호흡에 집중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사마타 수행을 먼저 실천해서 집중력을 키우고 나서, 지혜를 개발하는 위빳사나로 전환하고 싶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불교의 전통적인 수행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마타 수행에는 상당한 시간을 지불해야 합니다. 출가한 사람들은 매일 수행 이외에는 할 것이 없으므로 삼매를 얻기 위해 다양한 수행방법을 시도해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령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들이나, 나이는 젊어도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고 위기를 느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느긋하게 수행할 여유가 없습니다. 생명은 덧없다고 이성을 바탕으로 해서 느끼는 사람들은 사마타 수행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먼저 사마타 수행을 하여 집중력을 높인다면 관찰하는 위빳사나의 실천은 쉬워질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러나 사마타 수행의 경험이 반드시 지혜로 연결된다는 보증은 없습니다. 위빳사나 실천을 시작하는 분들에게 신체의 움직임, 신체의 감각을 명칭으로 확인할 것을 권고합니다. 이 훈련이 익숙해지게 되면 알아차림이 끊어짐 없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지혜가 열리고 마음은 장애로부터 청정하게 됩니다.
위빳사나를 실천하는 수행자에게 오력의 힘이 좋고, 균형을 잘 이루게 되면 관찰하고 알아차리는 것만 계속 이어져 마음이 깨끗하게 되고 사띠(알아차림)가 지속되면 고요히 집중하는 사마디가 분명하게 생겨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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