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보리분법-깨달음으로 이끄는 수행의 로드맵 - 칠각지(七正覺支)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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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보리분법-깨달음으로 이끄는 수행의 로드맵 - 칠각지(七正覺支) 1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4.02.15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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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정각지(七正覺支), 즉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는 37보리분법의 일곱 가지 주제 가운데 여섯 번째에 해당합니다. 빨리(Pāli) 어語로 satta sambojjhaṅga(삿따 삼 봇장가)라고 합니다. 
‘깨달음의 구성요소’로 옮긴 bojjhaṅga는 bodhi[覺]와 aṅga[支]의 합성어입니다. 형용사 sam은 sammā(正)과 같은 뜻입니다. 불교용어에서 '바를 정(正)’의 의미는 ‘아무것도 빠져있지 않은 것’, ‘완전한 것’을 뜻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고 있는 탈 세속적인 수준 내지 초월적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평범한 수행법으로는 좀처럼 마음의 청정함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칠각지의 수행을 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은 항상 욕심에 쌓여 쾌락을 쫓기 때문입니다. 감각적 쾌락은 외부의 자극을 통해 일어납니다. 인간이 살아 있다는 것은 눈, 코, 귀, 입, 몸의 다섯 감관으로부터 다양한 자극을 받는 것뿐인데 그 자극으로부터 마음은 의식이라는 파동을 만듭니다. 마음이 한 순간도 정지하지 않고 부단히 파동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본 무언가에 의해 마음은 자극을 받습니다. 그 자극을 받은 것에 대하여 다시 우리들은 여러 가지를 생각합니다. 눈과 귀는 활동하고 있지 않은 시간이 별로 없으므로 눈을 뜨고 있으면 뜨고 있는 동안은 보이는 것이고 보는 동안은 자극이 멈추어 지지 않습니다.  
다른 한편, 아무것도 보지 않고 듣지도 않고 혹은 먹지 않아도 되는 상태가 간혹 있을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할 일이 없을 때입니다. 이 때 마음은 자극이 멈추어서 고요할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마음은 결코 고요하지 않습니다. 마음을 제외한 다섯 감각의 기능이 가령 멈추었다고 해도 마음에는 망상이란 망상은 다 생깁니다. 
망상이 생겨서 머릿속은 그 망상의 자극으로 파동이 꽉 차게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강한 자극을 추구하는 사람은 무서운 망상을 하며, 마음이 고요한 사람은 그 나름대로 조용한 망상을 하거나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요? 이와 같이 우리들 마음은 언제 어떤 경우든 누구도 그 기능을 정지시킬 수 없습니다. 언제나 마음속에 자극의 파동이 작용합니다.

예를 들어 위빳사나 수행을 실천한다고 하더라도 자극을 받고 있는 마음의 흐름으로부터 탈출하기란 매우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물고기가 물속에 살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일로 매우 당연한 일이지만, 그 물고기가 물속으로부터 탈출하여 땅에서 생활하려 든다면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통 사람들은 여섯 감관의 자극을 받아 살아 있음을 느끼고 있으므로 그 감각기능을 유지하면서 해탈을 체험한다는 것은 물고기의 진화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위빳사나 수행으로 인간을 진화시키는 것입니다. 매우 빠르게 말입니다.  위빳사나의 지혜가 생겨나게 되면 마치 과학자가 먹는 물을 음료수로 보지 않고, 수소와 산소의 결합물인 H2O로 분석하듯이 육안肉眼이 아닌 존재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지혜의 눈을 갖추게 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엄격한 수련 과정이 있겠지만 그 시련을 뛰어 넘으면 세상의 일반적 상식이라든지 결정이라든지 그런 것들의 무의미함을 잘 알게 되어, 거기에서부터 점차 탈세속적인 경지의 마음으로 옮겨 가게 됩니다.

위빳사나 수행을 실천할 때, 스스로 꼭 진화해보자는 의욕도 없이 구태의연하게, 새로운 견해나 사고도 전혀 없이 그저 일반적으로 수행을 하게 되면 그것은 진화가 없는, 자신이 갖고 있는 대로의 개념 속에서 수행하고 있는 것이 되기 때문에 결국은 같은 곳을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결과가 됩니다.
그러므로 진화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들어 본 적도 없고 본 적도 없는 방법으로 사물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을 위해서 불교의 가르침이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불교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해서 위빳사나 수행이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불교의 가르침 없이 수행을 하면 같은 윤회 속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그저 단순히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결과도 없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수행을 하면 하는 만큼 그 사람의 마음은 성장하여 훌륭한 성격으로 변화해 가며 인생의 일반적 괴로움 등은 수행을 모르는 사람에 비교하여 훨씬 쉽게 소멸되어 갑니다. 위빳사나 수행법에는 그런 유익한 점이 물론 있습니다. 
그러나 해탈을 진짜 목적으로 하여 마음의 진짜 성장을 원하며 수행을 실천한다면  우리들 윤회 속에 있는 생명으로서 생명의 진화의 방법이나 윤회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진화과정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진화 과정을 증명하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칠각지가 있습니다. 

해탈에 이르기 위한 실제 수행의 과정은 7가지의 支(부품)로 구성됩니다. 사람의 몸뚱이가 머리, 양손, 양발, 몸체, 눈, 귀, 코 등의 肢(지 : 부품)로 반드시 구성되어 있듯이, 해탈은 이 일곱 가지의 支(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깨달음에 이르는 로드맵에는 ①염각지, ②택법각지, ③정진각지, ④희각지, ⑤경안각지, ⑥정각지, ⑦사각지의 일곱 부분이 있습니다. 『상윳따 니까야』(S46:5)에서는  이 칠각지를 아직 깨닫지 못한 자들이 깨닫기 위해서 초보→성숙→완성의 각 단계를 거쳐 닦아야 하는 ‘세간적인 도’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일곱 개가 갖추어지면 위빳사나는 ‘스텝 바이 스텝’ 식으로 각 단계 단계가 순조롭게 진행되어 갑니다. 칠각지는 이해해도 좋고 이해하지 못해도 특별히 이롭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가르치는 입장에서 보면 이 칠각지에 대한 설명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위빳사나를 수행하는 사람이 어느 정도로 진전되어 있는지 혹은 그다지 진전되어 있지 않은 경우는 어디에서 균형을 잃어 버렸는지 등을 점검하려고 할 경우에 이 칠각지는 매우 도움이 됩니다. 

불교의 실천은 계정혜의 삼학입니다. 혜학의 완성으로 모든 현상에 대한 집착을 근절하고 해탈에 이릅니다. 이것이 불교의 전통적인 길[道]입니다. 계율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수행 실천이 가능하지만 수행실천을 시작하는 순간과 동시에 계율도 지켜야 합니다. 계율을 범하면서 수행실천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위빳사나 수행이란 해탈에 이르는 도道의 최종단계입니다. 위빳사나의 실천을 통해서 도道와 과果에 이르는 것이 가능합니다. 위빳사나는 ‘念(sati, 알아차림)’의 실천으로 출발합니다. 사띠(念)는 하나이지만 사띠의 대상은 크게 신身·수受·심心·법法의 네 가지입니다. 염각지가 진전됨에 따라 나머지의 각지도 단계적으로 달성해 갑니다.
마음속에 칠각지가 갖추어지지 않으면 깨달음이라는 사건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칠각지는 우리 범부중생들을 깨달음으로 운반하는 로켓 같은 것입니다. 로켓은 천천히 발사되어 점점 스피드를 내다가 제1단계 로켓이 소진되어 떨어지고 제2단계, 제3단계의 로켓까지 소진되어 충분히 스피드를 낸 후 지구를 탈출하여 우주선만이 우주로 날아갑니다. 
이와 같이 깨달음 그 자체는 칠각지의 부품을 모두 버린 시점에서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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