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갑진년 신년기획 - 제주불교 르네상스를 꿈꾸며 -실크로드·다르마로드를 가다➄ “교하의 물은 여전히 푸르건만, 고성과 불탑에는 독경 소리 사라진 지 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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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갑진년 신년기획 - 제주불교 르네상스를 꿈꾸며 -실크로드·다르마로드를 가다➄ “교하의 물은 여전히 푸르건만, 고성과 불탑에는 독경 소리 사라진 지 오래”
  •  / 안종국(편집국장)
  • 승인 2024.02.21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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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바라본 버들잎 모양의 교하고성
하늘에서 바라본 버들잎 모양의 교하고성

교하고성(交河故城. 야르호토)은 현재 투루판시에 속해 있으며,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10세기 전반까지 존재했던 차사전국(車師前國)의 도성이다. 투루판시에서는 서쪽 10㎞ 지점이다. 이곳은 상고 시대 홍수로 형성된 하천 골짜기로 수천년이 경과하면서 골짜기 중앙에 버들잎 형태의 섬이 만들어졌는데, 그 길이가 1,650m, 너비 약 300m, 면적 500,000㎡ 정도 된다. 그 안에 사방이 절벽으로 둘러싸인 단애가 존재하며, 단애는 너비가 100m, 높이가 30m 가량 되는 대추씨 모양을 띠고 있다. 

투루판 지역의 불교 유적 개념도
투루판 지역의 불교 유적 개념도

교하는 본래 전국시대 ‘고사인(姑師人)’의 중요 거점이었으나, 한무제 시기인 기원전 108년에 분열되면서 차사전후왕(車師前后王)과 산북 6국으로 분화되었다. 그후에는 기원전 108년부터 서기 450년까지 중국 고대 차사전국의 도성으로 군림했다. 이 차사전국은 토하라인들이 세운 고대 국가다. 
<한서><서역전>에는 “차사전국 왕이 교하성을 다스렸다. 강물이 성 아래를 감싸 흐르는데, 예부터 교하라 불렀다.”고 하여 이 하중도(河中島)가 2000년 전 차사전국의 도성 소재지임을 설명한다. 
그후 기원전 62년에 흉노가 ‘두막(兜莫)’을 왕으로 삼고, 일부 세력을 거느리고 보그다산 북쪽으로 옮겨와 나라를 세웠다. 한무제 때 군대를 보내 서역을 정벌하면서, 차사도 한나라의 압력을 받게 되자 흉노와 연합하여 한나라 사신을 공격하였다. 이에 한나라는 누란국과 연합하여 교하를 공격하자, 차사국은 결국 항복했다. 이때 공격을 주도한 인물은 한나라 선제 때 시랑인 정길(鄭吉, ?~기원전 48년)이라는 인물이다. 
정길은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한서><서역전>‘정길전(鄭吉傳)’에는 그가 회계군 사람으로 병졸이 되어 여러 차례 서역에 출정하여, 공을 세웠다고 한다. 힘이 좋고 의지가 굳건하여 외국의 일을 잘 알았기에 기원전 68년 시낭에 임명되었고, 차사국과의 국경인 거려(渠黎, 쿠리)에 파견되었다. 그는 거기서 죄인에게 형을 면제해 주면서 둔전으로 경작시키고 자금을 모아 차사국을 공격하려고 했다. 수확이 끝나자 그 자금으로 정길은 누란 등 주변국의 군사를 징병해, 자신이 인솔하는 둔전병 1500명과 함께 차사국을 공격했다. 차사는 흉노에게 원군을 요청했지만, 흉노의 원군도 정길이 요격에 나오면 선뜻 전진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차사왕은 오손으로 도주했다. 한나라에서는 정길을 위사마(衞司馬)로 삼고, 또 호선선이서교위(護鄯善以西校尉)에 임명하여 선선(누란) 서쪽 변방을 지키게 하였다.

기원전 60년, 흉노가 혼란에 빠지면서, 흉노의 일축왕(선우의 사촌형) ‘선현전’이 한나라에 항복하고 싶다고 정길에게 타진했다. 정길은 거려, 구자의 군사를 징병해 일축왕과 그가 인솔해 온 12,000명을 맞아 도중에 배반한 사람은 참형에 처하면서 장안까지 연행했다. 이렇게 일축왕의 항복으로 정길은 ‘서역도호’가 되었다. 기원전 59년, 정길은 서역도호부를 룬타이 오루성(烏壘城)에 만든 진을 근거지로 서역 제국의 진무에 종사하다가 기원전 48년에 사망했다.
서기 448년 차사전부왕 ‘차이락(車伊洛)’은 군대를 이끌고 북위를 따라 서역 정벌을 떠났고, 그 아들 ‘차헐(車歇)’로 하여금 교하를 지키게 하였다. 이때를 틈타 고창성의 북량(北涼) 잔여 세력이 교하를 습격하여 차사전국은 멸망한다. 
이후 당나라 초기까지 이곳은 고창국 교하군이 되었다가 당 태종때 고창국을 멸하고, 교하현을 설치했다. 현장이 고창국을 지나갔다가 천축에서 돌아올 시기에는 이미 고창국은 멸망한 뒤였다. 안서도호부도 가장 일찍 이곳에 설치되어 640~658년 당 왕조가 광대한 서역 지구를 통일한 대본영으로 삼았으나, 이후 관할 범위가 확대되자 안서도호부는 구자(쿠처)로 옮겨갔다. 8세기 중엽 토번(티벳)에 함락되었다가, 그후 고창 위구르국의 속지가 되어 의하주(義河州)가 설치되었으나, 도시 공간이 협소하여 점차 쇠락한다. 
13세기 칭기즈칸에 의한 몽골의 침입 이후 버려졌다가 13세기 말, 톈산(天山) 북쪽의 서북 몽골 유목 귀족인 해도(海都), 도왜(都哇)가 반란을 일으켜서, 원나라 통제하에 있던 지역을 여러 차례 침범하여 교하성도 전쟁 중에 크게 훼손되었다.  
차사는 동남쪽으로 둔황(敦煌)과 통하였고, 남쪽으로는 누란(楼兰), 선선(鄯善)과 통하며, 서쪽으로는 카라샤르(옌치), 서북쪽으로는 오손(烏孫), 동북쪽으로는 흉노와 통하였고, 실크로드 상의 중요한 상업적 위치를 차지하였다. 차사국 사람들은 인도유럽어족의 토하라어를 사용했다. 고대 차사 민족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무덤에서 나오는 두개골로 보아 코카서스와 몽골계의 특징을 지닌다.

교하고성 대불사 구역
교하고성 대불사 구역
대불사 대탑의 불감
대불사 대탑의 불감

현재 남아 있는 교하고성은 가장 번성하였던 시기의 규모로 대체로 당나라 시대의 유적이라 할 수 있다. 대로를 포함한 대부분의 건축물은 전부 흙을 파내고 만들었다는 점이다. 건축은 대부분 생토를 벽으로 삼고, 지붕을 진흙으로 덮었는데, 지역적 특색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성내 구조는 크게 3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남북을 관통하는 대로가 거주 구역을 동서로 양분하고, 대로 북단이 대규모의 사원인데, 이를 중심으로 북부의 사원 구역을 구성한다. 대불사(大佛寺)로 알려진 사원은 서기 5세기경에 창건되어 13세기까지 사용되었다. 남북 길이 88m, 59m, 면적 약 5,000㎡이다. 대문, 대웅전, 승방, 정원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건축 특징과 잔존 소조불의 분석 결과 남북조 시기의 건축으로 추정되었고, 후대에 중수되었다. 

탑림 구역의 불탑 유적
탑림 구역의 불탑 유적

성 북단 동쪽에는 아직 탑군이 남아 있는데, 역대 고승을 안장한 탑림이다. 중앙은 대불탑이고, 상부에 원래 불상이 있었으나 현재 남아 있지 않다. 네 모퉁이에 가로 세로 각 5열씩 배열된 25개의 소탑이 101개가 남아 있다. 이곳은 성 내에서 가장 높은 건축군으로, 열을 맞춰 배열되어 장관을 이룬다.
동쪽 구역 남부에는 규모가 큰 건물이 있는데, 면적이 3,000㎡에 달한다. 지상과 지하 2층 건물로, 위층과 아래층을 연결하는 넓은 층계가 있다. 거택의 거대한 담장 바깥에는 성내 유일한 광장이 있다. 이 거택은 당나라 시기 안서도호부가 있던 관청으로 추정되고, 이후 톈산현의 관아로 사용되었다. 서쪽 구역에는 몇 기의 도기 가마를 비롯한 다수의 수공업 공방이 분포한다. 
갈 길이 바빴던 현장이 교하고성의 불교사원에서 머물렀는지는 기록에 없다. 다만 교하의 물이 불어 건너지 못할 것을 염려하는 대목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교하고성을 지나 간 것은 분명하다. 아니면, 고창성에 한 달간 머물면서 교하고성과 베제클릭천불동이나 생김석굴, 토요쿠석굴사원과 그의 서역기를 근거로 지은 ‘서유기’에 등장하는 화염산도 들러보았을 가능성도 있다. 지금 아스팔트 도로가 나 있는 길에서 보면 교하고성의 절벽 단층지대에 토굴들이 즐비하게 조성된 것이 보인다. 현장도 그 토굴에 들러서 벽화를 살펴 보았거나, 잠시 쉬어갔을 것이다. 

교하고성 전경. 모든 건축은 생토를 파서 조성했다.
교하고성 전경. 모든 건축은 생토를 파서 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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