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원사 대웅전 서쪽의 오른쪽에서 세 번째 벽은 석씨원류 벽화가 그려진 14개의 벽 중 12번째 벽이다. 이 벽에는 사 열 오 단에 총 20장면의 불전도가 그려졌다. 맨 아랫단에는 마지막 하안거를 한 바이샬리를 떠나 춘다의 공양을 받고 극심한 복통과 설사에 시달리다가 몸을 추스르고 말라족의 땅인 쿠시나가라로 간 직후의 이야기가 그려졌다. 쿠시나가라의 아리라발제 강가의 두 그루의 사라수 아래에 자리를 잡은 부처님은 아난에게 오늘밤에 열반에 들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사라수 두 그루 사이에 승상을 마련하라고 하고 머리를 북쪽으로 향하고 오른쪽 허리를 바닥으로 옆으로 누웠다. 사라림에서 부처님께서 열반에 들려고 한다는 소식을 들은 중생들이 하나, 둘 사라림으로 찾아와 부처님께 세상에 더 머물기를 청하는 <청불주세(請佛住世, 167번째 장면)이 맨 오른쪽에 그려졌고, 천인과 용왕이 슬피 우는 <천룡비읍(天龍悲泣)>, 마왕 파순이 중생들이 공포와 재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주문을 인가해 주시기를 청하자 부처님께서 들어주는 <마왕설주(魔王說呪)>, 순타(純陀)가 마지막 공양을 올리는 <순타후공(純陀後供)> 장면이 차례로 그려졌다. 이들 네 장면 중 <마왕설주>를 뺀 나머지 세 장면은 부처님의 열반 직전의 상황을 적은 『대반열반경』과 『대반니원경』에 실려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열반은 부처님의 마지막 모습으로, 그의 삶과 설법을 총망라하는 클라이막스 순간이라 할 수 있다. 이를 다룬 열반경은 한문본 다섯 종에 팔리어, 산스크리트어, 티벳본까지 총 여덟 종이 있을 정도로 불교계에서 열반은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특히 『장아함경』의 『유행경(遊行經)』, 팔리어 불전인 『디가 니까야(Dīghanikāya)』, 『불반니원경(佛般泥洹經)』 등 상좌부(소승) 열반경과 『불설대반니원경』(법현 번역, 418-419년), 『대반열반경』(담무참 번역, 416~423년) 등 대승 열반경이 전하는데 중국과 우리나라 등 동아시아 불교 사상에 영향을 준 것은 대승 열반경이다. 이 경은 대승 불교의 중요한 사상을 담고 있어서 우리나라 불교에서도 중심 사상으로 채택되었다. 여래의 몸은 법신(法身)이라는 불신관,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어서 도저히 구제할 길 없는 일천제(一闡提)까지도 성불할 수 있다는 사상, 열반의 긍정적인 가치 등이 이 경을 통해 강조되었다. 특히 일천제도 불성을 믿는다면 그 믿음에 의해서 성불할 수 있다는 주장은 불교의 종교적 의의를 현실적으로 정착시키는 기초가 되었다. 아무리 악한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믿음을 갖고 뉘우치면 그의 갱생을 돕는 것이 종교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또한 열반경은 정법(正法)을 지키고, 정법이 멸한 뒤 일어날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해서도 밝히고 있으며 올바른 계율도 강조했다.
우리나라에서 열반경은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 원효(元曉), 경흥(憬興), 의적(義寂) 등에 의해 연구되었고, 열반종이라는 종파로 자리 잡을 정도로 그 영향력이 컸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고구려 승려 보덕(普德)이 연개소문이 도교를 받들고 불법을 신봉하지 않자 고구려를 떠나 백제 땅인 전주로 갔고, 삼국통일 이후에는 신라 불교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부식과 최치원의 「보덕화상전」이나 대각국사 의천의 글에서는 원효와 의상이 보덕으로부터 열반경과 유마경 등의 경전을 배웠다고 전한다. 이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열반경에 대한 연구는 전혀 남아있지 않지만 그 사상은 계속 불교 교학의 바탕이 되었다.
부처님께 세상에 머물기를 청하다(請佛住世)
부처님께서 구시나국(拘尸那國)의 아리라발제(阿利羅跋提) 강가에 있는 사라쌍수(娑羅雙樹) 사이에서 2월 15일 열반에 드실 때였다. 부처님께서는 신통한 힘으로 큰 소리를 내시어 두루 중생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들을 가엾게 여기고, 보호하고, 아들 라후라와 똑같이 평등하게 보아온 내가 오늘 열반에 들 것이다. 만일 너희들 중 의문이 있다면 지금 모두 물어라. 이번이 마지막 물음이 될 것이다.”
그때 부처님의 얼굴에서는 여러 가지 빛이 방출되어 그 광명이 삼천대천세계에 두루 비추니, 그 광명을 만난 이는 죄업과 번뇌가 모두 사라졌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다는 말씀을 들은 중생들은 크게 걱정하며 통곡하며 빨리 구시나성으로 가서 부처님께 열반에 드시지 말고 이 세상에 좀 더 머물러 주시기를 청하자고 소리쳤다. 그리고 서로 손을 잡고 자신들을 보호해주던 부처님께서 가버리면 이 세상이 텅 비고 중생들의 복이 다하여 계속해서 나쁜 업들이 세상에 나타날 것이니 중생들은 더욱 빈궁하고 외롭게 될 것이라고 탄식하였다. 여기저기서 부처님께서 계신 사라림으로 찾아가 누워계신 부처님께 예를 올린 후 눈물을 훔치며 열반에 드시지 마시라고 간절하게 청했다.
부처님께서는 여러 사람들의 청을 들었지만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이에 그들은 자신들의 청을 이루지 못하자 주저앉아 소리 내어 통곡하였다.
『석씨원류』의 <청불주세> 내용은 『대반열반경』(담무참 번역) 권1의 부처님의 열반 소식을 들은 많은 중생들이 부처님에 계신 사라림으로 와서 부처님께 거듭해서 열반에 드는 것을 만류하자 부처님께서 각자에게 설법하는 이야기를 시작 부분을 좀 더 길게 할애하고 마지막 결론은 간략하게 정리하였다.
각원사 벽화(사진 1)에는 바위 위에 앉은 부처님을 중심으로 제자들이 둘러싸고 있고 왼쪽 하단에 부처님께 열반을 만류하는 인물들(사진에는 한 명만 보이나 모두 세 명임)을 묘사하였다. 온 세상을 비추는 광명이 나오고 것을 부처님의 얼굴 왼쪽에 표현하였다. 『석씨원류』 판화의 <청불주세>는 우리나라에 전하는 두 개의 판본에서 다르게 묘사되었다.
『석씨원류응화사적』으로 알려진 남양주의 불암사본(1673년) 판화(사진 2)에서는 각원사 벽화와 달리 폭포를 배경으로 부처님을 소를 탄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각원사와 동일한 구성의 판화는 고창의 선운사본(1711년) 판화(사진 3)이다. 바위 위에 앉은 부처님과 부처님 주변의 인물 수와 배치가 각원사 벽화와 같다. 이 사실은 그간 중국에서 각원사 벽화의 모본을 정확히 규정하지 못하고 막연히 성화본 『석씨원류응화사적』(1486년)일 것으로 추정해 온 것이 잘못되었음을 밝힐 수 있는 단서가 된다. 선운사본은 중국의 대흥륭사본(1486-1535년 사이)을 모본으로 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중국에 대흥륭사본 판화가 온전히 전하지 않는 상황에서 선운사에서 대흥륭사본을 바탕으로 판각해서 찍어낸 판화집이 여러 점 남아있어서 그간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밝힐 수 있게 된 것이다.
18세기에 그려진 통도사 영산전 내부 포벽화에도 <청불주세>(사진 4)가 그려졌는데, 모본이 불암사본 『석씨원류응화사적』이어서 소를 탄 부처님을 표현한 모습으로 그려졌다.
성화본과 대흥륭사본이 제작된 시기가 비슷해서 바위 위에 앉은 부처님과 소를 탄 부처님을 그린 두 판화 중 어느 것이 먼저인지, 어느 것이 원본에 가까운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각원사와 통도사에 그려진 서로 다른 <청불주세>의 모습에서 모본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