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중국불교유적 순례 (67) - 사천성 검각劍閣 각원사覺苑寺 석씨원류 벽화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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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중국불교유적 순례 (67) - 사천성 검각劍閣 각원사覺苑寺 석씨원류 벽화 (35)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4.02.21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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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원사 대웅전 서쪽의 오른쪽에서 세 번째 벽은 석씨원류 벽화가 그려진 14개의 벽 중 12번째 벽이다. 이 벽에는 사 열 오 단에 총 20장면의 불전도가 그려졌다. 맨 아랫단에는 마지막 하안거를 한 바이샬리를 떠나 춘다의 공양을 받고 극심한 복통과 설사에 시달리다가 몸을 추스르고 말라족의 땅인 쿠시나가라로 간 직후의 이야기가 그려졌다. 쿠시나가라의 아리라발제 강가의 두 그루의 사라수 아래에 자리를 잡은 부처님은 아난에게 오늘밤에 열반에 들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사라수 두 그루 사이에 승상을 마련하라고 하고 머리를 북쪽으로 향하고 오른쪽 허리를 바닥으로 옆으로 누웠다. 사라림에서 부처님께서 열반에 들려고 한다는 소식을 들은 중생들이 하나, 둘 사라림으로 찾아와 부처님께 세상에 더 머물기를 청하는 <청불주세(請佛住世, 167번째 장면)이 맨 오른쪽에 그려졌고, 천인과 용왕이 슬피 우는 <천룡비읍(天龍悲泣)>, 마왕 파순이 중생들이 공포와 재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주문을 인가해 주시기를 청하자 부처님께서 들어주는 <마왕설주(魔王說呪)>, 순타(純陀)가 마지막 공양을 올리는 <순타후공(純陀後供)> 장면이 차례로 그려졌다. 이들 네 장면 중 <마왕설주>를 뺀 나머지 세 장면은 부처님의 열반 직전의 상황을 적은 『대반열반경』과 『대반니원경』에 실려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열반은 부처님의 마지막 모습으로, 그의 삶과 설법을 총망라하는 클라이막스 순간이라 할 수 있다. 이를 다룬 열반경은 한문본 다섯 종에 팔리어, 산스크리트어, 티벳본까지 총 여덟 종이 있을 정도로 불교계에서 열반은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특히 『장아함경』의 『유행경(遊行經)』, 팔리어 불전인 『디가 니까야(Dīghanikāya)』, 『불반니원경(佛般泥洹經)』 등 상좌부(소승) 열반경과 『불설대반니원경』(법현 번역, 418-419년), 『대반열반경』(담무참 번역, 416~423년) 등 대승 열반경이 전하는데 중국과 우리나라 등 동아시아 불교 사상에 영향을 준 것은 대승 열반경이다. 이 경은 대승 불교의 중요한 사상을 담고 있어서 우리나라 불교에서도 중심 사상으로 채택되었다. 여래의 몸은 법신(法身)이라는 불신관,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어서 도저히 구제할 길 없는 일천제(一闡提)까지도 성불할 수 있다는 사상, 열반의 긍정적인 가치 등이 이 경을 통해 강조되었다. 특히 일천제도 불성을 믿는다면 그 믿음에 의해서 성불할 수 있다는 주장은 불교의 종교적 의의를 현실적으로 정착시키는 기초가 되었다. 아무리 악한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믿음을 갖고 뉘우치면 그의 갱생을 돕는 것이 종교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또한 열반경은 정법(正法)을 지키고, 정법이 멸한 뒤 일어날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해서도 밝히고 있으며 올바른 계율도 강조했다. 
우리나라에서 열반경은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 원효(元曉), 경흥(憬興), 의적(義寂) 등에 의해 연구되었고, 열반종이라는 종파로 자리 잡을 정도로 그 영향력이 컸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고구려 승려 보덕(普德)이 연개소문이 도교를 받들고 불법을 신봉하지 않자 고구려를 떠나 백제 땅인 전주로 갔고, 삼국통일 이후에는 신라 불교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부식과 최치원의 「보덕화상전」이나 대각국사 의천의 글에서는 원효와 의상이 보덕으로부터 열반경과 유마경 등의 경전을 배웠다고 전한다. 이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열반경에 대한 연구는 전혀 남아있지 않지만 그 사상은 계속 불교 교학의 바탕이 되었다.


부처님께 세상에 머물기를 청하다(請佛住世)

부처님께서 구시나국(拘尸那國)의 아리라발제(阿利羅跋提) 강가에 있는 사라쌍수(娑羅雙樹) 사이에서 2월 15일 열반에 드실 때였다. 부처님께서는 신통한 힘으로 큰 소리를 내시어 두루 중생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들을 가엾게 여기고, 보호하고, 아들 라후라와 똑같이 평등하게 보아온 내가 오늘 열반에 들 것이다. 만일 너희들 중 의문이 있다면 지금 모두 물어라. 이번이 마지막 물음이 될 것이다.”
그때 부처님의 얼굴에서는 여러 가지 빛이 방출되어 그 광명이 삼천대천세계에 두루 비추니, 그 광명을 만난 이는 죄업과 번뇌가 모두 사라졌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다는 말씀을 들은 중생들은 크게 걱정하며 통곡하며 빨리 구시나성으로 가서 부처님께 열반에 드시지 말고 이 세상에 좀 더 머물러 주시기를 청하자고 소리쳤다. 그리고 서로 손을 잡고 자신들을 보호해주던 부처님께서 가버리면 이 세상이 텅 비고 중생들의 복이 다하여 계속해서 나쁜 업들이 세상에 나타날 것이니 중생들은 더욱 빈궁하고 외롭게 될 것이라고 탄식하였다. 여기저기서 부처님께서 계신 사라림으로 찾아가 누워계신 부처님께 예를 올린 후 눈물을 훔치며 열반에 드시지 마시라고 간절하게 청했다. 
부처님께서는 여러 사람들의 청을 들었지만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이에 그들은 자신들의 청을 이루지 못하자 주저앉아 소리 내어 통곡하였다.

『석씨원류』의 <청불주세> 내용은 『대반열반경』(담무참 번역) 권1의 부처님의 열반 소식을 들은 많은 중생들이 부처님에 계신 사라림으로 와서 부처님께 거듭해서 열반에 드는 것을 만류하자 부처님께서 각자에게 설법하는 이야기를 시작 부분을 좀 더 길게 할애하고 마지막 결론은 간략하게 정리하였다. 

(사진 1) 각원사 석씨원류 벽화 청불주세
(사진 1) 각원사 석씨원류 벽화 청불주세

각원사 벽화(사진 1)에는 바위 위에 앉은 부처님을 중심으로 제자들이 둘러싸고 있고 왼쪽 하단에 부처님께 열반을 만류하는 인물들(사진에는 한 명만 보이나 모두 세 명임)을 묘사하였다. 온 세상을 비추는 광명이 나오고 것을 부처님의 얼굴 왼쪽에 표현하였다. 『석씨원류』 판화의 <청불주세>는 우리나라에 전하는 두 개의 판본에서 다르게 묘사되었다. 

(사진 2) 불암사판 석씨원류응화사적의 청불주세 판화
(사진 2) 불암사판 석씨원류응화사적의 청불주세 판화

『석씨원류응화사적』으로 알려진 남양주의 불암사본(1673년) 판화(사진 2)에서는 각원사 벽화와 달리 폭포를 배경으로 부처님을 소를 탄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사진 3) 선운사판 석씨원류의 청불주세 판화
(사진 3) 선운사판 석씨원류의 청불주세 판화

각원사와 동일한 구성의 판화는 고창의 선운사본(1711년) 판화(사진 3)이다. 바위 위에 앉은 부처님과 부처님 주변의 인물 수와 배치가 각원사 벽화와 같다. 이 사실은 그간 중국에서 각원사 벽화의 모본을 정확히 규정하지 못하고 막연히 성화본 『석씨원류응화사적』(1486년)일 것으로 추정해 온 것이 잘못되었음을 밝힐 수 있는 단서가 된다. 선운사본은 중국의 대흥륭사본(1486-1535년 사이)을 모본으로 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중국에 대흥륭사본 판화가 온전히 전하지 않는 상황에서 선운사에서 대흥륭사본을 바탕으로 판각해서 찍어낸 판화집이 여러 점 남아있어서 그간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밝힐 수 있게 된 것이다. 
18세기에 그려진 통도사 영산전 내부 포벽화에도 <청불주세>(사진 4)가 그려졌는데, 모본이 불암사본 『석씨원류응화사적』이어서 소를 탄 부처님을 표현한 모습으로 그려졌다. 
성화본과 대흥륭사본이 제작된 시기가 비슷해서 바위 위에 앉은 부처님과 소를 탄 부처님을 그린 두 판화 중 어느 것이 먼저인지, 어느 것이 원본에 가까운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각원사와 통도사에 그려진 서로 다른 <청불주세>의 모습에서 모본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한다.

(사진 4) 통도사 영산전에 그려진 청불주세 벽화
(사진 4) 통도사 영산전에 그려진 청불주세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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