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몽당 지학 대종사 49재 - 시몽 스님 행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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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몽당 지학 대종사 49재 - 시몽 스님 행장기,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4.02.21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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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몽당 지학 대종사 행장기

시몽 스님
시몽 스님

종사의 법명은 지학이고 법호는 탄공이며 자호는 시몽입니다.
전라도 나주 동강에서 광산 김씨 집안의 영휼을 아버지로 안동 권씨 계순을 어머니로 1948년 초이레 태어났으며, 속명은 상수이십니다. 
어려서 남달리 슬기로워 사서삼경을 외움에 막힘이 없었고, 책을 펴시면 밥먹고 잠자는 일조차 잊을 정도로 탁월한 집중력을 보였습니다. 
1965년 백양사 석상 큰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사미계를 받으시고 백양사 강원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두루 배우신 후 통도사 월하 큰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받으셨습니다. 
백양사 학인 시절부터 스스로 지은 시몽(是夢)을 법명처럼 사용하신 스님은 1978년 서옹 대종사로부터 탄공이라는 법호를 받았습니다. 탄허 큰스님 문하에서 5년간 수학하시면서 화엄경합론 역해 교열, 윤문, 교정, 그리고 유가, 불가, 도가 교과서 번역에 동참하셨습니다. 이를 계기로 동국대학교 역경원의 역경위원이 되어 여러 한글대장경 번역에 직접 참여하셨습니다. 
역경불사 전후로 송광사, 월정사, 봉암사 선원 등에서 5하안거를 성만하셨고, 대한불교조계종총무원 종정 사서실장을 지냈습니다. 
제주 법화사 주지를 맡으신 중에는 가람을 복원하는 데 젊음을 바치셨습니다. 스님은 불자들의 시주와 복구비 지원을 받아 3만여 평의 경내지를 확보하고 대웅전, 남순당, 구화루, 백련당, 회인당, 향적전을 새로 짓고 구품연지를 복원하였으며, 경내에 5천 그루의 나무를 심고 정원을 조성하여 도량을 장엄하셨습니다. 이로써 귤밭 가운데 있던 작은 시골 절은 아름다운 대가람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이 불사 과정에서 지범, 현명, 도정스님과 소암 현중화, 강덕주, 김문자, 김황수, 오향, 조명철, 변성근, 강원희, 김순희 등 여러 지역 인사들과 대한항공 조중훈 회장의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스님은 또 법화사 주변에 남아있는 신라불교와 고려불교의 희미한 흔적을 드러내기 위해 애쓰셨습니다. 특히 17년에 걸친 발굴조사와 일곱차례의 학술대회를 통해 불세출의 영웅 해상왕 장보고 대사가 법화사를 창건했다는 사실을 밝혀내셨습니다. 
법화사 주지 재임기간 중에 제주불교신문을 창간하였고, 서귀포불교문화원을 설립하셨으며, 제주불교연합회 회장을 맡아 제주불교 발전에 이바지하셨습니다. 
또 사회복지법인 연화원을 설립하여 연화어린이집을 개원하고 어린이포교에도 앞장섰습니다. 제주불교의 중심 관음사가 파행으로 치달을 때는 주지 직무대행을 여러번 맡아 정상궤도에 올려놓기도 하였습니다. 
스님은 평소 입버릇처럼 “수행자는 공부하다가 논두렁이나 밭두렁을 베개 삼아 죽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실 정도로 수행 정신이 투철하였으며, 평생 동안 소박하고 검소한 수행자의 면모를 잃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을 대할 때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가난한 노보살님이 방을 찾더라도 문을 활짝 열어 맞이하셨고, 저명인사가 찾아오더라도 늙은 농사꾼과의 대화를 끊지 않으셨습니다. 이에 불자들은 아버지의 등에 기댄 것과 같은 든든함을 느끼셨다고 하였습니다. 
특히 스님은 글이 깊고 아름다워 글을 쓰는 사람들의 우러름을 받으셨는데, 이는 대장경과 사서삼경은 물론 역사와 노장과 고전에도 환하게 밝아 인용과 변주에 자유로우셨기 때문입니다. 
전국에 전각을 짓거나 고칠 때, 불상을 만들거나 비를 세울 때, 스님들이 글을 청해오면 언제라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상량문, 비문, 연기문 등을 지으셨습니다. 
비록 오늘날 사람들이 스님의 참된 값어치를 알지 못하더라도 천년 뒤 후손들은 그 빛나는 글을 통해 스님의 진면목을 알게 될 것입니다. 
출가 본사인 백양사의 주지가 되셔서 중창 불사를 주도하여 고불선원, 염화실, 템플스테이회관을 신축하고, 쌍계루, 우화루, 설선당, 향적전 등을 해체 복원하여 도량을 새롭게 하였고, 광주 정광학원 이사장을 맡아 교육 불사에도 힘을 보태셨습니다. 
백양사 소임을 끝으로 공적인 활동에서 물러나신 스님은 대구 보성선원을 거쳐 인천 대복사로 옮기셨습니다. 인천 대복사에 계실 때는 글쓰기와 독서를 하시면서도 두 가지 마음을 굳히셨습니다. 하나는 서옹 대종사의 못다 이룬 꿈인 국제선센터를 만들어 참사랑 운동을 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부처님의 말씀을 한 권의 책에 담아내는 불교성전 간행이셨습니다. 
그러나 우연히 병을 얻어 고초를 겪으시게 되었는데, 그 와중에도 이 두 가지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셨으나 인연이 다해 끝내 이루지 못하시고 쿠시나가르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셨던 세존처럼 울주 정토마을로 옮기신 지 40여 일 만에 사바세계를 떠나 정토로 향하셨습니다. 
이때가 2024년 1월 9일 오후 2시 55분 계미년 동지달 스무여드레 미시였습니다. 향년, 일흔다섯, 승랍은 쉰여덟입니다. 곡기를 끊으시면서도 입적에 임박했을 때까지 제자들이 화두가 또렷하신지 여러 번 여쭈었는데 스님께서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사대가 무너지는 고통 속에서도 끝까지 통분사를 잃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스님은 미리 남긴 유언을 통해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고 병으로 죽게 되니 부끄럽고도 서럽다”고 한탄하시면서 당신의 죽음을 출가 본사인 백양사와 제자들에게도 알리지 말고 빈소도 마련하지 말며 당신을 기리기 위하여 돌맹이 한 개조차 남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을 포함한 백양사 권속들과 도반들이 스님의 뜻에 따라 소박하게 다비를 치른 후 스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셨던 법화사 구품연지에 뼛가루를 뿌려 드렸습니다. 
상좌로는 법현, 일미, 한북, 삼연, 고응이 있고, 몇몇 법상좌와 유발상좌가 있어 대종사의 수행과 전법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습니다.
스님의 눈길이 삼십 년이나 머물렀던 제주 법화사 주지 도성스님이 49재 중 2재를 지냈고, 친혈육처럼 아끼셨던 4제 지범스님이 불광사에서 3재를 지냈습니다. 제주에서 오랜 세월 서로 의지하셨던 조카상좌 현명스님이 오늘 삼광사에서 6재를 지내고 봉행합니다. 75년의 삶과 58년의 절집 살림살이를 다 적을 수 없다 보니 빠진 것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시몽 큰스님과 사부대중께서는 부디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불기 2568년 2월 18일,  
상좌 한북 쓰고, 조카상좌 금강 읽다.

 

시몽당 지학대종사 각령위覺靈位 전에

시몽당 지학 대종사 영전에 추모하는 문인 조명철 선생
시몽당 지학 대종사 영전에 추모하는 문인 조명철 선생

 

시몽당 지학대종사님이시어! 1월 9일 입적했다는 소식 듣고 정말 놀랐습니다. 동대병원에서 치료 받고 돌아온다고 했는데, 기어이 가셨군요.
하고 싶은 일이 참으로 많았는데, 훨훨 벗어버리고 가시다니 가슴이 아픕니다. 사바세계를 떠나 어디로 가시는지요? 극락으로 가십니까? 도리천으로 오르십니까?
승속의 만남이었지만 도반인 듯, 형제인 듯, 긴 세월 함께했습니다. 붓다와 공맹과 노장을 얘기하고, 정치 사회의 대립상을 걱정했지요. 당신에게서 지혜를 얻고, 노고를 무릅쓴 헌신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홀연 ‘나를 위해 돌 한 점 세우지 말라’며 가시니 꿈인 듯 아스라합니다. 꿈처럼 와서, 꿈처럼 살다, 꿈처럼 가시는군요. 애통합니다.
젊은 시절 하원 법화사 주지로 부임한 때를 돌아봅니다. 부지는 삼천여 평, 대웅전은 돌담 벽 함석지붕, 허름한 요사채 하나, 4·3과 6·25가 쓸고 간 폐허에 세워진 초라한 절이었지요. 하지만 스님은 주어진 현실을 기쁨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을 참구해 280인의 노비가 지키던 비보사찰임을 알고, 해야 할 일이 여기에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고려시대의 웅장했던 모습을 재현하려는 큰 꿈을 꾸셨지요.
여러 사람의 힘을 모아 정부의 재정지원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4만여평 대지를 확보하고, 8차의 발굴 조사와 6차의 학술 세미나를 제주와 서울에서 번갈아 열어 법화사의 문화적 가치를 조명했습니다. ‘지원6년기사시중창 지원16년기묘필’이란 명문기와 출토는 큰 사건이었습니다.
고려말 창건설이 중창이었음을 확인하고, 얼마나 놀라고, 얼마나 기쁘셨는지요. 이로써 신라 해상왕 장보고 창건설을 받쳐줄 근거가 됐습니다.
대웅전을 비롯한 다섯 채의 전각과 구품연지를 복원하고 고고학자 역사학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중국 산동성 법화원과 완도 청해진 법화사, 하원 법화사 등, 삼사가 해상왕 장보고의 창건임을 밝히는 김문경 박사의 비문을 받아 대비를 세우고, 장보고 석상도 세웠습니다. 잠자던 천년의 전통 불교문화가 시몽당 당신의 발심으로 재현됐지요.
그 시절 스님은 법화사의 복원에만 천착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주불교신문’을 창간하고, 서귀포 불교문화원 창립에도 앞장섰습니다.
제주불교연합회장을 맡아 사암의 고른 발전을 도모하고 23교구 본사 관음사의 파행 운영을 바로잡아 정상화에 이바지했습니다. 하지만 스님이 백양사로 가신 뒤 법화사에 변고가 발생했지요. 장보고 대사의 비도 석상도 쓰러뜨려 땅에 묻어버린 것입니다.
법화사 중창에 이바지한 승속 누구에게도 대화 한마디 없이 문헌적 근거가 없고, 관련 유물도 출토되지 않았다고 하여 성물을 철거해버렸습니다. 그 소식 듣고 얼마나 허허로웠을까요.
시몽당 지학대종사님이시어, 또 해야 할 얘기가 있습니다.
백양사 주지 재임 시엔 조계종 쇄신책을 제안하셨지요? 사찰 주지 임면 및 운영 개선책도 제안했고요. 독선적 총무원장 선거 개선책도 제안했었고요? 힘으로 절을 빼앗는 탈법을 그만두라는 소리도 내질렀지요. 승려라면 가난을 배워야 한다는 쓴소리도 서슴지 않았지요. 출가할 때의 초심으로 돌아가자 함이었습니다. 승가를 바로 세워 한국불교 발전을 이루려는 충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승가 권력에의 도전으로 낙인찍어 핍박받으셨습니다. 오명을 둘러쓰고 백양사를 떠나면서도 말 한마디 않으셨지요. 인연 따라 만나고 헤어지는 게 도리라 여겼을 것입니다. 인욕바라밀을 행함이 얼마나 강고했는지를 알게 합니다.
인천 대복사 한주로 있으면서도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팔만대장경을 한 권의 책으로 묶는 ‘우리말 불교 성전’ 간행을 꿈꾸셨지요. 학승과 불교학자와 기업인들을 찾아 서울과 지방을 쉼 없이 오가고 기독교 대한성서공회의 성경 간행 역사와 실상도 연구했지요. 그리하여 재단법인 ‘우리말불교성전간행위원회’ 창립에 힘을 쏟으셨습니다. 한국 불교의 세계화를 위한 결의에 찬 활동이었습니다.
그뿐입니까. 대복사를 인천의 명품 사찰로 개창, 인천항을 오가는 세계인들이 지친 마음을 쉬어가게 하려는 참선 도량 건립 계획도 세우셨지요. 법화사에서 이루지 못한 국제선원 창립의 꿈을 인천에서 이루려 했습니다. 꿈은 꾸는 자의 것이라 했지만 당신이 사바를 떠나시니 누가 그 꿈 이루리까.
어느 무더운 여름날 모시옷 입고 구화루 아래 앉아 얘기를 나누던 일이 떠오릅니다. 스님은 구품연지에 피어오른 연꽃을 지긋이 바라보며 “햇살이 드는 날이면 구름도 한라산도 연지에 와 쉬어가고, 밤이면 달과 별들이 연지에 와서 사랑을 속삭입니다.”라고 하더이다. 사위가 오수에 젖어 법당도 꿈꾸듯 조는 정오였습니다. 하얀 모시옷 입고 앉아 있는 스님은 한 마리 학이었습니다. 아닙니다. 흰 구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이었습니다. 그때 당신의 얼굴엔 무한한 즐거움이 번져 있었습니다.
나는 ‘至樂은 無樂이다'라는 말을 떠올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스님은 즐거움 자체를 뛰어넘은 선경에 들어 있었습니다.
시몽당 지학대종사님이시어! 법화사복원에 힘 모았던 추진위원들도 이미 갔습니다. 세상사를 밥상 위에 올려놓고 갑론을박하던 친구 벽산 고창실 거사도 갔습니다. 인재 거사가 피안으로 갈 때면 여법하게 보내겠노라고 말했던 당신도 가시는군요.
슬프다. 인재 홀로 남아 개시허망을 읖조립니다. 여몽환포영을 절감합니다. 바라건대 도솔천에 올라 부처님 만나 성불하시고 사바세계로 다시 오시어 못다 한 일 다 이루소서.
삼광사 신도회 도법 오홍식 거사와 함께 두 손 모아 간절히 기원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2024년 2월 18일

忍齋 조명철 삼가 쓰고, 
道法 오홍식 삼가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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