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불교의 전통과 현황 1 - “쿠빌라이와 알탄칸에 의해 불교 정착, 몽골인들의 정체성으로 자리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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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불교의 전통과 현황 1 - “쿠빌라이와 알탄칸에 의해 불교 정착, 몽골인들의 정체성으로 자리잡아”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4.03.07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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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벳불교에 달라이라마 존호 헌상하고
몽골왕공엔 전륜성왕 권위 정당성 부여

김경나(단국대학교 몽골연구소 연구교수)

해외불교는 각 나라 별로 상이함은 있지만, 사회적 연계성과 실생활에도 밀접한 이익을 주고 있고, 실천적 신행도 매우 활발하다. 이에 생소하고 잘 알려지지 않은 해외불교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시리즈를 기획한다. 첫 번째 순서로 한국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몽골불교에 대해 소개한다. 이 글은 김경나 교수가 2023 해외불교세미나에서 발표한 원고를 정리한 것이며, 몽골불교에 대한 역사와 특징, 승가제도,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사원과 승려, 현대 몽골불교의 현황과 특징 등을 차례대로 6회에 나누어 연재한다. / 편집자

      

두 차례에 걸친 불교 전파

몽골을 대표하는 종교는 불교이다. 몽골은 헌법에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으며 인구의 87%가 불교를 신앙한다. 몽골 정부와 종교계는 상호 존중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특히 몽골 정부는 불교의 우월적 입장을 존중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몽골에 불교가 전파된 것이 13세기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이는 칭기스칸의 몽골제국 이전의 역사적 모호함에 따른 기준으로 보았을 때의 시각으로, 대부분의 몽골인들은 몽골 땅에 불교가 2000년 전 고대부터 있어 왔다고 여긴다. 몽골의 저명한 학자 ‘자와 담딘(Zava Damdin)’은 ‘몽골인들은 훈 왕조 때부터 불교도가 되었다’라고 밝힌 적이 있다. 몽골에 불교가 전파된 역사는 흉노와 돌궐(투르크) 시대의 기록에도 나타난다.
한편에서는 몽골에 불교가 전파된 것이 13세기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이는 칭기스칸의 몽골제국 이전의 역사적 모호함에 따른 기준으로 보았을 때의 시각으로, 대부분의 몽골인들은 몽골 땅에 불교가 2000년 전 고대부터 있어 왔다고 여긴다. 몽골의 저명한 학자 ‘자와 담딘(Zava Damdin)’은 ‘몽골인들은 훈 왕조 때부터 불교도가 되었다’라고 밝힌 적이 있다. 몽골에 불교가 전파된 역사는 흉노와 돌궐(투르크) 시대의 기록에도 나타난다.

불교가 몽골 땅에 전래된 것은 역사적으로 몽골제국 시기부터이다. 
13~14세기 역사상 존재했던 국가 중 가장 방대한 영토를 지녔던 몽골제국의 수장인 쿠빌라이칸(1215~1294)은 티베트의 승려 파스파(1235-1280)를 국사(國師)로 임명하며 불교를 공식적으로 숭상하기 시작하였고 왕족과 귀족들도 불교를 신앙하게 되었다. 당시 원대(元代) 불교는 칸과 귀족들의 후원에 의해 외형상 크게 발전했지만 이는 상류 사회의 신앙에 그쳤고, 대다수의 민간에서는 여전히 과거로부터 이어오던 샤머니즘을 숭배하였다. 특히 원(元)이 멸망한 이후에는 왕실에서도 다시 샤머니즘을 신앙하게 되었다.
16세기 말 티베트 불교는 몽골 유목민들의 정신세계를 지탱해주며 다시 초원으로 전입되었다. 몽골이 티베트의 겔룩빠 불교를 믿기 시작한 것은 투메드의 알탄칸(1507~1582)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6세기 후반 당시 몽골의 맹주이자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하였고, 아싱라마(1557~1636)에 의해 불심이 싹트기 시작한 알탄칸은 티베트 승려 쇠남갸초(1543~1588)를 1578년 5월 청해(靑海) 호반 동쪽 앙화사(仰華寺)로 초청하여 회견을 가졌다. 이는 몽골 불교사와 16세기 이후 몽골인들의 문화와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일대 사건인 ‘앙화사 회견’이다. 이 자리에서 알탄칸은 쇠남갸초에게 “와치르-다라(Wačir-dara) 달라이 라마(Dalai Lama)”라는 존호를, 쇠남갸초는 알탄칸에게 “차크라와르(Čakrawar, 轉輪聖王) 세첸칸(Sečen Khan)”이라는 존호를 주고받았다. 이렇게 쇠남갸초는 몽골어로 ‘바다와 같이 넓고 깊은 지혜를 가진 스승’ 이라는 뜻의 “달라이 라마”라는 칭호를 얻고, 알탄칸은 쿠빌라이 세첸 칸에 비견되는 ‘전륜성왕’으로 인정받았다.
이렇게 몽골에서 새로운 정치 통합의 요구가 불교 수용으로 연결되었듯이, 당시 몽골의 군사력을 등에 업고 성장한 겔룩빠 정권도 점차 그들의 정치적 입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정치적 지위를 종교적 의례를 통해 확인받았던 17세기 몽골의 지배층은 많은 수의 승려와 활불을 확보하고, 그들을 통해 겔룩빠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다.

내몽골자치주 후호하우터시 호르호트 대소사에 있는 알탄칸의 동상
내몽골자치주 후호하우터시 호르호트 대소사에 있는 알탄칸의 동상

알탄칸은 1578년 쇠남갸초와의 첫 번째 회견에 즈음하여 100명의 귀족을 출가하게 했는데, 그 중에는 왕공도 포함되어 있었다. 서부 몽골의 오이라드(Oirad)의 왕공들은 1599년 모든 왕공과 귀족의 아들 한 명씩을 출가시키기로 약속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불교에 귀의한 수많은 몽골 왕공들의 아들과 귀족들은 주로 티베트 불교의 두 번째 영수(領袖)인 판첸 라마가 거주하는 티베트의 따씨휜뽀사원에서 수학했다. 그 결과 17세기 초 티베트 불교는 몽골 전역에서 크게 흥성하였으며, 지금도 티베트 불교 승려 중에는 몽골인들이 많다.
17세기 이후부터 1937년 이전까지 몽골은 명실공히 불교국가였다. 당시 불교는 모든 종교적 숭배대상 중 최상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는데, 불교가 샤머니즘적 요소를 일거에 소멸시켰다고 해석하기보다는 그 일부가 불교에 편입되거나 또는 하위 종교로서 몽골 사회에 존속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토착 종교인 샤머니즘과 불교의 공존 속에서 불교는 몽골 민족의 상징으로서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이에 대한 주요한 원인은 칭기즈칸 숭배와 불교를 절묘하게 조화시킨 데 있었다. 즉, “전륜성왕이며 오치르바니(Očirbani, 金剛手)의 화신인 칭기즈칸”이라고 규정함으로써 칭기즈칸의 이미지에 불교적 색채를 더했으며, 칭기즈칸과 그 뒤를 이은 쿠빌라이가 불교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음을 주장하여 몽골이 그 시작부터 불교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음을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몽골의 정치적 의도 아래 불교가 몽골인들의 정체성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현재 러시아의 공화국이나 중화인민공화국의 새로운 민족 분류에 따라 몽골과는 별개의 민족으로 구분되어있는 부랴트(Buryat), 다우르(Daur), 칼미크(Kalmyk), 오로챈(Oroqen) 등도 당시 티베트 불교를 숭배하였음을 보면, 17세기 불교의 확산이 몽골계 민족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가늠할 수 있다.
13세기에 이미 불교가 이미 전래 된 적이 있었지만, 17세기부터 몽골 전역에 불교가 확산되면서 초원에는 수백 개의 사찰이 세워지고, 많은 젊은이들이 승려가 되었다. 몽골에 새롭게 들어와 1585년 현재 몽골국 영내에 처음으로 세워진 사원은 어워르항가이(Öwörhangai) 지역 하르호린(Kharkhorin)에 남아있는 ‘에르덴 조(Erdene zuu)’ 사원이다.
17세기부터 몽골과 만주의 통치자들은 각각 자신들의 목적으로 불교를 후원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청(淸) 황제는 불교 경전을 티베트어에서 몽골어로 번역하여 목판 인쇄를 통해 민중에게 보급하고, 불교의 수장들을 북경에 초빙하여 감시하는 방법을 강구하는 등 다양한 정책을 실시하였다. 또한 청나라 제실(帝室)의 재정 지원으로 사원이 건립되었는데, 이 때문에 불교 사원은 특별한 지위를 향유했다. 청은 몽골 각지를 평정하고 통합할 때마다 사원의 설립을 후원했다. 여기에 신앙심이 두터운 귀족들의 보시에 의해서도 많은 사원이 건립되었다.
역사적으로는 사실이 아니었음에도 자신들의 조상을 티베트와 인도로 연결시키려는 움직임은 17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계속되었다. 이는 한족(漢族)의 역사에 흡수되지 않으려는 노력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몽골인들은 만주족의 지배를 받았지만 수적으로 우세한 한족을 더 경계하였기에 굳이 한족의 문화와 사상을 배우려 하지 않았고, 인도-티베트-몽골로 이어지는 불교 문화권 형성을 통해 몽골의 독자성을 유지하려 노력하였다.
청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몽골인들은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중 하나가 티베트어와 몽골어 불경을 인쇄하여 보급함으로써 몽골인의 정신적 통합을 유지하는 것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스스로 몽골인의 역사를 저술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17세기에 저술된 몽문연대기(蒙文年代記)들은 불교 설화를 몽골 역사에 기록하고, 불교 사상을 기반으로 몽골 역사를 설명하게 되었다. 또한 불교의 환생과 윤회 사상을 몽골 민중들은 초능력으로 이해하게 되었고, 이 결과 몽골의 왕들을 부처의 환생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아울러 불교가 몽골에 전파된 역사를 자세히 서술하여 몽골을 정교일치(政敎一致)의 국가로 기록하였다. 

17세기 이후 몽골 불교의 융성

17세기의 겔룩빠는 티베트 불교의 각 교파 중 운영 및 교육 체계에 있어 가장 완비된 교파였으며, 각각의 사원은 티베트의 불교 전통 지식을 전수하는 고등 교육기관이기도 했다. 겔룩빠 사원이 몽골 각지에 건립됨에 따라 티베트 불교의 전통 지식도 신속하게 몽골에 도입되었고, 몽골인들의 삶과 문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청대 전 시기에 걸쳐 겔룩빠 불교사원은 몽골 지역에서 정치·종교·교육·문화·예술의 중심지였다. 겔룩빠 불교가 몽골에 전파되던 초기에 사원 교육의 중심은 대부분 티베트에서 오거나 유학한 학승들이 맡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몽골인들 중에서도 뛰어난 불교 학자들과 고승이 다수 배출되었다. 이러한 몽골의 학승들은 불교 철학에 능통했을 뿐만 아니라 언어, 역사, 의학, 천문, 역학, 수학 등 학문에 대해 티베트어와 전통 몽골어로 다량의 저술을 남겼다.
17세기 이후 티베트어는 몽골 지역의 학술 언어로 자리 잡았고, 불교 이외에도 문학과 조형예술, 건축, 역법 등 티베트의 다른 문화들도 몽골에 전해졌다. 이 때 몽골인들의 문화에 스며든 티베트의 명사 및 호칭 등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불교가 몽골 지역에 급속도로 확산되면서 몽골인들의 사상과 삶에 큰 변화를 일으켰는데, 그 중에서도 교육 분야의 발전을 꼽을 수 있다. 몽골의 불교 사원은 티베트 승원의 구조를 빌려왔지만, 몽골에 정착되면서 조직화된 구조와 전통 유목사회의 모습을 함께 보이며 발전해 나아갔고, 사원에 부속된 다창(datsan, grwa tshang)에서는 현종(顯宗), 밀종(密宗), 의학(醫學), 천문(天文), 역법(曆法), 시륜(時輪) 등을 종합적으로 교육하였다. 불교 사원에 부설된 다창은 불교경전의 해석을 비롯한 다양한 학문을 교육하고 연구하는 종합교육기관으로, 특히 규모가 큰 사원에 부설된 종합 다창은 대학문사(大學問寺)로서 하나의 종합대학과 비교할 수 있다.
17~19세기 몽골 전 지역에 보편적 신앙으로 자리매김한 불교의 영향에 의한 사원의 확장과 다창의 건립은 기존의 유목사회 교육 시스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다창 설립 이전에는 관학(官學)과 가정 내 훈육, 마을 단위의 일부 도제식 교육이 중심이 되었던 것과 달리, 다창이 도입된 후에는 불교사원 내에서 분과별 전문성을 가진 ‘학교’의 시스템이 구축되어 체계적인 학문의 교육과 연구가 진행되었다.

에르덴 조 사원은 몽골 최초의 티베트 불교사원이자 몽골제국의 옛 왕궁 터에 지어졌다. 칭기스칸의 21대손인 아브타이 사인칸(1554~1588)의 지시로 1585년 에르덴 조 사원에 중앙 전각이 지어졌는데, 당시 사원 공사에는 옛 궁궐의 부재(部材)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 몽골 불교사와 건축사에서 차지하는 의의가 크다. 에르덴 조 사원은 1760년부터 증축 및 재건되기 시작하여 1808년부터 본격적인 확장공사가 이루어졌다. 중건 이후 에르덴 조 사원의 외벽은 108개의 불탑으로 이루어졌으며, 내부는 60여 개소의 전각에 천여 명의 승려들이 수학하는 거대한 사원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전각들은 대부분 티베트와 만주 양식으로 지어졌지만, 전각의 위치와 방향 배치는 몽골의 전통방식을 따랐다.
에르덴 조 사원은 몽골 최초의 티베트 불교사원이자 몽골제국의 옛 왕궁 터에 지어졌다. 칭기스칸의 21대손인 아브타이 사인칸(1554~1588)의 지시로 1585년 에르덴 조 사원에 중앙 전각이 지어졌는데, 당시 사원 공사에는 옛 궁궐의 부재(部材)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 몽골 불교사와 건축사에서 차지하는 의의가 크다. 에르덴 조 사원은 1760년부터 증축 및 재건되기 시작하여 1808년부터 본격적인 확장공사가 이루어졌다. 중건 이후 에르덴 조 사원의 외벽은 108개의 불탑으로 이루어졌으며, 내부는 60여 개소의 전각에 천여 명의 승려들이 수학하는 거대한 사원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전각들은 대부분 티베트와 만주 양식으로 지어졌지만, 전각의 위치와 방향 배치는 몽골의 전통방식을 따랐다.

몽골국 영내에 1585년 최초로 세워진 하르호린(KharKorin)의 에르덴 조(Erdene Zuu)사원 내에 설치된 다창을 시작으로, 16~17세기 몽골에서 다창을 보유한 사원은 17개소에 불과했지만 18세기 들어서는 103개소로 늘어났으며, 19세기 말엽에는 독립된 다창만 492개소로 폭발적인 증가양상을 보이며 몽골 지식층 양산의 모태가 되었다. 몽골의 사원과 다창은 종교적·정치적 기반과 더불어 교육 및 연구기관으로서의 구심점으로서 20세기 초반까지 유지되었다.
다창을 설립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학승들과 이들을 교육할 수 있는 승려가 상주해야 했기에 독립된 불전과 경당이 있어야 했고, 정기적인 경제적 지원이 수반되어야만 했다. 때문에 종합적이면서도 심도 있는 교육을 위해서는 대형 규모의 사원에서만 다창이 설치될 수 있었다.
다창을 갖춘 사원들과 그 안에서 이루어진 다양한 지식의 교육 및 연구는 몽골인들에게 이전보다 높은 학문적 수준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불교사원 교육은 귀족 자제뿐 아니라 신분에 상관없이 다른 유능한 아이들도 문자를 익히고 학문을 배울수 있게 해주었다.
17~19세기 몽골의 다창은 현종, 밀종, 시륜, 의학, 천문역법 다창 등의 분과로 나누어지지만 그 학습내용에 있어서는 긴밀한 연계성을 가진다. 모든 학승들은 기본적으로 현종의 오부대론(五部大論)의 내용에 대해 학습해야 했다. 이는 종교적 소양을 다지고 승려이자 지식인이 되기 위한 필수적인 교육 내용이었다.
특히 의학 다창의 학승들은 점성학의 이론을 숙지하여야 인간의 생리와 질병진단법을 통달할 수 있었고, 천문역법을 배우는 학승들도 기본적으로 인체에 대한 지식이 축적되어야 점술학습을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점은 몽골 다창이 실용학문의 전문적 지식 습득에 있어서도 분과별 학습내용이 서로 연결되도록 하여 폭넓은 학습을 추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몽골의 현종과 밀종, 시륜 다창에서는 티베트 다창의 교재를 기준으로 하였으며, 주로 번역과 주해작업이 이루어졌다. 한편 의학과 역법(曆法) 다창에서는 몽골 지역의 환경과 기후에 적합하도록 만든 몽의학서(蒙醫學書)와 각 지역의 다창을 기준으로 한 몽골력(蒙古曆)이 제작되었다. 이는 실용학문의 경우 티베트 다창의 이론과 학습법을 수용하여 몽골화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18~19세기 다창에서 발전되어 학문적 이론의 기틀을 마련한 몽골전통의학과 몽골역학은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다.
몽골에서 17~19세기 불교의 전파와 소통을 담당했던 사원은 몽골인들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결집시키는 공간이었다. 당시 사원에서는 집단적 종교의식과 교육·예술·문화 공연·축제 등이 어우러지며 몽골인 고유의 복합적 활동 공간이 형성되었다. 몽골과 청(淸) 조정의 겔룩빠 불교에 대한 전폭적인 정치적 혹은 경제적 지원이 있었기에 이 시기 사원에서 여러 학문이 신속하게 성장할 수 있었고, 당시 사회적 조건과 몽골인의 굳건한 신앙심은 학문적 융성과 문화예술에 대한 번영을 불러왔다.
16세기 이후 몽골의 불교 전파는 티베트 및 티베트 불교와 학문적으로 깊은 관련을 맺고 있으며, 사회 각 분야에서도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몽골의 사원문화는 단순히 종교집단의 향유로 그친 것이 아니라 경제·교육·문화·예술에 이르기까지 몽골민중 생활의 구심점이었다.
당시 몽골 지역에 뿌리내린 불교는 사회,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결정적인 구조 변화를 초래했다. 즉 독립적인 경제 단위를 형성한 사원 공동체의 발생은 처음으로 몽골의 옛 경제 구조와 결별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사원에서 부와 재산을 축적한 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무산 계층뿐 아니라 재산을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있던 귀족층과도 대립하게 만들었으며, 수 많은 승려들은 민중들에게 무거운 짐이 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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