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갑진년 신년기획 - 제주불교 르네상스를 꿈꾸며 - 실크로드·다르마로드를 가다➅ -투루판 토유크 석굴은 실크로드 보편의 관불삼매觀佛三昧 수행의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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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갑진년 신년기획 - 제주불교 르네상스를 꿈꾸며 - 실크로드·다르마로드를 가다➅ -투루판 토유크 석굴은 실크로드 보편의 관불삼매觀佛三昧 수행의 현장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4.03.07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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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유크마을전경
토유크마을전경

토유크(吐峪溝) 석굴은 고창고성에서 동쪽으로 15㎞ 떨어진 산산현(鄯善縣)에 있다. 화염산(火焰山)의 동단에 위치한 토유크 대협곡의 남쪽에 조영되었으며, 서쪽으로 베제클리크 석굴과는 20㎞ 거리이다. 토유크는 고대 실크로드의 중요한 통로로 쿠처와 하서 지역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불교 예술 교류의 중심지였다. 이 석굴들은 전량(前凉, 320-376)시기인 327년부터 조영이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석굴 가운데 가장 빠른 것은 고창국 시기에 해당하는 5세기 것이다. 당나라 시기에 이곳을 ‘정곡굴(丁谷窟)’로 불렸다는 기록이 있으며, 대형 사원과 선원(禪院) 등이 있었다고 한다. 이로 보아 당시 이곳은 대승불교의 선관수행이 성행하던 곳으로 짐작할 수 있다. 석굴은 고창위구르국 후기까지 지속적으로 팠던 것 같고, 13세기 이래 이슬람교도의 점령으로 쇠퇴하였다. 토유크 석굴로 진입하는 입구에는 오래된 이슬람마을이 전통촌으로 지정되어 있어 관광지로도 유명하다.  
석굴은 계곡의 깎아지른 절벽에 조성되었으며, 100여 개의 동굴이 분포하고 있다. 토유크 석굴은 토질이 무른 사력암(砂礫岩)이어서 세월과 함께 붕괴된 곳이 많고, 모래바람이 심해 동굴 내 퇴적으로 동굴과 동굴 앞 건물이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1916년에는 대지진으로 절반 이상이 붕괴되는 참사도 겪었다. 
토유크 석굴은 예배굴, 선굴(禪窟), 승방굴 등으로 나뉘며, 생활에 필요한 시설도 있다. 예배굴은 제38굴(중심 주굴)과 제44굴(불단굴)인데, 세로가 긴 장방형으로 만들어졌다. 천장은 아치형, 궁륭형, 복두형 등이 있으며, 중심은 궁륭형 천장으로 하고 나머지 사면은 평평하게 조성한 경우도 있다. 
토유크 석굴의 커다란 특징은 승려들의 수행을 위한 선굴이 비교적 많은데, 선굴은 전실과 후실로 구분되며, 후실은 좌선용으로 사용되었다. 전실의 좌우벽에 다시 조그만 선실을 판 경우도 있으며, 일부 굴에는 좌선을 위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승방굴은 일반적으로 소형의 아궁이와 옷 등을 넣 어두는 벽감이 만들어져 있는데, 벽화는 없다. 
토유크 석굴은 대부분 위에서 아래로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동굴이 한 세트를 이루며, 예배굴을 중심으로 좌우상하에 승방굴과 선굴, 그리고 기타 생활에 필요한 굴이 조성되었다. 예배굴 안에는 벽화를 그려 놓고 지면에는 벽돌을 깔거나 백회를 발랐다. 그리고 동굴 앞에는 건축물, 통로, 그리고 계단 등이 조성되었는데, 이는 오랜 시간에 걸쳐 일정한 계획 아래 순서대로 만들어졌음을 뜻한다.
석굴에서는 불교경전을 비롯한 문서류, 비단그림, 생활용구 등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문서 가운데는 한자, 브라흐미(Brahmi) 문자, 티베트 문자, 위구르 문자 등으로 이루어진 것들이 다수 발견되어 한족, 티베트족, 위구르족 등 다양한 종족이 번갈아 통치했던 역사를 보여준다.

토유크 석굴 벽화의 특징

제1굴의 벽화도. 필자가 방문한 2023년 2월 경에는 보수공사가 한창이었다.
제1굴의 벽화도. 필자가 방문한 2023년 2월 경에는 보수공사가 한창이었다.

현존하는 주요 벽화는 1불 2보살의 삼존상, 불설법도, 천불도, 본생도, 인연고사도, 그리고 선정수행굴에 그려진 정토도와 비구선관도가 있다. 이 밖에 장식문양으로 연화문, 팔메트 등의 식물문, 연주문 등이 있다. 천불은 중심주굴과 불단굴 등 예배굴의 벽면에 가득 묘사되어 있다. 이외에도 인욕 선인 본생도, 시비왕(尸毗王) 본생도 등 21폭의 본생도가 현존하는데, 그 양식이 둔황막고굴과 유사하지만, 인물 형상은 쿠처 지역 석굴과 유사하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선정인을 한 천불의 존재, 방형 구획, 본생도와 인연도가 벽면의 하단에 묘사되는 점 등은 쿠처 석굴 벽화와는 다르다. 이는 토유크 석굴이 일방적으로 어느 지역만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 양식과 독자성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토유크 석굴 벽화의 특징은 승려들의 선정 수행을 위한 벽화의 존재다. 제20굴의 벽화 내용에는, 정면 벽에는 연못이 그려지고, 중앙에는 원형의 커다란 보수(寶樹)가 있다. 이 보수 양쪽에 각각 조그만 연꽃 봉우리와 연못에서 나온 반쯤 핀 연화 사이로 머리나 상반신을 내민 화생동자(化生童子)가 묘사되어 있다. 구획의 테두리는 보주, 조개껍질, 그리고 물새 등과 함께 묘사된 물결문이 장식되어 있다. 
또 제20굴과 제42굴에는 ‘비구선관도’가 있는데, 비구와 그들의 선정 수행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좌벽의 상부에는 선정에 든 승려가 동물형 대좌를 타고 날아오는 장면이 묘사되었고, 그 밖에 누각 안에서 연화에 앉아 선정하는 승려나 산을 배경으로 날아오는 승려 등이 묘사되었다. 또한 우벽에는 거위, 독수리, 금시조를 타고 결가부좌한 선정 승려가 표현되었다. 이 가운데는 승려의 어깨나 허벅지 위에서 화염이나 물이 나오는 그림도 있는데, 이는 삼매의 경지에 든 수행자의 특별한 상태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제20굴에는 병자와 시체를 관상하는 승려가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부정관(不淨觀)’과 ‘백골관(白骨觀)’ 등을 표현한 것이다. 제42굴 안에 만들어진 방에서도 나무 아래에서 해골을 관상하는 ‘백골관’이 묘사되어 있다. 백골관은 당시 중앙아시아 실크로드에 자주 등장하는 화제로 부정관에서 관불삼매(觀佛三昧)로 전화하는 관상법(觀想法)으로 매우 중시되었던 것이다.

고창지역 고승과 실크로드의 구법승들

토유크석굴. 실크로드의 중요한 길목에서 대상들은 이곳에서 무사안녕을 빌었을 것이다.
토유크석굴. 실크로드의 중요한 길목에서 대상들은 이곳에서 무사안녕을 빌었을 것이다.

5세기 중반경 고창에서는 산스크리트어 경전과 호본(胡本)의 <현우경>, <대방등다라니경>과 같은 대승경전이 번역되었다. 저거(沮渠)왕조가 들어선 후 ‘안양후(安陽侯)’는 <관미륵보살상생경>·<관세음관경>을 얻어서 번역하였다. ‘담무참’이 <열반경>, <보살계본>을 구한 지역도 고창이며, <보살계본소>에는 6종의 보살계본 가운데 하나가 고창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고창 지역에도 대승불교가 전파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학승 ‘지림(智林, 409-487)’은 아비달마 불교에 뛰어났으며, <이제론>, <비담잡심기(毘曇雜心記)>를 짓고 <십이문론>, <중론> 등을 주석하였다고 전한다. 지림은 대소승 논서의 수준 높은 이해에 도달한 고창불교를 확인하게 한다. ‘법성(法盛, 9세기 중엽)’은 <보살투신아호기탑인연경(菩薩投身餓虎起塔因緣經)>을 한역하였다. 이를 계기로 보살투신아호탑이 건립되고 고창에서는 법성을 공양하게 된다. 고창국에서 선관이 깊이 수행되었는데, 이 지역 승려로 ‘법서(法緒)’라는 인물이 대표적이다. 그는 항상 석실에서 머물며 선관을 하고 대승경전을 독송하였다고 한다. 
6~7세기에는 해로를 이용하는 경우도 많지만 5세기까지는 많은 구법승들이 육로를 이용하면서 오늘날 신장 지역을 경유하였다. 율장을 구하기 위해 399년 장안을 출발한 ‘법현(法顯, 342-423)’은 선선(鄯善)과 우전을 경유하여 인도에 도착하였다. 404년 장안을 출발한 ‘지맹(智猛, ?-453)’도 양관(陽關)을 지나 선선, 구자, 우전 등 여러 나라를 거쳐 인도 가유라위국(迦維羅衛國)에 가서 불사리와 붓다유적지를 순례하였다. 이후 <열반경>, <마하승기율> 범본 등을 얻어서 424년 천축을 출발하여 양주로 돌아와서 <열반경>을 한역하였다. 420년 ‘담무갈(曇無竭)’은 하남국(河南國), 고창, 구자, 사륵 등 서역 제국을 거치고 파미르 고원을 오르며 설산을 넘어 계빈에 도착하여 불적지를 예배하였다. 수년을 머무르며 산스크리트어를 배우고 『관세음수기경』 산스크리트어 경전을 얻고 천축국을 유행한 후 해로로 광주에 돌아왔다. 
남조 송대의 구법승은 ‘혜람(慧覽, ?-464)’, ‘혜각(慧覺)’과 ‘위덕(威德)’, ‘법헌(法獻, ?-498)’ 등이 있는데, ‘혜람’은 간쑤성 주천 사람으로 출가 후 간다라의 계빈으로 갔다가 귀국하는 길에 우전에 들러서 계법을 전수하고, 다시 토욕혼(吐谷渾) 땅을 거쳐 사천(四川)으로 돌아왔다. ‘혜각’과 ‘위덕’은 양주사람으로 424-452년 우전으로 가서 <현우경> 범본을 얻어 445년 고창의 천안사(天安寺)에서 역경 출간하였다. 법헌은 양주에서 출가하였는데, ‘지맹’의 구법행을 듣고 475년 도읍을 출발하여 서역으로 가서 우전까지 도달하였다. 오는 길에 부처님 치아, 불사리와 <관세음참회제죄주경>과 <법화경>「제바달다품」을 얻어서 귀국하였다. 
‘현장(玄奘, 602?-664)’은 직접 18년간 인도로 구법순례하고 나란다대학에서 학습한 이후 귀국하여 <대당서역기>를 남겼다. 현장은 가지고 온 산스크리트어 불경을 역경하는 데 매진하여 기념할만한 업적을 이루었다. 그 밖에 밀교의 대대적인 역경사업은 ‘금강지(金剛智, 669-741)’와 ‘불공(不空, 705-774)’에 의해서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이들은 해로를 통해서 중국으로 들어오는데, 대략 7세기 이후에는 육로와 해로가 모두 활발하게 이용된다. 이처럼 역경을 중심으로 실크로드의 고승들은 중국을 비롯한 동남아시아에 불교를 전파한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한편 역경이 아니라 부처님의 유적지를 직접 순례하고 나란다대학에서 학습을 하며, 산스크리트어 원본 경전을 입수하여 귀국하는 구법승들이 있었다. 4세기 중반에서 5세기에 급격하게 증가한 구법승들(96명)은 험난한 히말라야나 파미르고원을 넘었고, 그들중에는 인도에 도착하지 못하고 병사하거나, 인도에 도착한 후에 어느 곳에서 병사하기도 하고, 인도의 사찰에서 머물다가 입적하기도 하였다.
신라 구법승 혜초는 광주(廣州)를 떠나 해로로 인도에 가서 723~727년 동안 각지를 순례하고 가섭미라국, 파사국, 대식국, 토화라, 소륵 등을 돌고 727년 구자와 언기를 거쳐 장안에 돌아왔다. 이렇듯 4세기 말부터 8세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구법승들이 신장 주변 실크로드를 경유하며 불교를 전파하였던 것이다. 
                         /석진현(불교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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