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불교의 전통과 현황 2 - 1930년대 스탈린주의자들에 의해 승려 3만여 명 학살, 1990년 민주 정부 수립 이후 사원 정비와 불교중흥 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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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불교의 전통과 현황 2 - 1930년대 스탈린주의자들에 의해 승려 3만여 명 학살, 1990년 민주 정부 수립 이후 사원 정비와 불교중흥 꾀해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4.03.20 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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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나(단국대학교 몽골연구소 연구교수)

 

해외불교는 각 나라 별로 상이함은 있지만, 사회적 연계성과 실생활에도 밀접한 이익을 주고 있고, 실천적 신행도 매우 활발하다. 이에 생소하고 잘 알려지지 않은 해외불교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시리즈를 기획한다. 첫 번째 순서로 한국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몽골불교에 대해 소개한다. 이 글은 김경나 교수가 2023 해외불교세미나에서 발표한 원고를 정리한 것이며, 몽골불교에 대한 역사와 특징, 승가제도,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사원과 승려, 현대 몽골불교의 현황과 특징 등을 차례대로 6회에 나누어 연재한다. / 편집자

 

1930년대 사회주의로 인한 불교사원의 폐쇄
18~19세기에 융성했던 불교 사원은 이미 몽골 사회에 확고하게 입지를 굳힌 상태였고, 1911년 몽골의 독립 이후 10년 동안 몽골 내 사원과 승려의 수는 폭발적으로 확장하게 된다. 급변하는 시대상황 속에서 징집을 피하기 위해 출가하는 자들이 늘어났고, 이는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었으나 이미 방만하고 비대해진 몽골의 사원은 자정작용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1924년 당시 몽골 인구는 대략 70만 명 정도였는데 이중 113,000명 정도가 승려로 전체 남성인구의 약 40%에 달했으며, 국가 재산의 20%는 사원소유였다. 막강한 세력과 부를 갖고 있던 몽골 불교사원은 그 역사에 비해 너무나 짧은 시간 사이 사라지게 되었다.

복드 칸(1869~1924)은 복드 칸국의 불교 승려이자 몽골계 국가 불교도 군주였다. 제8대 제쮠담바 후툭투이며, 속세의 이름은 롭산 추키니마 텐진왕축이다. 몽골의 독립운동을 주도하였으며 독립 몽골의 카안과 몽골 인민당 명예고문위원장을 지냈다. 1911년 12월 29일부터 1919년까지, 1921년부터 사망시까지, 중화민국 군대가 외몽골을 점령한 기간을 제외하고는 몽골의 수반이었다.
복드 칸(1869~1924)은 복드 칸국의 불교 승려이자 몽골계 국가 불교도 군주였다. 제8대 제쮠담바 후툭투이며, 속세의 이름은 롭산 추키니마 텐진왕축이다. 몽골의 독립운동을 주도하였으며 독립 몽골의 카안과 몽골 인민당 명예고문위원장을 지냈다. 1911년 12월 29일부터 1919년까지, 1921년부터 사망시까지, 중화민국 군대가 외몽골을 점령한 기간을 제외하고는 몽골의 수반이었다.

역사적 사실로 알려져 있는 중요한 외부요인은 인민혁명을 통해 몽골을 위성국가로 만든 스탈린의 종교말살 정책이 작용한 결과였다.
그러나 당시 몽골 불교가 일순간 침몰하게 된 내부요인은 세계정세 변화에 대한 무지와 판단력 부족, 비대하고 방만해진 사원, 국민생활을 압박하는 사원의 고리대금업, 이로 인한 대중적 지지기반 약화 등에서 찾을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1922년 급진 개혁에 반대하는 국민봉기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몽골 불교계는 이를 주도적으로 상황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오히려 복드칸(Bogd Khan, 1869~1924)의 통치기에 인민혁명 세력에 동조함으로써 법률과 제도 정비를 통한 그들의 세력 확장을 방조했다. 당시 몽골불교는 스스로 변화를 주도하지 못하고 변화의 파도에 쓸려가게 되었다.

울란바타르의 간단테그치늘렌 사원은 19세기 중엽에 건축되었고 현재 몽골에서 가장 큰 사원이다. 이 사원 건축은 처음 1838년에 제4대 복드 게겐에 의하여 시작되었으며, 제5대 출템 지그미드 담비잔찬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대부분의 몽골 사원과 마찬가지로 간단사도 1937년에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운이 좋게도 이 사원은 외국인에게 몽골에도 종교 자유가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한 상징물로 파괴를 면했다. 2006년 8월 21일 간단 사원의 초청으로 제14대 달라이라마가 방문하여 법회를 열었다. 중국 정부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국경을 봉쇄하고 중국과 몽골 사이를 운행하는 항공 노선도 폐쇄했다.
울란바타르의 간단테그치늘렌 사원은 19세기 중엽에 건축되었고 현재 몽골에서 가장 큰 사원이다. 이 사원 건축은 처음 1838년에 제4대 복드 게겐에 의하여 시작되었으며, 제5대 출템 지그미드 담비잔찬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대부분의 몽골 사원과 마찬가지로 간단사도 1937년에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운이 좋게도 이 사원은 외국인에게 몽골에도 종교 자유가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한 상징물로 파괴를 면했다. 2006년 8월 21일 간단 사원의 초청으로 제14대 달라이라마가 방문하여 법회를 열었다. 중국 정부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국경을 봉쇄하고 중국과 몽골 사이를 운행하는 항공 노선도 폐쇄했다.

몽골 정부는 사회주의 혁명의 달성을 위해 몽골의 사원과 승려를 혁명의 적으로 규정하여 탄압하였으며, 사원의 파괴와 승려의 환속 또는 살해가 자행되었다. 같은 티베트불교 전파지역이지만 티베트나 칭하이(靑海)지역에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몽골지역의 사원은 전멸하다시피 파괴되었다. 1990년대 이전까지 몽골국에서 사원의 형태를 유지한 곳은 울란바타르의 간단사 뿐이었고, 현재까지도 몽골과 중국의 네이멍구자치구(內蒙古自治區)에는 폐허에 가까운 사원과 절터만 남아있는 곳이 즐비하다.
당시 몽골사회에서 몽골 쇠퇴의 주요 원인이 불교 때문이었으며, 불교의 전파와 흥성조차 부정하는 인식이 확산되어 학자들 사이에서도 그 역사적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고 연구의 대상으로도 삼지 않으려는 경향이 팽배해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1937년 9월부터 1938년 7월까지 83,203명의 승려가 사원에서 추방되었다. 이렇게 대부분의 승려들은 유죄판결을 받아 범죄자로 전락하였고, 그나마 생존해 있던 승려들도 1938년 10월 가장 대규모의 숙청에서 반혁명분자로 낙인찍혀 살해당했다.
심지어 고위 관직에 있던 승려들도 초기 사회주의의 숙적으로 여겨져 반혁명분자와 간첩혐의, 또는 정부 몰락을 도모하였다는 혐의로 기소되었고, 막대한 세금(오늘날의 보석금)을 내고 나서야 풀려났다. 이러한 예는 몽골정부가 당시 승려들이 가지고 있던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력과 불교사원의 존재를 무너트리려는 수단으로 시행했던 것이었다.
학살이 자행되는 가운데 일부 승려들은 승직을 포기하였고, 몽골불교의 맥을 단절하기 위하여 반복된 숙청과 사원폐쇄에 앞장섰다. 이에 앞선 승려들은 몽골 정부의 높은 관직에 오르기도 했다.
한편 사원에서 부동산과 전차(磚茶), 생필품 등에 대하여 고리대금을 받고 유통했던 것에 대하여 재판으로 회부되기도 하였다. 이는 새로 수립된 몽골 정부와 재판부가 법 집행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재판부에서는 승려에 대해서도 법률을 엄격하게 적용하였다. 당시 사회주의자들은 살아남고자 개인의 신념을 져버리고 당시 시류에 적응해야만 했다. 몽골정부의 불교 탄압은 반 종교주의 혹은 반 성직자주의로서 자행되었다기보다, 몽골 불교와 사원이 장악하고 있던 정치력과 경제, 사회적 기능을 단절시키고자 했던 것이었다.
1937~1938년 사이 몽골의 모든 사원은 사회주의 이념으로 인해 모두 불타거나 파괴되어 문을 닫게 되었고,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곳들은 그마저 창고나 마구간, 군대의 숙소로 전락하게 되었다. 20세기 초반 115,000여명에 달했던 몽골사원의 승려들도 대부분 숙청당했다. 이렇듯 청대(淸代) 몽골에 융성했던 불교는 순식간에 침몰하게 되었다.

20세기 이후 몽골 불교
몽골 불교는 20세기에 극적인 성쇠를 지나, 1990년 민주 정부의 등장으로 본래 모습을 되찾기 위한 복원 작업이 시작되었다. ‘종교는 아편’이라는 슬로건 아래 숨겨져 있었던 불교문화재들과 몽골 민중의 불심도 표면으로 드러나게 되었고, 폐허로 남아있던 사원의 중건이 시작되었다.
현재 몽골불교의 중심에는 울란바타르의 간단사와 부설 승가대학이 있다. 몽골 전통불교를 일으키기 위한 노력은 승가대학의 중건과 간단사불교미술대학을 비롯한 강원 등 불교 관련 교육시설을 설립으로 이어지고 있다.
1990년대에는 억눌렸던 불심을 회복하고 사원을 복원하는 데에 열중했다면, 2000년대 이후에는 불교 서적의 출판과 함께 다양한 불교 사업이 각지에서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몽골불교 활성화가 지방 불교 활성화와 직결된다는 것을 인지하고, 몽골 각 지역에 전통문화예술원 지부를 설립하여 불교 중흥 네트워크를 추진하고 있다.

몽골의 승원 구조
몽골에서는 절 혹은 불교사원을 지칭할 때 일반적으로 ‘후레, ‘히드’, ‘후레 히드’, ‘도강,’ ‘호랄’, ‘짜스’ 등 여러 단어를 혼용하여 사용한다. 모두 불교사원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면밀히 살펴보면 그 뜻과 쓰임에 따라 규모는 각각 상이하다.
호랄(хурал)은 몽골불교에서 ‘법회(法會)’를 의미한다. 한편 현대몽골어에서는 모임, 집회, 회의, 협의, 모임, 집회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짜스(жас)는 중대형 사원의 종무소(宗務所)에 해당하며, 사원에 부속된 가축과 토지, 행정과 출납, 대출관리 등을 담당하였다.
후레(хүрээ)는 사원을 포함한 여러 경당과 불전을 거느린 대규모 가람으로서, 후레 안에 히드가 부속된 구조로 설립되는 양상을 보여 왔다. 오늘날 몽골에서 후레는 종단 자체를 의미하는 단어로 쓰인다. 후레(хүрээ, 庫倫)는 본래 현재의 울란바타르의 옛 이름으로, 1639-1706년에는 어르거(өргөө), 1706-1911년에는 이흐 후레(их хүрээ), 다후레(да хүрээ), 후레(хүрээ)라고 불렸다. 몽골이 독립을 선언한 1911년에는 니슬렐후레(нийслэл хүрээ)라 명명되었다.
히드(хийд)는 대형 후레 내에 있으면서 여러 불전과 경당, 다창이 포함된 형태의 대규모 사원을 일컫는다. 대표적인 예로 현재 울란바타르의 간단텍첸링 사원(간단사), 셀렝게 아이막의 아마르바야스갈랑트 사원, 어워르항가이 아이막의 에르덴 조 사원을 들 수 있다. 보통 목조건물로 지어진 사원의 모임을 히드라 칭하며, 히드에는 불전(佛殿)을 포함한 다창이 부속되어 있었다. 전각을 갖춘 사원을 이르는 히드(хийд)는 ‘담으로 구획된 공간’이라는 어원에서 유래하였다. 몽골에서 일정한 규모를 갖춘 불교사원의 의미로 널리 통용되는 단어가 히드인 것은, 유목 생활을 하던 몽골인들에게 불교사원의 이미지는 ‘구획된 공간 안에 고정된 건축물이 있는 곳’이었다는 사실을 추론케 한다.

울란바타르 인근 존모드에 있는 톡친사원 유지. 1930년대 말 사회주의 정권에 의해 파괴된 사원으로, 지금은 벽만 남아 있다.
울란바타르 인근 존모드에 있는 톡친사원 유지. 1930년대 말 사회주의 정권에 의해 파괴된 사원으로, 지금은 벽만 남아 있다.

도강(Дуган, ’Du khang)은 대법당의 중앙 법전(法殿)으로, 승려들이 모여 예불을 드리는 곳을 칭하며, 사원에 부속되어 법회를 열고 승려들이 마주 앉아 독경을 하는 경당(經堂)을 말한다. 특히 촉첸 도강(Цогчен Дуган)은 주불(主佛)을 모시는 중앙 법전으로, 한국 불교사원의 대웅전(大雄殿)과 비교된다.
몽골 불교사원을 규모 순으로 정리하면, 후레(хүрээ) → 히드(хийд) → 도강(дуган) 순으로 볼 수 있다. 후레(хүрээ)는 사원을 포함한 여러 경당과 불전을 거느린 대규모 가람(伽藍)이며, 히드(хийд)는 대형 후레 내에 있으면서 여러 불전과 경당, 다창이 포함된 형태의 사원이었다. 도강(дуган)은 법전(法殿)으로, 대부분 히드 내에 부속되어 있는 형태였으나 지역에 따라 독립적으로 존재하기도 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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