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불교 인물열전④추사 김정희 (秋史 金正喜, 1786~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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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불교 인물열전④추사 김정희 (秋史 金正喜, 1786~1856)
  • 승인 2006.11.02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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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추사 김정희 선생이 서거한지 150주기를 맞았다. 국립중앙박물관을 비롯한 여러 기관단체에서 추사 선생을 추모하는 다양한 기념행사가 이번 11월에 열릴 예정이다. 그의 유배지였던 제주에서도 특별전을 비롯한 여러 가지 부대행사들이 준비되고 있어 올 해도 어김없이 추사 선생의 이름은 수도 없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것이다.

흔히 추사를 논하는 사람들은 ‘세상에 추사를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추사를 아는 사람도 없다’는 다소 역설적인 표현을 빌린다.

그도 그럴 것이 추사체를 완성시킨 우리나라 최고의 서예가이자 시와 문장의 대가, 금석학과 고증학에 있어 당대 최고의 석학, 문인화의 대가, 해동의 유마거사 등 그를 일컫는 수많은 수식어에서 보듯 추사 김정희선생은 쉬이 오르기 녹록찮은 험준한 산에 비유할만하기 때문이다.

특히 그를 두고 ‘해동의 유마거사’라는 별칭이 생겼을 정도로 그는 불교와 불교철학에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던 불교인이었음에도 대중들은 그 사실을 잘 알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는 금석학, 고증학, 경학, 불교사상 등 각 분야에 걸친 깊고 폭넓은 학문 세계를 일찍부터 만들어나갔고, 해탈한 듯 일필휘지로 써내려가는 자유자재의 독창적인 추사체는 그가 제주에서 보낸 짧지 않은 유배기간이 없었다면 완성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결코 지금의 찬사를 받지 못했을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그만큼 추사선생이 초로(初老)에 제주에서 보낸 9년간의 유배기간은 뼈를 깎는 고통의 시간이기도 했으나, 스스로의 학문과 예술세계를 훨씬 성숙케 한 시간이기도 하였다. 그가 제주에서 남긴 작품 중 ‘수선화실(水仙花室)’이란 글씨에서 보듯, 수선화를 매우 즐겨했던 그는 금잔옥대(金盞玉臺)의 제주 수선화처럼 차디찬 칼바람 속에서도 예술과 학문의 숭고한 꽃을 피워낸 인물이다.

추사 김정희(1786~1856, 정조10~철종7)는 조선후기 대표적인 문신이자 서화가·문인·금석학자이다.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원춘(元春), 호는 완당(阮堂)·추사(秋史)·예당(禮堂)·시암(詩庵)·과파(果坡)·노과(老果)등 다수가 있다.

1786년 6월 3일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영조의 부마인 월성위 김한신의 증손이며, 병조참판인 김노경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연암 박지원의 제자로 고증학의 신봉자였던 박제가의 인정을 받아 그의 문하생으로서 학문의 기초를 닦았다. 1809년(순조 9) 생원이 되고, 아버지 김노경이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갈 때 수행하여 연경(燕京)에 체류하면서 옹방강의 경학(經學)·금석학(金石學)·서화(書畵)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추사가 제주 유배 당시 완성한 ‘세한도’.  
 


1819년(순조19) 문과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추청우도암행어사·성균관대사성·이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24세 때 연경에 가서 당대의 거유(巨儒) 완원(阮元)·옹방강(翁方綱)·조강(曹江) 등과 교유, 경학(經學)·금석학(金石學)·서화(書畵)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사형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우의정 조인영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만을 부지하여 1840년(헌종6) 9월 27일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유배지 제주에서는 대정의 포교 송계순 집에 적소를 정하여 지내다가 나중에는 강도순의 집으로 옮겨 살았다. 현재 제주도 남제주군 대정읍 안성리의 추사적거지는 4·3사건으로 불타버린 강도순의 옛 초가집을 그 증손자의 고증으로 복원한 곳이다. 유배기간의 대부분을 추사는 여기에 머물면서 지방유생과 교류하는 한편 학도들에게는 경학과 시문과 서도를 가르쳐 주었다.

한편, 불교사상에도 해박한 지식을 지녀 ‘해동의 유마거사’로 불렸던 추사는 대흥사에 주석했던 초의스님과 절친한 사이로 잘 알려져 있다. 제주도로 오는 유배 길에 얽힌 얘기 중에는 대흥사의 현판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1840년 제주도로 귀양 오는 길에 추사는 초의 선사를 만나기 위해 해남 땅의 대흥사에 들렀다. 이때 추사는 호남제일의 명필가로 알려진 원교 이광사가 쓴 대웅전 현판을 보고 조선의 필체를 망가뜨리는 글씨라며 직접 자신이 대웅보전의 현판을 써주고 갔다. 그러나 9년 뒤 유배에서 풀려나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대흥사에 들른 추사는 과거 자신의 아집을 사과하고 초의 선사에게 원교 이광사 선생의 현판을 다시 내다걸게 하였고, 대신 대웅전 왼편에 있는 무량수각의 현판을 써주었다 한다. 현판은 현재 전남 대흥사에 남아 있다.

김정희는 제주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1841년 헌종 7년 4월에 구암사의 백파 긍선 선사에게 <망증15조>를 지어 보냈다. 당시 백파 선사가 『선문수경』을 지은 것에 대해 초의스님이 『선문사변만어』를 펴내었다. <망증15조>는 불교사상이 깊었던 김정희가 두 스님의 논쟁에 대해 초의스님의 의견을 뒷받침하는 내용의 글을 지어 보낸 것이다.

추사가 유배 온지 4년 되던 해인 1843년 봄에는 부인 예안이씨가 세상을 떠났다. 추사와 금란지교인 대흥사의 초의스님은 부인을 잃은 추사를 위로하기 위해 문상차 제주도로 직접 건너와 6개월 간 벗을 한다. 이 때 초의스님은 남제주군 안덕면 사계리 산방산 산방굴사에서 수도하였고, 추사에게 청하여 『밀다경』을 쓰게 하여 세상에 전하였다고 한다.

또한 추사의 작품 중 가장 많은 조명을 받고 있는 세한도(歲寒圖)는 바로 제주에서 완성되었다. 넓은 공간배치, 비쩍 마른 노송과 생생한 어린 소나무, 텅 비어 쓸쓸한 오두막집, 먹물을 털어낸 채 마른 붓질로 희망을 표현한 잣나무 등은 차라리 선(禪)의 지극한 경지이기도 하다. 이 ‘세한도’는 제주에 귀양 와있는 추사에게 꾸준히 귀중한 책들을 보내 준 제자 이상적(1804~1865)에게 그 뜻을 가상히 여겨 답신으로 그려 서울로 부친 그림이다. 추사가 59세 되던 1844년에 그린 것으로 오늘날까지도 문인화의 최고로 꼽힌다. 이상적이 오위경을 비롯한 청나라의 명류 16명의 제발(題跋)을 받아 세한도 뒤에 발문을 이어 붙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1848년(헌종 14년) 유배에서 풀려 제주를 나왔고, 조정에 복귀한지 2년만인 1851년(철종 2) 헌종의 묘천(廟遷) 문제로 다시 북청으로 귀양을 갔다가 이듬해 풀려났으니 말년 들어 도합 11년을 귀양살이로 지샌 셈이다.

70세에는 과천에 있는 선고묘 옆에서 수도에 힘쓰고, 이듬해에 광주 봉은사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다음 귀가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문집으로『완당집(阮堂集)』, 저서에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 《완당척독(阮堂尺牘)》 등이 있고, 작품에 <세한도(歲寒圖)> <묵죽도(墨竹圖)> <묵란도(墨蘭圖)> 등이 있다.

제주도와 옛 남제주군은 정부에 대정 성지와 추사적거지를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 신청한 상태이고, 추사기념관 건립도 추진 중에 있다. 이와 관련해 유홍준 문화재청장과 추사동호회 회원들이 2006년 4월 추사작품 47점을 제주도에 기증하는 뜻깊은 일이 있었다.

/김봉현(제주불교사연구회·서귀포신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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