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교육박물관 ‘한국 불교미술과 제주불교’ 강좌 <13> - 제주불교의 형성과 전개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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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육박물관 ‘한국 불교미술과 제주불교’ 강좌 <13> - 제주불교의 형성과 전개과정
  • 승인 2006.11.02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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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불교조각, 동아시아 조각사 중요 역할

동양 삼국 중 화강암 불상·탑 우리나라 유일…마애석불 등 독특한 양식 형성

한국 불교조각 6세기 본격화…680년 전후 통일신라 새로운 조각 양식 등장

   
 
  삼국시대 불상은 7세기에 접어들면서 엄격한 정면 관조성에서 벗어나 조형적으로 크게 변모되기 시작한다. 그 대표적 예가 공주 의당 출토 ‘금동관음보살입상’(사진 왼쪽). 통일신라시대 긴장감 넘치는 육체미를 강조한 안압지 출토 ‘금동판 삼존불’.  
 


# 화강암 석불의 창안과 전개

우리에게는 석불과 석탑이 많다. 그것은 어느 나라보다도 석재가 풍부하고 재질의 견고성 때문에 수많은 전란 속에서도 훌륭히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도와 중국에서는 일찍부터 바위산을 뚫고 들어가서 예배 공간을 마련한 뒤 여기에 탑을 조각하고 불상을 조각한 이른바 석굴사원이 크게 유행했다. 석굴 내부는 법당과 불상·탑·비천상·공양상 등 갖가지 조각으로 가득 차 있어 무한한 경외심을 느끼게 한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석굴사원이 없다. 흔히 석굴암을 떠올리지만 석굴암은 바위산을 뚫은 석굴이 아니라 돌을 건축 재료처럼 잘라 다듬은 뒤 이를 짜 맞춘 것이다. 석굴암에서 보듯이 우리에게도 석굴사원을 만들고자 하는 의지는 분명히 있었지만 현재 남아 있지 않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우리가 석굴사원과 석불을 만들려고 했을 때 우리 주위에는 온통 화강암뿐이었기 때문이다.

동양 삼국 가운데 화강암으로 불상을 조각하고 탑을 세운 나라는 우리나라뿐이다. 화강암은 단단해서 조각 재료로서는 잘 사용되지 않는다. 인도에서는 편암이나 사암을 재료로 삼았고 중국에서는 석회암이나 사암을 재료로 삼았으며 일본에서는 특히 나무를 선호했다. 한 통계에 따르면 일본 조각의 90% 가량이 목조라고 한다. 편암과 사암, 석회암, 그리고 나무는 조각칼을 이용해서 일정한 양을 깎아낼 수 있기 때문에 재질은 다르지만 그 성격은 같다.

반면 우리는 석불을 조각할 때 굳기나 조각 방법이 전혀 다른 화강암을 재료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화강암은 경도가 강하고 입자가 굵기 때문에 조각칼 사용이 불가능하다. 대신 정을 대고 망치로 쳐서 입자 하나하나를 떼어내야 하므로 조각 방법과 도구가 전혀 달라야 한다. 더욱이 정으로 쪼아 내는 과정에서 한번 실수하면 회복할 길이 없으므로 자유로운 조각 행위가 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다. 때문에 복잡한 장식을 생략하는 단순화 과정을 거쳐야 하므로 사실적이고 정교한 조각이 어렵다.

석회암이나 사암은 굳기가 약하기 때문에 수많은 석굴사원의 굴착이 가능했던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화강암이라는 재료 때문에 그 열정이 마애불로 대체될 수밖에 없었다. 화강암 암벽을 인도나 중국처럼 깊게 굴착해 예배공간을 마련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대신 화강암 바윗면에 불상을 얕게 새긴 마애불이 크게 성행했는데 이 마애불 위에 목조 가구를 설치함으로써 석굴사원의 형식을 취하게 된 것이다.

곧 화강암은 어떤 면에서는 불상 제작과 석굴 조영에 제한을 가져다주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의 독특한 불상 양식과 마애 석불의 형식을 낳게 했던 것이다.

우리나라 화강암 석불은 삼국시대 6세기 말 내지는 7세기 초에 비로소 등장한다. 그것은 화강암을 불상의 재료로 선택하고 조각 기술을 개발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우리의 화강암 석불은 신라에서 꽃을 피워 8세기에는 석굴암 조각으로 대표되는 세계 조각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을 남기게 된다.



# 우리나라 불상의 흐름

삼국은 처음부터 서로 다른 민족 구성과 풍토성 및 지정학적 조건 속에서 각각 세 나라로 분립되어 형성되었기 때문에 불교문화의 수용방법도 서로 달랐다. 고구려는 372년에, 백제는 384년에 불교를 처음 받아들였고 신라는 이보다 150년이나 늦은 528년에 비로소 불교를 공인했다. 그래서 흔히 신라의 불교문화가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후진성을 면치 못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고구려와 백제는 왕실에서 불교를 받아들인 뒤 민중 속으로 서서히 확대된 반면 신라는 민중 속에서 불교가 확대되면서 어쩔 수 없이 왕실에서 이를 공인하게 된 것이다.

삼국시대 불교조각은 불교 전래 이후 5세기까지의 유래가 남아 있지 않아 그 전모를 파악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다. 서울 뚝섬에서 나온 조그마한 금동불에서 보듯이 삼국시대 5세기의 조각은 중국 불상을 직접 모방했던 시기로 추정되며 이러한 모방 단계를 지나 6세기에 이르면 불상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6세기는 한국 불교조각의 창세기인 동시에 한국적인 조형미가 발휘되는 시기로 삼국은 특정한 조각 양식과 도상을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이면서 이를 우리 정서와 미감에 맞게 취사선택했다. 특히 이 시기 불교조각은 금동으로 주조된 소형 일광삼존불(一光三尊佛)에 의해 주도됐는데 이들은 삼국시대 한반도에서 그 정형을 획득해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초에 걸쳐 크게 유행하면서 동아시아 조각사의 전개 과정에서 중요한 매개자적 역할을 담당했다.

도상적으로는 한반도에서 그 정형을 획득하게 되는 독립된 반가사유상, 백제에서 창안된 보주를 받든 관음보살상, 태안과 서산의 두 마애삼존불과 같은 독특한 구도의 삼존불 형식, 신라 지역에서만 유행했던 삼곡 자세의 여래입상 등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형식의 불상이 등장해 삼국 말기와 통일신라 초기까지 유행하게 된다. 이 가운데 반가사유상과 보주를 받든 관음보살상은 일본 고대 조각에도 영향을 주어 많은 유례를 남기고 있다.

재료면에서는 기법을 개발하고 발전시켰던 화강암을 재료로 한 석불과 석탑이 등장해 전 시대를 풍미하게 된다.

이러한 6세기 불상들의 조형 감각은 한마디로 엄격한 균형미와 세부의 예리한 맛을 통해 내면에서 발산하는 기세를 형상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이들 6세기대 불상들은 시대 양식은 같지만 조형성에서 다소 차이가 난다. 고구려 조각이 약동하는 힘 있는 조형이라면 백제 불상은 아름다운 조화의 미로 특징지을 수 있다. 반면 신라는 불상 양식의 전개 과정과 조형적 특징이 뚜렷하지 않다.

삼국시대 불상은 7세기에 접어들면서 정신성을 강조하던 지금까지의 엄격한 정면 관조성(觀照性)에서 벗어나 외형적이고도 불상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등 조형적으로 크게 변모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변화는 백제 말기 금동불에서 뚜렷이 나타나지만 도교가 득세하는 고구려와 상대적으로 유례가 부족한 신라에서는 그 변화과정이 뚜렷하지 않다.

7세기 전반기 조각의 이러한 양상은 백제 조각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대표적인 예가 공주 의당과 부여 규암에서 출토된 금동제 관음보살상으로 지금까지의 정신성을 강조하던 엄격한 정면 관조성에서 벗어나 늘씬한 신체와 율동적인 포즈를 통한 외형적인 형태미로 변모됐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예술 활동이 정치적인 상황과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정치적인 혼란기에는 창의력이 감퇴되고 예술 활동도 힘을 잃게 된다. 그러나 백제에서는 멸망 직전인 7세기 중엽에 조성된 불상들에서 일반적인 예술 사조에서 흔히 나타나는 말기적인 현상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난숙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어 흥미롭다.

신라는 당의 도움을 받아 삼국을 통일했지만 당 세력을 축출하기 위해 다시 오랜 전쟁을 겪어야 했다. 거의 20여년 동안 전쟁을 끝내고 통일신라 문화의 새로운 면모를 구체적으로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680년 전후였다. 이에 삼국시대의 복잡한 문화 현상은 사라지고 중국의 성당(盛唐)문화를 전폭적으로 받아들여 새로운 문화를 꽃피우게 된다.

통일신라의 새로운 조각 양식 역시 통일 초기의 전환기를 거쳐 실질적인 통일을 완수하는 680년 전후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위엄이 서린 표정과 함께 신체는 알맞은 비례를 이루며 몸에 붙은 얇은 옷자락으로 신체의 굴곡과 양감이 뚜렷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예술에서의 아름다움과 생명력은 정신성과 육체미의 조화에서 오는 것이다. 이처럼 긴장감 넘치는 육체미를 강조한 조각 양식은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삼존불과 안압지에서 나온 금동판 삼존불에서 그 초기적인 양상을, 경주 감산사터에서 옮겨온 2구의 석불에서는 성숙된 모습을, 그리고 석굴암 조각에 이르러 완성미를 찾을 수 있다.

삼국시대 불상의 ‘기세’와는 전혀 다른 이른바 ‘생명의 호흡’이라는 신체에 충만된 내적 기운을 탄력적인 육체미를 통해 생동감 넘치게 표현하는 이러한 조형감각은 인도 굽타 조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같은 시기 중국의 성당 조각에서도 나타나지만 중국 불상들은 생명력이 느껴지는 탄력성보다는 비만화된 경우가 많아 세속적인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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