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불교인물열전<상운 김석윤 스님 (祥雲 金錫允, 1877∼1949)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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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불교인물열전<상운 김석윤 스님 (祥雲 金錫允, 1877∼1949) <上>>
  • 김봉현(제주불교사연구회)
  • 승인 2007.01.11 23: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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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제주불교 여명기 밝힌 ‘출가사문’

1894년 전주 위봉사 박만하 스님 은사로 출가

1909년 제주의병항쟁 주역…격문·통고사 초안

“김석윤 스님, 관음사 사적기 속 운대사” 주장 제기

관음사 서무 등 역임…법정사 항일운동 가교 역할



한때 불맥(佛脈)이 끊겼던 제주 땅에 불조(佛祖)의 혜명(慧命)을 이어 근대 제주불교의 여명기를 밝힌 출가사문이자 독립운동가인 석성(石惺) 김석윤 스님.

김석윤 스님은 1909년 제주의병항쟁의 주역이기도하다.

승려로서도 한라산 관음사 창건, 무오 법정사 항일항쟁 등 굵직굵직한 근대 제주불교 현장의 중심에 있었으나, 독립운동가라는 전력으로 일제의 일급 감찰 대상이었던 까닭에 당시 식민지 정권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불교계의 입장을 반영하듯 스님의 출가자로서의 행적은 오늘날까지도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최근 일각에서 김석윤 스님에 대한 관심의 고조는 제주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도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스님은 뒤늦게 1977년 항일운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정부로부터 독립유공 대통령 표창을,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기도 했다.

김석윤 스님은 1877년(고종14) 8월 23일 제주 이도리 38번지에서 태어났다. 본적은 제주 오라리 644번지. 광산(光山)이 본관이고 아버지 김창규와 어머니 김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이름은 석명(錫命)이고, 자는 근수(謹受), 법명은 종화(鍾華), 법호는 상운(祥雲), 호는 석성(石惺)이다.

어려서 박춘경과 장기찬에게 한문의 기초를 배웠고, 1887년 제주 광양 서재 김병규 문하에서 통감, 사서, 사략 등을 사사하고 1891에는 금강반야경을 마쳤다.

자라면서 불법에 깊이 심취해 있던 스님은 1894년 7월 15일 전주 위봉사에서 박만하(朴萬下) 스님을 은사 및 법사로 해서 출가, 사미계를 받고 몇 년간 수도하였다.

스님은 다시 해남 대흥사로 가 1년 동안 주운담(朱雲潭)스님 문하에서 1898년 2월15일에 내전 초등과를 수료하였다.

그러나 제주사회의 토호이자 대부호로 대대로 유학을 숭상하여온 스님의 가문에서는 집안의 장남이기도 한 스님이 불법에 귀의하는 것을 끝까지 반대했다. 이에 스님은 집안의 끈질긴 설득으로 1898년 1월 15일 잠시 귀향하여 제주 광양 서재 교사로 취임하기도 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임하고 다시 산문(山門)에 들어갔다.

스님은 그 후 1902년 1월 20일 경상남도 통영군 용화사에서 이동운(李東雲) 스님을 스승으로 사교과를 수료하였다.

그러다가 1902년 봄, 다시 귀향하여 연동촌 ‘문귀사숙’에서 훈장을 지내는 등 출세간(出世間)과 세간(世間)을 왕래하며 정진하였다.

스님의 나이가 31세가 되던 1907년, 일제는 마침내 고종황제를 강제로 양위시키고 대한제국의 군대마저 해산시켰다. 이에 전국 방방곡곡에서는 의병들이 들고일어나 구국 항쟁의 길로 나섰다.

1908년 한해에만도 전국적으로 1976회의 전투가 벌어졌는데, 해산된 대한제국 군대의 군인들까지 가세한 이 시기의 의병항쟁은 제주에서도 결코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제주의 경우, 면암 최익현선생이 의병을 일으켜 항거하다 붙잡힌 후 대마도에서 순국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한 의병들의 활동이 하나둘씩 알려지면서 제주 지역에서도 의병 항쟁의 움직임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면암 최익현선생은 1873년 고종 10년 흥선 대원군의 실정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린 일로 제주에 유배되었다가, 1875년 고종 12년 2월 방면되기까지 제주에 머무는 동안 제주의 지식인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끼친 인물이어서 그의 순국 소식은 그 반향이 컸다.

김석윤 스님 역시 1908년 전남 장성에서 의병활동을 하던 기우만과 긴밀히 연락하면서 일제에 항거할 뜻을 품고 있었는데, 1909년 2월 25일 제주군수였던 윤원구로부터 나라가 망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창의를 결심한 고사훈과 만나면서 김석윤 스님의 거사에 대한 의지는 급진전을 보게 되었다.

고사훈, 김만석, 이중심, 노상옥, 조병생, 김재돌, 양남석, 양만평, 한영근 등과 함께 제주군 중면 광양동 조병생의 집에서 항일 비밀결사 모임을 갖고 고사훈과 이중심을 의병장으로 추대한 후 3월3일 관덕정에서 일제히 거사를 일으키기로 결의한 것이다.

이후 그들은 제주성 밖 광양동의 대장간에서 무기를 제조하고, 황사평에서 군사훈련에 돌입하는 한편, 경서에 능한 김석윤 스님이 초안한 격문과 통고사를 제주 전 지역에 발통하였다.

통고사는 마을 이장들이 앞장서 예정된 시간에 주민들을 동원시키고, 불참하는 주민과 그들 소유 선박을 보고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는데, 특히 왜인을 타살해 백성을 편안하게 하겠으니, 몽둥이, 철포, 칼 등으로 무장하고 집결하도록 했다.

또한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이장의 삼족을 멸하겠다는 위협을 가해 마을마다 이장이 주도적으로 모병에 참여하도록 유도하였다.

이러한 통고사의 내용으로 보아 당시 일본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모임이 끝난 후 고사훈과 일부는 대정군 영락리와 신평리를 시작으로 의병 규합에 나섰고, 김석윤, 이중심 등은 제주군 중면을 중심으로 의병들을 규합하여 거사 당일에 힘을 합치기로 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기밀이 누설되어 의병장 고사훈 등이 현재의 안덕면 동광리 일대에서 일본경찰의 급습을 받아 총살되면서 거사는 물거품이 되었고, 김석윤 스님은 일경에 체포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김석윤 스님은 내란죄로 기소되어 광주지방재판소 검사국으로 송치된 후 10년 유배형을 선고받았다.

다시 대구 공소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스님의 속가 집안에서 재력을 총동원하고 제주의 유력한 유지들이 다방면으로 노력한 결과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나게 되었다.

대구 감옥에서 돌아온 1909년 7월, 스님은 안봉려관 스님이 한라산 새미털에 창건한 관음사에 곧바로 서무로 취임하였다.

최근 제주불교사연구회 등 일부에서 ‘운대사’라는 한 스님이 계셨는데 “오래 기다렸더니 이제야 본다” 하시며 봉려관에게 가사 한 벌을 내어주었다.’라고 기록된 관음사 사적기 속의 운대사가 바로 김석윤 스님을 일컫는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그 근거는 첫째, 김석윤 스님의 법호가 상운(祥雲)으로 당시 제주와 인연이 있던 스님들 중 운(雲)대사라 불릴만한 이가 달리 없었고, 둘째 근대 제주불교의 불씨를 되살린 관음사가 창건되자마자 곧바로 서무로 취임한 것은 스님이 이미 창건과정에서 남다른 인연을 맺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셋째 김석윤 스님이 1910년 1월 일제의 감찰을 피해 경상남도 통영의 용화사로 건너가 수선안거에 들어 있었을 때, 스님이 안거하고 있던 바로 이 용화사의 안도월 스님과 영봉 화상이 창건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름도 낯선 한라산 관음사로 불상과 탱화를 모시고 와서 봉안한 일 등의 정황에 비추어 볼 때, 관음사 창건 전후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며 등장하는 운대사는 곧 김석윤 스님을 일컫는다는 주장인 것이다.

다만 김석윤 스님은 독립운동가라는 전력으로 인해 일제의 지속적인 감시를 받고 있었던 까닭에, 식민지 시대 일제의 영향권 안에 있을 수밖에 없었던 근대 제주 불교의 역사에서 김석윤 스님은 은폐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여 있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용화사에서 수선안거를 마친 스님은 1911년 제주로 내려와 관음사 해월학원 교사를 맡게 되는데, 이 해에 산남의 법정악에는 법정사가 창건되었다.

1918년 무오 법정사 항일투쟁의 본거지였던 이 법정사의 사상적 토대 또한 김석윤 스님을 연결 고리로 해서 민족의식이 투철한 스님들이 운집하여 마련된 것인데, 이 항일 투쟁의 주동자로 알려진 김연일 스님, 강창규 스님, 방동화 스님의 역사적 만남의 중심에 김석윤 스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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