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고자선화 보살 법당·움막 등 짓고 창건
주지 종호스님, 1990년 부임후 중창불사 이뤄
신도회·거사림회·지장회·바라밀합창단 등 활동
“생활속 佛法 귀의가 곧 극락세계·행복한 삶”
예로부터 제석사는 지하 깊은 곳에서 샘솟는 석간수가 맑고 깨끗한 하천을 이루던 곳이다. 제석사의 지형을 보면 대웅전 뒤편에는 아직도 우거진 숲을 이룬 형세가 예전의 산세를 짐작케 한다. 그 예전의 사찰은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상상해 본다. 도량 앞으로 시원한 하천이 흐르고 뒤로는 나무들 속에 새의 지저귐 소리가 가릉빈가소리처럼 청량했을 것이다. 솔잎을 흔드는 바라소리며, 속세의 번뇌를 떨쳐버렸을 석간수의 한 모금 등 눈을 감으면 청정수행터였던 모습이 수채화처럼 그려진다.
그러나 제석사의 깨끗했던 하천은 개발에 밀려 구획정리 되고 오염이 심화됐다. 지금은 복개되어 예전의 그 맑은 하천의 모습은 아스팔트로 변모했다. S자형 앞길만이 예전이 하천이었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종각 밑으로 동방 지국천왕, 남방 증장천왕, 서방 광목천왕, 북방 다문천왕 등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이 지난 2004년 12월 봉안됐다. 고대 만물을 창조하는 제석천왕은 사람이 착한 일을 하면 복을 주고, 악한 짓을 하면 벌을 주는 등 중생을 다스리고 감독했다는데 오늘날 제석사 사천왕이 두 눈을 부릅뜨고 그 역할을 한다.
이후 연종스님, 광순스님, 광일스님 등이 주석했고, 제주시 영평동 연화사 종륜스님에 이어 관음사에 있던 종호스님이 1990년 5월 부임한다. 중창불사에 원력을 세운 종호스님은 부임 후 100일 기도에 들어간다. 중창불사를 그해 10월에 설계를 하고, 11월에 공사를 시작으로 3년간의 대불사에 혼신의 힘을 기울인다. 종호스님은 제주도에서 드물게 14억을 들여 대웅전과 제석당, 범종각, 요사채 등 중생을 깨우치기 위한 신심과 서원으로 중창불사를 이룩했다. 빗물이 떨어지던 돌담집은 3년의 중창불사의 큰 원력으로 현재의 장엄한 모습을 갖추게 됐다.
법당 내부에는 석가모니불이 주불로 봉안되고, 좌우 협시불로 문수·보현보살이 봉안됐다.
제석당은 ‘절오백’의 제주불교문화가 고스란히 남겨진 곳이기도 하다. 제석당 위치에 창건주 고자선화 보살이 석간수가 흐르는 앞에 움막을 짓고 기도를 했던 곳으로 그 당시 돌부처 3기가 그대로 있다. 오색천으로 둘러싸여 보호되고 있는데 제주시 회천동의 화천사의 돌부처처럼 비슷한 형상이다. 50cm정도 크기의 현무암 석상으로 자연스러운 표정이 특징이다. 1700년대 초 부임한 이형상 목사가 미신 타파를 목적으로 ‘절오백 당오백’을 부숴버릴 때 사찰의 형상은 없어지고 이 석상만이 남은 듯 하다.
이렇게 문화적 가치가 높은 제석사는 1991년 8월 전통사찰로 지정돼 문화재로 보호받고 있다. 순수 목재건물뿐만 아니라 제주도의 특이한 문화적 가치를 문화유산으로 가치를 인정했다는 뜻이다.
종호스님은 그동안의 중창불사에 대해 “출가자는 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갈 뿐”이라며 “마음을 비우고 출가자의 근본으로 돌아가 기도를 열심히 한 공덕으로 중창불사를 이룰 수 있었다”고 회상하는 눈빛에서 기도의 원력을 느낄 수 있었다.
신도들의 활발한 활동 뒤에는 종호스님이 있었다. 종호스님은 신도들에게 늘 “무엇이든 마음에 달려 있다. 가족에게는 부드러운 말과 마음을 가지고, 기도에 전념하면 자신의 업장이 소멸하고 그 공덕으로 피안의 세계에 갈 수 있다. 일상생활을 항상 부처님 말씀에 귀의하면서 생활하면 그게 곧 극락세계요, 행복한 삶”이라고 강조한다.
스님은 중생을 깨우치고 해원상생 발원하는 법고를 봉안하는데 중창불사 원력의 회향점을 세웠다. 심장을 울리는 저 깊고 깊은 큰북 소리를 통해 업력에 의해 살아가던 중생들의 삶을 원력의 삶으로 바꾸고자 한다. 세수 76세에 그 험난한 길을 다시 떠나는 스님의 회향길은 아름답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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