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불교 인물열전-상운 김석윤 스님 (祥雲 金錫允, 1877∼1949)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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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불교 인물열전-상운 김석윤 스님 (祥雲 金錫允, 1877∼1949) <下>
  • 김봉현
  • 승인 2007.01.25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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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정통성 회복, 민족혼 일깨운 ‘선각자’

제주 최초 선원 개설…포교소 설립 등 다수 사찰 창건

김석익 ‘망형석성도인행록’, 禪師 김석윤 위상 입증



근대 제주불교 최초의 출가자라고 알려진 관음사 강창규 스님은 제주시 오등동 출신으로 1892년 전북 임실군 죽림사에서 출가하였는데, 그의 사미계사가 박만하 스님이었다.

박만하 스님은 김석윤 스님의 은사로서 김석윤 스님과 강창규 스님은 같은 스승 밑에서 불법에 귀의한 사형사제(師兄師弟) 간이었던 것이다. 속랍으로는 김석윤 스님이 연배이지만 입산 출가는 강창규 스님이 2년 앞섰는데, 불교의 맥이 끊겼던 같은 제주 출신으로 같은 스승 밑에서 출가한 두 분 인연의 각별함이야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는 일이다.

무오 법정사 항일 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강창규 스님이 관음사에 있을 때 출가하기 전의 방동화라는 처사도 함께 머물고 있었는데, 방처사는 서귀포 하원의 한문사숙에서 김석윤 스님에게 한문과 불교지도를 받은 제자였다.

관음사에 처사로 있으면서 강창규 스님과 가까이 지냈는데, 그가 1913년 기림사로 출가한 것은 김석윤 스님과 강창규 스님의 은사인 박만하 스님이 당시 기림사에 주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방동화 스님은 기림사에서 훗날 무오 법정사 항일 운동을 일으킨 김연일 스님을 만나게 된다. 한 소식을 얻었다고 할 정도로 불법에 정통하고 법문에 능한 김연일 스님은 이미 이곳 기림사에서 항일 운동가들과 비밀리에 교류하고 있었는데, 자신과 사상적 공통점이 있음을 발견한 방동화 스님은 관음사에 연락하여 김연일 스님을 초빙하도록 주선하였다. 이런 연고로 관음사로 오게 된 김연일 스님은 대중강연에 능하여 신도들의 환호를 받았으나,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오직 제주 불교의 부흥만을 염원하며 순수불교를 지향하던 안봉려관 스님과는 지향하는 바가 달랐다. 이에 1911년 법정사가 창건되고 1913년 김연일 스님이 그곳의 주지로 취임하게 되자, 당시 민족 사관이 투철하던 스님들이 대거 그곳으로 모여들게 된 것이다.

그러나 김석윤 스님은 당시 일제의 감시를 피해 제주를 떠나 1912년에는 부산 동래의 범어사에서 오회현, 박만하 두 선사에 의지하고 있었고, 1916년에는 위봉사에서 수행하며 비구계를 받았으며, 같은 해 6월에는 다시 범어사 오회현 강백을 스승으로 대교과를 수학하였다.

그러던 중 제주에서는 무오년인 1918년 우란분절 행사를 맞아 법정사 스님들이 주동이 되어 항일 투쟁에 나섰다가 총칼로 무장한 일본 경찰에 쫓겨 체포되고 법정사마저 폐사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3·1운동 5개월 전에 일어난 단일 지역 최대의 무장항일운동인 이 법정사 항일투쟁 결과 주동자인 김연일 스님이 10년 징역형을 언도받았고, 수형자가 33명, 체포된 사람이 68명, 가담자가 수백 명에 달하였다.

이 사건의 영향으로 김석윤 스님은 더더욱 제주로 귀향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 전국의 선방을 돌아다니다 1930년 2월 3일에는 위봉사 말사 청련암에 감원으로 취임하기도 하였다. 김석윤 스님이 고향으로 돌아온 것은 1934년에 이르러서인데 같은 해 4월 8일에는 범어사 제주 포교소 월정암 감원을 맡아 제주 최초의 선원을 개설하기도 하였다.

당시의 불교 시보는 “제주읍 오라리 656번지의 2대지 400여 평 된 기지(基趾)에 제주선원 월정사라는 1지방 분원을 창립하고 소화 13년 9월 16일 오후 2시 반에 낙성 겸 창립식을 500여명의 남녀신도 운집리에 거행하게 되었는데 경성에서는 위의 법인 대표로 서무계 부원 최응산씨를 파견하여 참석하게 된 바 제주에 불교가 수입된 후로 선원이 신설되고 선을 보급하게 되기는 이번이 최초이다”라고 전하고 있다.

이후에도 스님의 활동은 계속되어 1939년 3월 1일에는 위봉사 제주 표선면 포교소를 설립하고 감원으로 취임하였으며, 1941년 5월 20일에는 위봉사 하례 포교소, 1942년 4월 8일에는 관음사 평대 포교소를 설립하여 감원을 맡는 등 도내의 여러 사찰을 창건하였다. 이때 신도 중에 양붕진, 양계초, 송태욱, 이두생, 변호찬, 양원하 등이 독립군에 참여할 것을 모의하다 체포되어 그 중 변호찬, 양원하 등이 고문 끝에 옥사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김석윤 스님은 그 배후에서 지도한 혐의로 구속되었지만 21일 만에 방면되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불교계는 일제에 의해 왜곡되어온 한국불교의 정통성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에 나섰고 제주에서도 제주불교혁신회가 발족되며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자는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 결과 스님은 1945년 10월 15일 관음사 소림원 감원으로 취임하고, 같은 해 12월 3일에는 제주교구 고문으로 위촉되면서 남은 생을 불교의 정통성을 회복하는 사업에 전념하였다.

1946년 5월 1일 김녕 백련사 주지를 맡아 활동한 것을 마지막으로 김석윤 스님은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한 불자로서의 사명을 마감하고, 끝끝내 집안의 장남을 기다려온 가족들의 품에 인도되어 1949년 8월 26일 오라리 자택에서 입적하였다.

스님의 입적 후 그의 속가 동생인 심재 김석익은 김석윤 스님의 행장을 정리한 ‘망형석성도인행록((亡兄石惺道人行錄))’을 썼는데 스님의 불교이력이 일부 언급되었고, 이 행장 뒤에 발문의 형태로 당시 관음사 문도 대표로 오이화·오한일 두 스님의 공동으로 쓴 추도사의 맨 앞머리에 이렇게 쓰여 있다. ‘석성선사(禪師)의 깨달은 영혼은 석장(錫杖)을 내려놓으시고…’ 그렇다. 선사 김석윤. 스님은 불문의 문도들이 추앙할 만한 출가사문이자 격동의 시대에 민족의 독립을 위해 살다간 훌륭한 지식인이었다.

스님의 묘는 오동동 병문천 서쪽에 있고, 제주시 사라봉 남쪽 기슭에 김석윤 스님 등 제주의병항쟁의 주역들을 추모하는 ‘의병항쟁기념탑’과 모충사(慕忠祠)가 세워져 도민들의 숭앙을 받고 있다.



/제주불교사연구회·서귀포신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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