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불교 인물열전⑩-강창규 스님 (姜昌奎, 1878∼1963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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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불교 인물열전⑩-강창규 스님 (姜昌奎, 1878∼1963년경)
  • 김봉현(제주불교사연구회)
  • 승인 2007.02.08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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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사 항쟁 이끈 ‘근대 제주불교 최초 출가자’



1878년 제주읍 오등리 출생…1892년 죽림사에서 득도

법정사 항쟁 주도…행동부·참여자 등 지휘한 선봉대장

옥고 후 서산사 창건…1963년경 도량 바닷가에서 입적



   
 
   
 
일제강점기 제주도의 항일운동은 그 성격과 의의에 비해 널리 알려져 있지 못하다. 제주 3대 항일운동이라고 불리는 1918년 법정사 항일운동, 1919년 조천 만세운동, 1932년 제주해녀항일투쟁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항일투쟁사임에도 불구하고, 지역에서 일어난 것이라 해서 그 의미가 축소 평가되는 경향이 없지 않다.

그 중에서도 법정사 항일운동은 한일합방 이후 전국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무장 항일운동이라는 매우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1918년 무오년에 한라산 법정사에서 일어난 ‘법정사 항일운동’, 이날 항쟁에 지역주민 700여명이 대거 참여했으니 그들이 진정한 주역이겠다. 그러나 그 중심에 강창규, 김연일, 방동화와 같은 항일승려들이 있었기에 비록 거사를 이루진 못했으나 외세에 맞서 민족자존의 뜻을 만천하에 공포한 셈이다. 이 항일운동을 이끌었던 중심승려 중 근대제주불교 최초의 출가자 강창규 스님은 어떤 분인가.

제주출신으로는 근대 제주불교 최초의 출가자라고 알려진 강창규 스님은 1878년 제주읍 오등리에서 태어났다. 제주 땅에 불연(佛緣)이 끊기어 불법(佛法)을 목말라한지 근 200년이 다되어갈 때, 근대시기 제주인으로는 처음으로 속세의 옷을 벗고 가사장삼을 두른 것이 1892년 4월 8일이다. 얼마나 기다려왔던 날인가. 한 출가자의 탈속(脫俗)도 의미가 있지만 제주불교에 광명(光明)이 비춘 날이라고 하면 지나친 포장일까. 그렇지 않다. 뒤이어 김석윤, 안봉려관, 방동화 등 걸출한 제주인들의 출가가 이어졌으니 제주불교사에 영원히 남을 역사적인 날이라 할 수 있다.

강창규 스님은 이렇게 전북 임실군 임실면 죽림사에서 박초월 스님을 의지하여 득도하였다. 출가 이듬해인 1893년 하안거 해제일인 7월15일에 죽림사에서 박만하 스님에게 사미계를 받았다. 1905년 7월 15일 경상남도 하동군 칠불암에서 수선안거를 성만하고, 같은 해 강원도 건봉사에서 이보운(李寶雲) 스님 문하에서 사미과 및 사집과를 수료했다.

이후 봉려관 스님과 김석윤 스님 등에 의해 한라산 관음사 불사가 원만히 진행될 무렵, 강창규 스님도 귀향하여 관음사에서 수행하게 된다. 관음사 서무와 관음사 해월학교 교사를 맡은 김석윤 스님과는 박만하라는 같은 스승을 모신 사형사제(師兄師弟)지간이었기에 두 스님은 매우 각별했다. 이때 관음사에는 방동화라는 처사가 함께 있었는데, 두 스님의 권유로 박만하 스님이 당시 주석하던 경주 기림사로 방동화를 보내어 출가케 하였다.

당시 기림사에는 훗날 법정사 항일운동의 주역이었던 김연일 스님이 민족사상이 고취된 독립운동가들과 비밀리에 교류 중이었다. 1913년 기림사에서 출가한 방동화스님은 김연일 스님의 사상과 정신을 흠모하여 그를 제주에 초빙하도록 관음사에 연락을 취하였다.

   
 
   
 
이런 인연으로 김연일 스님은 제주에 들어오게 된다. 그의 능통한 법문에 대중들은 환호하였다. 1911년 법정사가 창건되고 그로부터 2년 후인 1913년 김연일 스님이 법정사 주지로 취임하자, 당시 민족사상이 투철하던 스님들이 법정사로 대거 모여들게 된 것이다. 거사를 위한 비밀결사 장소로는 관음사보다 더 외진 곳에 위치한 법정사가 제격이었을 것이다.

드디어 거사가 개시되었다. 1918년 10월 6일. 주민 700여명으로 구성된 봉기군은 2개 대열로 나누어 호미, 낫 등과 간혹 총을 소지해 무장한 채로 제주도지청 서귀포지소를 향해 나아갔다.

수탈과 억압에 짓눌려 있던 봉기군의 기세는 대단하여 서귀포 서호리에서 잠시 경찰과 대치하였으나, 그 중 김연일 스님이 일부 봉기군을 데리고 중문주재소를 습격하여 일본경찰 3명을 포박하고 구금자 13명을 석방시켜 주재소를 파괴해버렸다.

그러나 곧 경찰지원군의 강력한 진압작전으로 항일 봉기군은 대열이 흐트러졌고, 상당수 지도자와 봉기군들이 체포되면서 거사는 이틀만에 막을 내리고 말았다. 그러나 김연일 스님이 그로부터 1년여, 강창규·정구용 스님등은 4년 동안이나 숨어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제주사람들의 대중적 지지가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1923년 <매일신보> 2월 18일자에 실린 강창규 스님 체포기사에 의하면 “강창규는 김연일 등과 공모해 400여 명의 주민들을 선동, 주재소를 습격하고 불질렀다. 사건이후 잠적했던 강창규를 제주도 상효리 화전동에서 체포했다”고 기록돼 있다.

강창규 스님은 당시 중문주재소 방화를 지휘한 혐의로 징역 8년을 선고받았다. 강창규 스님에 대한 기록은 일제가 사용한 ‘1918년 형사사건부’와 ‘1918년 수형인명부’ 등에 기록돼 있다.

강창규 스님은 옥고를 치른 후에도 일제의 치밀한 감시를 받아야만 했을 것이다. 그가 1951년 7월 20일에 직접 작성한 수행이력서에도 1905년 건봉사에서 사집과를 수료한 이후로 이렇다 할 활동내용이 없다. 25년이 지난 1940년이 되어서야 전북 임실군 임실면 죽림사에서 선시에 합격해 대선법계를 품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반세기 세월동안 일제의 지독한 감시가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스님은 1943년 제주도 남군 대정면 동일리 3161번지에 서산사(西山寺)를 창건하여 출가사문으로서의 마지막 행적을 남겼다. 그 뒤의 행적에 대해선 듣거나 확인할 길이 없다. 그의 친동생인 강수오(姜壽五)도 법정사 항일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고문후유증으로 1918년 12월 27일 옥중 사망하여 직계혈육이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제주불교사연구회가 그의 수행이력서에서 그의 본적지가 그동안 알려진 안덕면 사계리가 아닌 제주읍 오등리임을 찾아낸 것이 단서가 되어 전남 해남에 살고 있는 스님의 손녀 강인숙씨를 서귀포시청 관계자가 찾아내, 정부로부터 지난해인 2005년 8월15일 건국훈장 애국장을 고인께 추서했다. 그러나 손녀인 강인숙씨도 어렸을 적 해남으로 이사 온 후 할아버지가 바랑을 짊어 매고 가끔 다녀가신 기억 외에는 스님의 말년 소식을 알지 못했다.

근대 제주불교의 첫 출가자이자 법정사 항일운동의 주역인 강창규 스님. 현재 스님이 창건한 서산사 아래 바닷가에는 강창규 스님의 공덕비가 쓸쓸하게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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