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일터 우리 불자<부익재 광복회 제주도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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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일터 우리 불자<부익재 광복회 제주도지부장>
  • 이병철 기자
  • 승인 2007.06.11 12: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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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명예회복 평생 소임”



   
 
   
 
“이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애국지사들의 정신과 정열은 우리 민족 피의 역사요 혼의 역사이며 이 나라가 미래에 짊어지고 나아갈 방향입니다. 그래서 광복회제주도지부는 매년 독립유공자 발굴 및 표창, 순국선열 추모사업, 나라 사랑을 고취하기 위한 학생글짓기 행사 등을 개최하고 있습니다.”

1933년 생으로 일제치하를 거쳐 4·3 그리고 한국전쟁까지 역경의 세월을 살아온 부익재(74) 대한광복회 제주지부장은 “지금 우리가 이렇게 평화롭게 살수 있는 것은 애국지사들이 피 흘려 지켜낸 조국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며 애국의 혼을 되새겨야 한고 강조했다.

부 지부장의 아버지는 1932년에 일어난 제주도 농민조합운동과 우리의 말과 글을 가르치다 체포돼 목표형무소에서 2년 뒤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왔다. 갓난아기만 남겨놓고 남편을 여읜 부 지부장의 어머니는 부처님에 대한 기도의 힘으로 힘겨운 살림을 이어나간다.

부 지부장은 “조천읍 함덕과 대흘 경계부근에 ‘외꼴절’이라 불리는 사찰이 있었죠. 불공이 끝나면 밥과 떡을 주던 기억, 그리고 법당에 가보면 부처님이 저희를 살피는 것 같은 엄숙했던 분위기 였다”며 어렴풋이 추억을 떠올렸다.

매년 11월 조천항일기념관에서 ‘애국선열 합동추모식’을 거행하는 부 지부장은 “합동추모식에 4·3 당시 없어진 외꼴절이 함덕 덕림사로 옮겨왔는데 지금 덕림사 주지 휴완스님이 애국지사의 극락왕생을 발원하며 독경을 한다”며 이 또한 인연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어머니까지 지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는 등 부모를 여의는 아픔을 겪지만 부 지부장은 평생 동안 마음에 품고 있던 ‘왜 아버지가 옥사를 당해야 했는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그 누구하나 제대로 가르쳐주는 사람 하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갖은 노력 끝에 70년대 들어서 당시 판결문을 찾아 그제야 독립투사였던 아버지의 자랑스러움을 말할 수 있었다.

그렇게 부 지부장은 그때부터 애국지사에 대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며 그동안 제대로 애국지사 자손들이 명예를 회복하고 보상받기 위한 작업들을 추진해 나간다.

그는 12년 동안 노력 끝에 1997년 광복회 제주지부를 설립하고 초대 사무국장과 8년여 동안 지부장을 엮임했다. 그동안 그는 애국정신을 고취시키며 제주의 올바른 역사관을 정립하는데 일조해 왔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아직도 부족하단다. 부 지부장은 “일제강점기 시대를 건너온 애국지사의 가족들은 대를 이어 내려오는 가난과 소외를 경험했다”며 “단 한명의 애국지사라도 발굴해 포상 신청과 애국지사 묘비단장, 조천항일기념관 정비 등 할일이 많다”고 말하는 그에게서 아직도 일흔 중반의 나이에도 애국지사를 향한 일은 끝없는 진행형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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