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 노형동 aaaaa충혼각aaaa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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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 노형동 aaaaa충혼각aaaaa
  • 이병철 기자
  • 승인 2007.06.29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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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 佛法’ 한라산 품에 안은 ‘호국영령 안식처’



   
 
   
 
한국전쟁이 발발한지도 어언 57년이 흘렀지만 그 파란만장했던 시대상이 고스란히 투영돼 우리 사회의 뿌리를 다시 한 번 되새겨볼 수 있는 곳이 충혼각이다.

지난 25일 6·25 참전 등 현대사에서 나라와 민족의 안녕을 위해 목숨을 바친 호국영령들의 위패가 봉안된 충혼각(주지 설봉스님)을 찾았다. 영험이 깃든 한라산에 호국영령들의 기운이 맴돌기라도 하는 것일까. 구름이 순식간에 아흔아홉골을 감싸더니 다시 흩어져버린다. 호국영령들의 유족과 미망인 그리고 후손들이라면 한번 즈음 들러보고 참배했을 충혼각의 입구부터 이어진 산록은 속세의 번뇌를 잠시 내려놓은 수 있는 성불의 길로 통하는 듯 하다.

충혼각은 제주도에서 1956년 6월, 한국전쟁 이후 제주시 사라봉(現 모충사 근처)에 전몰군경 위패와 유골을 임시 봉안하기 위해 지은 게 시초다. 설봉스님이 부임하기 이전에는 관리자가 없어 비가 새는 등 관리가 허술했다. 그럴 즈음 당시 보림사 신도였던 백치선 보살이 1966년 사라봉 사라사에서 기도 중이던 설봉스님에게 부탁하자 그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설봉스님이 그 해부터 부처님을 봉안하고 매년 음력 3월 18일 입재, 20일 회향하는 ‘제주 전몰군경 합동위령대제’를 봉행하기 이른다. 관리가 엉망이던 이곳에 여법한 부처님이 모셔지고 호국영령들의 안식처를 찾아주는 위령제는 전몰군경 유족을 비롯해 미망인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타 종교 유족들도 있었기에 부처님을 봉안하는 것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스님은 “우리는 영가들이 극락세계든 천당에든 편안하게 잠들길 바랄 뿐”이라며 “종교를 초월해서 위령제를 지내드려야 하지 않는냐”는 설득에 타 종교인들도 수긍해나가기 시작했다.

초창기 충혼각은 그야말로 허름하기 짝이 없었다. 변변한 화장실 하나 부엌 한 칸 조차 없이 스님은 법당 귀퉁이에서 잠을 청해야 했을 만큼 장소가 협소했다. 그러나 신도들은 늘어나고 유족들이 편이 쉴 공간조차 없어 충혼각을 중창불사를 하려 했으나 사라봉이 공원부지로 묶여, 그 계획은 전부 물거품처럼 꺼져버리고 만다. 그래서 충혼묘지가 근처에 있고 납골당이 자리한 현 한라산 아흔아홉골에 대웅전을 옮기게 된다.

현 대웅전은 1990년 1월에 완공돼 사라봉에서 모든 것을 옮겨왔다. 한라산 자락에 터를 잡은 지도 어느덧 17년째, 올해로 ‘제42회 전몰군경 합동 위령제’도 여법하게 공양 올렸다.

스님은 “출가해서 보람이라면 전몰군경 인연으로 해서 매년 호국영령들을 위해 위령제를 모실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것”이라며 “이제는 각 기관에서 위령제를 모신다는 것을 알고 있을뿐더러 오롯이 이 길을 걸어 왔다는데 자부심을 갖는다”고 그동안의 소회를 비쳤다. 스님은 지금도 그러하고 앞으로도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여생을 마치고 싶다고 밝혔다.

스님은 호국영령들을 위해 부처님이 기도를 하라는 인연 따라 충혼각 살림을 맡게 된다. 그 덕분에 그 많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일까.

설봉스님은 6·25가 발발한지 딱 1년이 지난 1951년 6월 25일 강원도 전투에서 중공군이 쏜 탄알이 다리를 관통하는 부상을 당하게 된다. 스님은 ‘우리 부대가 전멸하다시피 했는데 온 산이 불바다였다’며 당시의 기억을 생생하게 떠올리고 있었다.

“총상 입은 다리를 지혈하기 위해 분대장이 헝겊탄띠로 내 다리를 감는 순간 적의 탄알이 분대장을 관통했습니다. 분대장은 바로 30m아래로 굴러 떨어졌고 ‘위생병…’하는 소리가 적의 포탄소리에도 선명하게 들리더군요. 분대장님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 한이 맺혔습니다. 분대장님의 이름이라도 알았다면 위패를 모시기라도 할 것을…, 단지 계급과 고향정도만 알뿐입니다.”

스님의 마음속에는 분대장을 항상 간직하고 있었다. 충혼각에 부임한 이유도 이처럼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무명용사들의 영혼들의 극락왕생을 발원하기 위함이 아닌가 싶다.

   
 
   
 
한편 충혼각의 대웅전 왼쪽에는 일반인들 1000명의 납골이 봉안되어 있다. 충혼각에서는 이들을 위해 매년 음력 9월 9일이면 ‘납골당 합동 위령제’를 봉행한다. 음력 9월 9일은 중국 민간의 중요한 전통명절인 중양절(重陽節)로 유주무주 영가들의 제사를 지내면 좋다는 날이다. 특히 이곳 납골당은 제주시에서 도시구역개발로 인해 화장된 무주고혼 영혼들이 절반가량 모셔져 있기도 하다.

어느덧 당시 40~50대이던 전몰군경 유족들은 세월의 부름을 받았고 미망인들의 머리에는 하얀 서리가 내려앉았다. 위패를 부여잡고 통곡하던 사람들은 하나 둘 떠나갔다. 반세기 세월의 흔적이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20대 절반이 한국전쟁이 언제 일어났는지 모른다고 하는 시대다. 젊은 후손들에게 호국영령들에 대한 애정은 예전만 못한 실정이다.

하지만 스님은 이곳의 관리인에 지나지 않다고 한다. 법당은 시청, 납골당은 양지공원에서 관리감독하기 때문이다. 또 이 지역은 한라산국립공원지역으로 중창불사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형편이다. 호국불교의 성지로 일반인들이 편안하게 드나들 수 있는 공원처럼 충혼각이 꾸며지길 스님뿐만 아니라 호국영령과 유족들도 모두가 발원하는 바람이다.

설봉스님은 올해 세수가 79세로 비극의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헤쳐 온 역사의 산 증인이다. 4·3 당시 토벌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는가 하면 한국전쟁에 참전해 부상당해 명예제대 하는 등 죽음의 고비도 수차례다. 충혼각에는 4·3 당시 자신을 고문했던 토벌대와 군경을 비롯 6·25군경, 월남 참전 용사 등 1000명의 호국영령들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스님은 오늘도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 시대가 빚어낸 아픔을 딛고 그렇게 80평생을 오롯이 화해와 상생이 온누리에 가득하길 발원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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