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불교 인물열전<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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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불교 인물열전<19>
  • 김봉현
  • 승인 2007.07.05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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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제주불교 주역 체계적 연구 필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불교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으로 출가자와 재가자라는 두 수레바퀴를 들 수 있다. 제주불교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해 9월 15일부터 지난달 15일까지 <제주불교신문>지면을 통해 제주불교를 이끌어온 역사 속 인물들 중 출가자 18인을 추려내 우선 소개해 보았다. 그것도 고려시대부터 근·현대시대까지의 인물들로 제한적인 소개가 이루어졌고, 또한 재가불자 인물들은 다루지 못한 극명한 한계를 보였다.

수레의 한쪽 바퀴와도 같은 재가불교 인물을 다루지 못한 것과,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아직 규명되지 않은 제주불교전래시기와 당시의 인물들, 즉 고려시대 이전 혹은 이후의 더 많은 불교 인물들을 발굴하지 못한 것은 풀어야할 과제로 남아있다.

여기에는 <제주불교사>라는 황무지 같은 연구 분야 탓도 있겠지만 필자의 게으름도 한 몫 했음을 고백한다.

지면을 통해 소개된 18인의 선지식만이 제주불교를 이끌어온 인물은 아니다. 제주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긴 궤적을 달려오는 동안 걸출한 출가자와 재가자들이 각자의 역사적·신앙적 책무를 다하면서 불법홍포에 매진해왔기에 지금의 제주불교가 존재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간 제주출신 혹은 제주에서 활동했던 출가자들에 대한 법문집은 틈틈이 소개돼 왔다. 그러나 치열하게 한 시대를 살다가 열반에 든 그들의 삶과 행장을 조명한 결과물은 아마도 필자가 속한 <제주불교사연구회>의 몇 편의 논문들이 전부가 아닌가 싶다. 그것을 지면을 통해 약 9개월 여 소개해왔다. 그 마지막 회로 가장 많은 불교 인물들을 만나볼 수 있는 20세기 초부터 해방공간까지의 근현대 제주불교를 살피면서 이 글의 연재를 마칠까 한다. 다시 한 번 정보와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제주불교계의 현실에서 역사 속 제주불교 인물들의 발자취를 살폈다는 점과 자료적 가치를 평가해주기를 독자와 불자들께 바랄 뿐이다.



◆20세기 초 제주불교=제주불교는 봉려관 스님의 출가와 관음사 창건으로 20세기 활동을 시작한다. 관음사 창건에 앞서 강창규 스님이 1892년에, 김석윤 스님이 1894년 전북 위봉사에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이들의 은사인 박만하 스님은 근대 초기 제주에서 활발한 포교활동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직 19세기 말 제주불교에 관한 구체적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어서 단편적인 사건들로만 알려져 있다.

민간에 스며들어 있던 불교는 생활에 밀접하게 결부되어 자연스럽게 19세기 민족사상과 이어지고 있었다. 오랫동안 제주의 도민과 아픔을 함께 해온 불교의 승려들은 법정사 항일운동과 같은 민족운동으로 외세 저항에 앞장서게 된다.

이러한 신앙형태는 제주불교의 독특한 모습으로 불교 지도자들에게 끊임없는 문제의식을 갖게 하였다.

제주의 근·현대 불교는 관음사를 모태로 전개된다. 관음사포교당을 중심으로 한 제주불교협회(1924) 활동을 통한 제주 불교의 의례와 신행 형태의 변화와, 제주불교연맹(1937)의 해방 전까지 활동으로 외형적인 성장은 물론 불교의 근본 사상을 정립시키고자하는 다양한 활동을 통해 제주도에는 90여 개의 사찰이 창건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은 불교계의 포교 열망과 일제의 효율적 관리 의지가 맞아떨어진 결과물이었다는 시대적 한계 상황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그 결과 1945년 제주불교혁신운동으로 친일을 반성하는 움직임이 모아지기도 했으나 제주4·3으로의 좌절을 거치며 정화라는 현대사의 아픔을 낳게 되었다.



◆1910년대 제주불교=관음사를 창건한 봉려관 스님과 김석윤 스님은 1911년 한라산 남쪽에 법정사를 창건하였다. 1912년에는 마용기 스님이 회천에 화천사를 창건했다.

관음사의 창건에 이어 제주에도 사찰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제주도 전역을 돌며 사찰을 창건한 봉려관 스님과 김석윤 스님을 비롯하여 안도월·강창규·방동화 스님 등은 1910년대 제주불교의 주역들이다.



◆1920년대 제주불교=1920년대 제주불교의 주요 관심사는 불교확장이었다. 1923년 관음사 주지 안도월 스님은 ‘불교연구회’를 구성하고 2주간에 걸쳐 전도를 순회하여 포교하였다.

이러한 활동에 힘입어 비로소 제주도 전역에 골고루 사찰이 창건되기 시작하는데, 관음사포교소(대각사)를 시내에 건립한 이후 고관사를 비롯하여 극락사·금붕사·무관암·용주사·산방사·원당사·원만사·용장사·서림사 등 10여 개의 사찰이 더 창건되기에 이르렀다. 이는 곧 1924년 11월 17일 제주불교협회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1930년대 제주불교=1920년대의 제주불교협회의 활동이 점차 부진해 지자 제주도 토착 불교세력들이 중심이 되어 다시 한번 불교활동의 활성화를 추진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모아내었다. 바로 1931년의 ‘제주불교임시대회’이다.

이 임시대회는 제주불교협회가 이회명 스님과 일제의 협조 하에 활동을 하였던 것과 달리, 관음사의 안도월 스님을 주축으로 하여 제주불교의 자생적 활동을 보여준다는 점을 주목할 수 있다.

제주불교는 이제 그간의 활동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즉 1930년대 제주불교는 그간의 활동과 세력 확장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통합기구로 가는 과정에 있었다. 30년대 중반에 들어 증가한 25개의 사찰과 각 사찰의 염불회·부인회 등의 신도조직이 활성화되었다.

불교확장에 자신감을 갖고 있던 안도월 스님은 임시대회를 열어 제주도 불교인들의 자발적 활동으로 제주도만의 통합기구에 대한 열망을 모아내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1936년 안도월 스님의 열반으로 일제의 심전개발운동으로 흡수되고 말았다.

일제는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대동아공영권이라는 논리를 내세운 이후 더욱 철저하고 교묘한 식민지 정책으로 주요자원과 노동력을 수탈하였다. 그러면서도 일제는 생활여건이나 교육정책을 비롯한 경제적 어려움을 개선시켜줌으로써 천황에 대한 보은 감사정신을 갖게 하기 위하여 30년대 중반 이후 심전개발운동을 실시하였다. 1930년대는 식민지 정책이 더욱 가혹하고 교묘해져 점점 희망을 잃고 좌절할 수밖에 없는 어려운 시기였다.

1936년부터 1938년까지 심전개발운동으로 제주불교계에서는 포교당의 건립 및 봉불식·가사불사 등이 활발히 행해지고 염불회·부인회 등 신도들의 조직이 활성화되었다.

또한 일반신도를 위한 정기 설교와 경전 강습이 이루어지는가 하면 재래불교의 미신타파를 위한 불사를 개최하고 법화산림을 설재하여 강연과 설교를 하기도 하는 등의 활동과 함께, 전쟁 참가자를 위한 무운장구 기원재를 거행하기도 하였다.

제주불교계는 상당히 고무된 분위기 속에서 미신성을 타파하고 불교 본래의 사상을 되찾고자 자주적인 사찰정화와 불교발전을 위해 활발히 활동하였다.



◆1940년대 제주불교=제주불교는 1940년대에 이르러 다양한 활동이 시도되었다. 이세진의 관음사 승가교육, 신홍연의 선농불교운동 그리고 해방직후 개최된 제주불교혁신승려대회는 제주불교계가 새로운 전환기를 맞았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제주4·3으로 모두 중단되어버렸다.

한국불교의 총본산건설운동에 자극받은 제주불교는 자체 교구를 건립하였다. 그동안 60∼70여개의 사찰들이 관음사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으나, 각각 소속 본사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법적구속력은 없으나 제주도의 지리적·인적 관계의 특성상 교구건립은 자연발생적으로 요구되는 것이었다.

제주불교의 내적발전과 강원설립의 발판을 다지고자 통일기구내의 체계적인 승가교육이 실시되었다.

오이화·이일선·이세진·조희영·이성봉 스님 등이 주축이 되어 관음사포교당인 대각사에서 이루어졌는데, 50여명의 학인을 배출해 내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1941년 비구 수계식을 끝으로 더 이상의 명맥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이후 전시체제로 바뀐 정세변화와 유명무실해진 불교연맹이 주요원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48년 제주4·3과 제주불교=제주 4·3 특별법에 따라 진행되어온 정부차원의 진상조사 결과에 의해 2003년 10월 제주4·3사건 진상 정부보고서가 확정되었고, 국가차원의 공식적인 사과가 있었다.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3만여 명의 주민이 희생되었으며 이들의 80%가 토벌대에 의해 학살되었다. 이는 이승만대통령의 강경진압에 의한 것으로 4·3은 국가의 공권력에 의한 인권유린으로 규정되어 한국 현대사의 최대 비극이었음을 규명하고 있다.

제주불교계도 4.3으로 엄청난 인적·물적 피해를 맞았다. 해방을 맞아 제주불교 교무원을 구성하고 의욕에 찬 활동을 계획하고 있던 제주불교의 주요 승려들도 대거 희생된다.

40년대 제주불교를 이끌던 대표적인 승려인 이일선 스님과 이세진 스님은 수장 당하였고, 근대 제주불교 활동의 중심이었던 오이화 스님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이외에 원문상 스님, 이성봉 스님을 비롯한 스님들이 토벌대에게 총살당하였다. 오늘날 제주불교의 인물난은 바로 제주4·3의 피해에서 기인하고 있다.

제주4·3으로 제주불교는 불교활동의 가장 기본 조건인 사찰과 인물의 막대한 피해로 근대 이전의 황무지로 되돌려져 버렸다. 이는 언제나 제주사회의 아픔과 기쁨과 함께 살아가던 제주불교의 모습이다.

제주불교사는 곧 제주의 역사이다. 제주의 역사가 시작되면서 전래되어온 불교는 제주도 사람들의 희망과 어려움을 함께 호흡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긴 여정의 고단함은 곧 제주민의 삶의 애환이었으며, 제주불교의 험난함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길고도 험난한 아픔을 이겨낸 제주불교는 현재 240여 개 사찰의 활동으로 제주사회의 버팀목이 되고 있다.

/제주불교사연구회·제주의 소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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