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에 남은 중국 성지순례기<上>-돈황 ‘막고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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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에 남은 중국 성지순례기<上>-돈황 ‘막고굴’
  • 김상식(불탑사 신도)
  • 승인 2007.07.05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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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보살 자비 충만한 세계 최대 ‘벽 예술관’



   
 
   
 
불탑사 성지순례단은 지난 6월 5일 중국 돈황 막고굴 참배를 위해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우루무치! 중국의 변방이어서 초라하지 않을까 하는 예상과 달리 중국의 서북부의 변화를 엿볼 수 있는 큰 도시였다. 우리가 우루무치 공항에 닿았을 때 비가 내린다. 1년 동안 거의 비가 오지 않는 곳이라 비를 맞으면 복이 많다는데 왠지 이번 여행이 더 기대된다.

돈황은 구법승, 상인, 병사들이 끊임없이 드나드는 실크로드의 천산북로와 남로가 갈라지는 교통의 요지이며 무역의 교차로로서 경제적 융성뿐 아니라 종교, 문화,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미쳐 돈황 예술을 꽃피웠다. 그 대표적인 흔적이 바로 세계적인 불교 유적지 막고굴이다.

막고굴은 서기 366년 전진시대 낙준스님이 수행 중 막고굴 절벽 위에 금빛 부처님이 나타나시는 현상을 본 뒤 석벽을 파서 굴을 만든 것이 시초라고 한다. 막고굴은 전진시대로부터 중화민국에 이르기까지 조성되고 보수되었는데 명나라만 전혀 조성되고 보수한 것이 없다.

그동안 수많은 승려와 조각가, 화가, 역경사, 시주들이 드나들면서 험난하고 황량한 사막 여행을 떠날 때 부처님의 가피로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원하고, 무사히 돌아온 사람은 무사귀환을 부처님께 감사하고 축원하며 부처님의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지극한 불심으로 굴을 팠다. 그렇게 하나, 둘씩 파게 된 크고 작은 굴의 수가 약 1000개 가량이 된다고 하여 천불동이라 불리기도 한다. 또 시대에 따라, 혹은 같은 시대라도 조성자의 신분과 재력과 선호도에 따라 크고 화려하기도 하고 아주 작고 단순하기도한 다양한 모양과 형식의 석굴들을 이루게 되었다.

그 규모를 보면 현재 735개의 굴이 있는데 발굴된 굴은 492개며 여행객에게 개방한 굴은 30여개 정도다. 또 막고굴은 벽화예술로 유명한데 그 수량이 거대하고 내용과 형식이 다양해 세계에서 가장 큰 ‘벽의 예술관’이라 한다.

   
 
   
 
막고굴에서 제일 유명한 17호굴은 왕원록 도사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그 경위가 재미있다.

왕원록은 청나라 군인으로 복무를 마치고 운남성 집으로 돌아오자, 늙으신 홀어머니가 내가 죽은 뒤 너는 꼭 불교를 믿으라는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셨다. 하지만 그 지역에는 불교를 배울 곳이 없어, 도교에 들어가 공부를 하여 도교 도사가 되었다. 그런데 꿈에 현장스님이 현몽하여 서쪽으로 나를 찾아오라는 계시를 받고, 멀고먼 막고굴에 와서 굴 청소를 하며 살았다. 16호 굴 청소를 하는데 벽화와 벽화 사이에 틈이 갈라져 있어 이상하다고 생각하여 벽을 두들겨보니 비어 있는 소리가 났다. 왕원록은 보물이 있는 줄 알고 흙벽을 뜯고 들어가 보니 보물은 없고, 경전과 문서들만 있었다. 그 중 2권을 돈황 높은 벼슬아치에게 선물로 주었으나 벼슬아치는 그 가치를 알지 못하고 던져버렸다. 그러다가 이 유물의 가치를 안 영국 탐험가에 의해 장경동에 있던 오랜 고서적이 유출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그 뒤 이 사실을 안 서구열강들이 와서, 많은 경전과 불상, 벽화 등을 훔쳐갔다. 우리나라 혜초스님이 쓴 ‘왕오천축국전’도 장경동에 있었는데, 프랑스 펠리오가 많은 경전과 함께 프랑스에 가져가 현재 파리 국립도서관 박물관에서 소장 되어 있다. 진열된 왕오천축국전 사본을 봤는데 붓글씨가 달필이어서 더욱 안타까웠다. 전체 5만여 경전 중 중국에 는 약 1만여 권 만 보존되고, 나머지는 외국에 있다. 서구열강의 문화 약탈이 얼마나 심했는지 상상이 간다.

328호굴은 막고굴에서는 조각상과 벽화가 아름답게 완전히 가장 잘 보존된 굴로 가치가 크다. 안타까운 것은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좌우 협시보살과 밑에 대칭으로 모셔진 공양보살상 중 한 분이 미국인 도굴범에 의해 미국 하버드 대학 박물관에 모셔져 있다.

   
 
   
 
96호 굴에 들어갔을 때는 ‘아’하는 탄성과 함께 까마득히 보이는 부처님 얼굴을 보기 위해 고개를 있는대로 젖혔다. 당나라 시대 만들었고 높이가 무려 35.5m나 되는, 막고굴에서 가장 큰 미륵부처님이시다. 대불전이라는 현판이 있는 9층 전각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는데 바로 이곳이었다. 우리는 예불 겸 반야심경을 독송한 뒤 다른 굴로 이동 했다.

돈황 석굴에서는 굴마다 천정과 벽마다 수천 수만 분씩 부처님을 그려 놓기도 하고 당시의 풍속도, 전설, 신화를 빽빽이 그려 놓았다. 그 중 148호굴에는 당나라시대 조성된 약 30m정도의 거대한 와불인 열반상이 모셔 있으며, 그 앞쪽 벽에는 아미타 변상도가 넓은 벽을 가득 채우고 있다. 아미타 변상도(경전 이야기를 그린 그림)는 햇빛이 잘 들어오지 않아 청동거울로 빛을 반사시켜 벽화를 그렸다고 한다. 굴에 들어갈 때 마다 느끼는 감동과 감탄이지만 다시 한번 부처님에 대한 간절함, 정성, 신심에 합장하지 않을 수 없다.

안내인을 따라 한 굴이라도 더 보려고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259호굴은 북위시대 조성된 굴로 법화경의 견보탑품의 내용에 따라 석가모니불과 다보불께서 나란히 앉아 계셨는데 너무나 친근한 모습에 나도 모르게 미소 짓게 했고, 유럽 사람들이 돈황의 ‘모나리자’라고 부르는 선정불의 신비한 미소 속에서 불보살의 자비가 가슴에 와 닿는 듯 했다.

막고굴에서는 세계 유일하다는 전나체(全裸體) 비천상과 가장 작고 아름답다는 비천상, 막고굴에만 있다는 기교를 부리듯 머리 뒤로 비파를 돌려 연주하는 판타비파 기악천녀도 등 다양한 비천상들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굴마다 벽화와 조각상들에 많은 낙서와 훼불 훼손 약탈 등 흉터처럼 남아 마음이 무척 아팠다. 거기다 굴속의 채색은 광선 온도 습기 이산화탄소 먼지 등에 의해 변색이 되기 때문에 굴속에는 조명 없어 안내자의 손전등에 의지하며 그 불빛을 따라 돈황 예술을 감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방문객이 많아 체온과 습기로 이대로 가면 모두 퇴색될 염려가 있어 5년 뒤에는 모든 동굴을 밀봉하고 다른 곳에 모형을 만들어 관광객을 받을 예정이라고 한다.

문화재는 인류 보편적 가치에서 존중하고 보호돼야 할 것이다. 그 지역에 맞는 문화유산은 민족의 얼과 역사, 문화 등이 집약돼 있는 상징물이다. 한나라의 문화재 소유권은 함부로 침탈할 수 없는 고유의 권리이기에 유출문화재를 찾아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흩어져 있는 막고굴 문화재들이 다시 태초의 모습을 간직하길 기대해 본다.



   
 
   
 
이번 호부터 김상식씨의 중국 성지순례기를 2회로 나눠 격주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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