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시 하원동 aaaaa원만사aaaa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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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시 하원동 aaaaa원만사aaaaa
  • 이병철 기자
  • 승인 2007.07.23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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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아픔 딛고 ‘생명 꽃’ 피운 청정 여법도량



   
 
   
 
서귀포시 하원동 소재 원만사(주지 정법스님)로 향하는 길. 장대 같은 장맛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길은 한치 앞도 구분할 수 없다. 계곡마다 폭포수 같은 물줄기가 천둥소리처럼 요란하다. 모든 길이 물로 넘쳐난다. 자욱한 안개속에서 겨우 원만사의 표지석을 발견했다. 시멘트 길을따라 1km를 달렸을까 원만사에 다다를 즈음 자동차 엔진소리가 요란해질 만큼 언덕이 가파르다.

원만사는 오름 같은 높이에 가운데가 움푹 패여 있는 지형으로 사방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어머니가 자식을 품안에 껴안은 모습이다.

창건 이래 3차례 걸쳐 중건한 현 대웅전은 93년에 낙성해 태평양을 바라다 보며 장엄하게 자리해 있고 그 아래로 공양간과 요사채가 소담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웅전 왼쪽 측면에는 삼성각이 자리해 이곳이 예전부터 산신기도가 유명한 곳임을 알 수 있었다.

법당에는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좌우 협시불로 문수·보현보살이 봉안되어 있고 그 아래는 손 한 뼘 정도의 아담한 불상이 눈에 띈다. 이 부처님은 방동화 스님이 굴에서 수행할 때 모셨던 불상으로 현 주지스님이 개금불사를 해 대웅전에 봉안해 오고 있다.

대웅전 앞으로 시선을 돌리니 졸졸 흐르는 물이 보인다. 한 목음 들이킨 그 맛은 이슬차처럼 달작지근 하다. 영실에서 내려오는 이물은 인근 마을주민들이 ‘이맹이물’이라 불려지기도 하고 ‘훔쳐온 물’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이 물에 유명한 일화가 숨겨져 있다.

방동화 스님이 이곳에 처음 숨어 지 낼 때 물이 나지 않아 걱정이었다고 한다. 당시 물은 나지 않고 습기만 남아서 촉촉이 젖어 있는 상태였는데 안봉려관 스님이 앞에서 목탁을 치면서 걷고 뒤에서 방동화 스님이 경을 읽으며 이 길을 걸어 내려오니 목탁소리를 따라 물이 졸졸 따라왔다고 한다. 그래서 이물을 훔쳐온 물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원만사는 산세가 참으로 좋다. 대웅전 왼쪽 거송에 기대서면 마라도부터 서귀포시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데 이내 모든 번뇌가 떨쳐지는 듯 하다. 그리고 그 소나무 밑으로 내려가면 원만사로 오는 옛길을 만날 수 있다. 원만사의 제 모습을 만끽하려면 이 옛길을 타고 오르는 것도 좋다. 계단에서 조금만 내려가면 마애불을 연상하는 기암괴석들이 즐비하다. 그리고 주변으로 거대한 나무들이 지켜 서 있어 곶자왈에 온 듯 작은 빛조차 허락하지 않을 만큼 자연이 살아 숨쉬는 곳이다.

천년 세월 한결같이 꿋꿋하게 서 있는 마애불은 헐벗고 가난한 민초들의 든든한 부처님처럼 보인다.

원만사는 방동화 스님의 발자취가 서린 곳이다. 방동화 스님은 1918년 법정사 항일운동 당시 좌대장으로 참여했다가 6년간 옥고를 치루고 나온 이후 서귀포시 법화사 복원불사에 동참했으나 일제의 감시는 스님을 자유롭게 놓아두지 않았다. 이에 1925년에는 범어사로 향하여 박만하 스님에게서 구족계를 받고 곧바로 금강산 마하연선원에서 수행정진하다가 다시 1929년 제주로 돌아와 이곳 하원동 산자락의 1평 남짓한 자연굴에 의지하며 수행하던 곳에 세운 사찰이 원만사이다.

그러나 1948년 4·3당시 원만사는 토벌대에 의해 사찰이 전소되는 운명에 처하게 되는데 당시 주석했던 양홍기 스님도 총살되는 비운을 맞게 된다. 이후 원만사는 4·3당시 잃어버린 마을처럼 폐허로 남게 된다. 역사의 혼란기가 잠잠해질 무렵 인 60년대 초 시룡스님이 부임하게 되는데 현 주지 정법스님이 당시 13살에 들어왔다고 한다. 시룡스님이 1972년 입적 후 정법스님이 주지 소임을 맡은 지도 어느덧 3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 세월동안 이곳의 여법한 도량을 만들기 위해 스님은 기도시간 빼고는 농부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어려운 절 살림을 꾸려나기기 위해서는 가시덩굴을 일일이 제거하고 그 가파른 곳에 감귤농사를 짓는 등 법복은 늘 땀과 흙 먼지로 범벅이 되곤 했다.

1987년 현 시멘트 길을 만들기 전에는 원만사를 오가는 옛길의 140여 계단을 오르내리며 다녔다. 집을 하나 지으려 해도 차가 다닐 수 없는 길이라 스님과 신도들이 일일이 모래와 시멘트를 지고 날라야 할 정도였다. 그렇게 스님의 손에 굳은살은 그동안의 원만사 역사를 설명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2000년에 서귀포시에서 하천 다리를 놓아주기 이전까지는 징검다리로 다녀야 했기에 요즘 같은 장마철이라면 며칠씩 발목이 묶이기도 했다. 그 흔한 전기도 87년에 도로가 개통되면서 들어왔다. 아직 마무리 되지 못한 일이 있으니 바로 물 문제다. 아직 수도가 놓여있지 않은 원만사는 영실에서 내려오는 물줄기로 사용하지만 여름철은 넘치고 겨울에는 그 물줄기가 마르기 때문에 문제다. 그래서 겨울에는 물탱크에 물을 저장해서 쓰지만 그 빨래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다.

“참으로 어려운 시절이었지요. 도로가 놓이기 전까지는 신도들이 쌀을 지고 수많은 계단을 넘어서 공양하고 기도하는 등 그렇게 어려운 삶을 살았습니다. 저 역시 매일같이 허름한 작업복을 벗어보지 못할 정도였죠. 그렇게 어려움을 극복하고 마련한 도량입니다.”

이처럼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여법한 도량을 가꿀 수 있었던 것은 스님의 노력이 게으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어떻게든 도움을 주시더군요. 절은 신심으로 되는 것이지 절대 욕심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1000원 지폐라도 속세의 돈과는 다른 가 봅니다”라며 모든 공덕은 부처님에게 있다고 말하는 스님에게서 청정함이 가득 배어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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