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 불교 중시 aaaaa선승의 혼aaaaa 면면히 이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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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 불교 중시 aaaaa선승의 혼aaaaa 면면히 이어져
  • /이병철 기자
  • 승인 2008.01.03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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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좌읍 하도리 금붕사는 1997년 11월 대웅전과 종각을 새롭게 완공, 구좌지역 불교포교 중심지로 자리잡고 있다.  
 
문주란섬과 철새도래지로 유명한 구좌읍 하도리에 자리한 금붕사(주지 수암 스님).

금붕사 일대는 고려시대 사찰인 돈수암이 존재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원진의 ‘탐라지’에는 ‘돈수암은 제주 동쪽 80리에 있다’고 기록돼 있다. 다만 언제 없어졌는지 기록은 없지만 이곳에 ‘단물’이 솟아났었고, 주변으로 취락이 형성되는 등 그 흔적들이 남아 있다. 단물은 사계절 솟아났는데 지역주민들이 제사나 고사를 지낼 때 반드시 이 물만 길어다 사용할 정도로 신성시 여겼다고 한다.

금붕사가 창건된 것은 1926년 10월 화주 김대승각 스님과 도감 이성봉 스님이 초가 법당을 세우면서 창건했다. 1928년 3월 일제의 사찰정책에 따라 화엄사 제주포교소로 설치 허가를 받았다고 한다.

2대 주지인 이성봉 스님은 민간신앙과 융화로 변색된 제주불교를 원래의 불교를 찾는 일이 우선이라고 판단, 불교의 근본정신을 전파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1932년 최정산 스님을 강사로 모시고 승려 교육을 실시했는데 당시 승려 교육에는 도내 학인스님들도 참석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1937년에는 51일 동안 법화산림 대작불사를 마련, 정법을 일으키기 위해 대대적 포교활동도 나서게 된다.

해방 후 조선불교혁신 제주승려대회가 1945년 12월 개최됐는데 그 중심에 이성봉 스님이 교무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왜곡된 불교 풍토의 정화와 일제잔재 청산에 노력한 스님으로도 손꼽힌다.

그러나 4․3의 광풍은 금붕사라고 빗겨가지 않았다. 이성봉 스님은 1948년 11월 토벌대에 의해 총살되고, 금붕사 역시 소실되는 비운을 맞게 된다.

이성봉 스님은 손재주가 좋아서 흙으로 1자 크기의 16나한을 직접 만들어 나한 기도를 많이 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법당이 불타면서 현재 전해지는 것은 ‘오백나한탱화’가 유일하다.

김대승각 스님은 수암 스님의 증조할머니이고 이성봉 스님은 외할아버지다. 그리고 3대 주지인 법인 스님은 수암 스님의 이모로 1950년에 취임한다. 이어 1966년 수암 스님이 주지 소임을 맡으면서 본격적인 복원불사가 시작된다. 1966년 명부전과 요사채를 건립하고 1978년 대웅전을 중건한다. 이어 1997년 11월 대웅전과 종각을 새롭게 완공, 구좌지역 불교포교 중심지로 우뚝 서게 된다.

대웅전에는 목조 건축물로 법당에는 석가모니불을 모셨고 좌우에 동자상 2위가 봉안돼 있다.

   
 
  대웅전에 봉안된 석가보니불  
 
1978년 대중전을 중건하고 난 후 일어난 일이었다. 스님은 풀칠 한 탱화를 잘 말리려 법당에 연탄불을 켜 놓고 그만 잠이 들어 버린다. 꿈속이었는데 한밤중에 비가 오고 오백나한이 서럽게 우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잠에서 깬 스님이 법당에 들어가 보니 온통 연기로 가득 차 있었고 마루에 불이 붙긴 했지만 다행히 긴급히 불을 끌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스님은 ‘내가 하나 잘못하면 신도들을 지옥의 길로 인도한다’는 깨달음을 얻고 자신과의 계를 꼭 지키겠다고 부처님께 다짐한다. 이때 신도들을 정법으로 인도해야 한다는 굳은 결심을 하게 된다.

스님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공부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지난 1979년 전라도 순천 태고총림 선암사 강원에 입학, 경전공부에 몰두하게 된다. 이어 한국방송통신대학 중국어과를 졸업한데 이어 당시만 하더라도 불편한 교통을 감수하며 전북 익산 원광대 동양종교학과에서 불교학을 전공하게 된다. 스님의 불붙은 학구열은 그칠 줄 모르고 제주대 중어중문에서 석․박사 과정까지 밟는 등 30년이란 세월동안 펜을 한시도 놓지 않았다.

그동안 스님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것은 신도회다. 사찰 내 행사 때마다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은 불심회(회장 이승옥)를 비롯 사회적으로 봉사활동을 펼쳐 온 등불회(회장 양기춘)는 제주태고원․제주양로원․군부대 등을 방문, 점심공양․성품을 전달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인 자비행을 몸소 실천하고 있다.

스님은 “제주불교의 포교 방향은 불교문화를 접목시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서귀포시 하원동 법화사는 ‘연꽃’을 통해 포교하고 있듯 사찰문화인 다도․요가․명상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는 스님은 “금붕사는 일출봉과 만장굴 중간지점에 있어 교통이 편리할 뿐만 아니라 철새도래지, 문주란섬 등 생태관광지역과도 인접해 아늑하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며 “이러한 지리적인 요소를 이용, 일반인들이 도내 사찰에서 하루 동안 머물면서 수행을 할 수 있는 명상센터를 건립해 관광과 불교를 연계한 수행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바람을 밝혔다.

일제강점기 왜곡된 제주불교의 근본정신을 찾고자 금붕사가 나섰듯 다시 제주불교의 홍포를 위해 노력하고자 포효하는 금붕사의 기운에 제주불교의 희망을 엿보게 한다.





인터뷰-금붕사 주지 수암스님

   
 
  금붕사 주지 수암 스님  
 
수암스님은 명실상부한 학승으로 손꼽힌다.

현재 한국불교 태고종 중앙교육원장과 동방불교대학부학장의 소임을 맡으면서 매주 수요일 ‘화엄경․금강경․승각학개론’을 강의하고 있다. 또한 제주불교대학에서 ‘법성계’와 제주대에서 ‘한자의 이해’ 과목을 강의 하는 등 24시간을 쪼개도 몸이 모자랄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또한 스님은 지난 2003년 6월부터 2004년 9월까지 정토신문(현 제주불교신문)에 ‘금강경 강의’를 연재했었다. 그 내용을 바탕으로 스님은 제주대 중어중문학과 안재철 교수의 문법풀이가 함께 수록된 ‘금강경’ 책을 올해 초 발간했다. 그리고 중국선종 사상 최고의 저술로 추앙받고 있는 ‘경덕전등록’에 수록된 게송의 시가형식과 선사상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도 취득했다.

스님은 “중국 언어학을 배우면서 현재의 불경 번역이 많은 오류를 범하게 된 사실을 알 수 있었다”며 “불경을 당나라 때 많이 번역했는데 그 당시 언어․문화를 모르고 번역하면 엉뚱한 해석이 되는데 이번 책에서 그 부분을 많이 고치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부지런한 습성 때문인지 스님은 “지금이 지나면 하루가 되고 하루가 모이고 한 달이 되므로 일은 미루지 말고 그 때 그 때 성취하라”고 늘 신도들에게 그날 일을 다음으로 미루지 말 것을 당부한다.

스님은 “요즘 불자들이 장례문제로 인해 타 종교로 개종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며 “절에 장례식장을 만들어 이 지역주민들에게 보시한다는 마음으로 개방하고 싶다”고 밝혔다.

“사찰은 돈에 목적을 두기보다 관용과 자비를 베푸는 곳으로 인식시키고 싶다”며 “절에서 기도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복지를 통한 포교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수암 스님에게서 붓다의 가르침을 머리와 가슴을 넘어 온몸으로 체화한 것처럼 뜨거운 법열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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