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년 ‘명맥 불교’ 종식시킨 제주불교 중흥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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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년 ‘명맥 불교’ 종식시킨 제주불교 중흥조
  • /강승오 이병철 기자
  • 승인 2008.01.31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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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불교 중흥의 중심 관음사, 관음사 100년을 말한다. <3>안봉려관 스님



1908년 관음사 창건 이후 도내 곳곳 불사 추진

회명 스님 등 대덕스님 초청, 불법홍포에도 매진

   
 
  봉려관 스님은 관음사 창건을 시작으로 도내 곳곳에 불사를 추진하는 한편 대덕스님을 초청해 순회 법회를 개최하는 등 제주를 불국정토로 구현하기 위해 헌신했다.  
 
조선시대 배불(排佛)정책과 1702년 이형상 목사 부임 이후 사찰 폐사 및 불상 훼철 등으로 제주불교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형상 목사 부임 후 200년간 명맥만 유지됐던 제주불교가 새로운 중흥의 시기를 맞게 됐는데 이는 1908년 안봉려관 스님의 관음사 창건에서 비롯됐다.

봉려관 스님은 관음사 창건을 시작으로 수많은 불사를 주도하며 제주불교의 중흥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 이 때문에 안봉려관 스님은 제주불교 중흥조(中興租)로 불린다.

봉려관 스님은 1865년 2월 14일 제주시 화북동에서 아버지 안치복(安致福)과 어머니 평산 신씨 사이에 차녀로 태어났다.

출가(1907년) 전인 1882년 같은 마을 출신인 현씨와 결혼해 슬하에 1남 4녀를 두기도 했는데 1899년 탁발 나온 스님이 건네 준 관세음보살상을 얻은 후 불교와 인연을 맺게 됐다.

봉려관 스님은 집안에 관세음보살을 모시고 정진하던 중 마을 사람 등으로부터 갖은 핍박과 고통을 받았으나 제주불교 중흥을 위한 집념과 의지로 이를 극복했다.

봉려관 스님의 수행에 관련한 기록들은 다양한 자료들을 통해 확인 할 수 있다.

1917년 김형식이 쓴 ‘유관음사기(遊觀音寺記)’, 1918년 3월 매일신보 기사 중 ‘제주도 아미산 봉려관의 기적’, 1937년 시인 이은상이 조선일보에 기고한 ‘탐라기행’, 진원일 스님이 1967년 ‘제주도지’에 기고한 ‘안봉려관 스님’ 등에 스님의 행적이 소개되고 있다.

당시 봉려관 스님의 지인인 진원일 스님은 봉려관 스님으로부터 직접 들은 말과 스님의 비문을 종합해 1967년 ‘제주도지’에 출가 전 봉려관 스님의 행적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36세가 되는 1900년 봄 동네 청녀들이 불상을 때려 부수고 협박하는 것이었다. 이를 피해 산천단에 가서 집을 짓고 관음정진 수행을 계속했다. 37세가 되던 1901년 비양도에 불상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비양도로 건너가려고 할 때 태풍을 만나 배가 침몰하게 되었다. 일심으로 정성스럽게 관세음보살을 불렀더니 의복과 버선이 젖지 않고 비양도에 무의식중 들어가 있었다. 비양도에서는 불상을 구하지 못하고 다시 산천단에서 6년 동안 처절한 자기 자신과 싸우며 고행하게 된다.』

43세가 되는 1907년 봉려관 스님은 수계를 받기 위해 전남 대흥사로 향하게 되는데 수계를 받는 과정에서도 설화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1918년 매일신보 기사 ‘아미산의 기적’을 인용하면은 다음과 같다. 『꿈에 백의 관세음보살이 나타나 말하기를 ‘전남 해남 대흥사를 찾아 그곳에서 삭발을 하여라’하고 사라진다. 이 현몽을 받은 봉려관 스님은 1907년 대흥사로 떠나 대흥사 조실 백취운(白翠雲) 스님에게 삭발을 간청했다. 그러나 조실 스님은 승려가 되려면 행자생활과 수행이력을 쌓아야 한다는 규칙 때문에 허락하지 않았다.

삭발을 못한 봉려관 스님은 며칠을 대흥사에서 머물던 중 한 암자에서 나병으로 신음하던 스님을 만나게 되었다. 스님은 대흥사 원주스님을 찾아 묵은 된장 한 동이를 부탁, 환자의 전신에 된장을 바르고 다시 재를 발랐는데 신기하게도 그 환자는 병이 완쾌됐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조실 스님은 봉려관 스님을 불러 감사의 뜻을 전하고 소원을 말해보라고 하자 봉려관 스님은 “200년간 침체된 제주의 중생을 구제하는 길에 선처를 부탁드린다”며 삭발염의 해 줄 것을 부탁했다.』

봉려관 스님은 1907년 12월 8일 성도절에 유장(宥裝) 스님을 은사로 청봉(淸峰) 스님을 계사로 출가 득도 하고 ‘봉려관(蓬廬觀)’이라는 법명으로 수계를 받았다.

우여곡절 끝에 수계를 받고 1908년 1월 5일 제주로 돌아온 봉려관 스님은 해월굴에서 기도 정진하며 대흥사에서 구해온 불상과 대흥사 조실 스님이 희사해준 시주금을 토대로 관음사를 창건하게 된다.

시인 이은상이 조선일보에 기고한 ‘탐라기행’에도 봉려관 스님 행적을 소개하고 있다. 기사에 따르면 “관음사는 안봉려관이라는 비구니가 창건한 사찰인데 안봉려관은 대흥사에서 수계를 받고 정월에 돌아와 포교를 하려고 했으나 주민들이 핍박이 극심해 ‘천지무가객 동서미정소(天地無家客 東西未定巢․천지에 집이 없는 손님이어서 마땅히 머물지 못하다)’는 몸이 되었다. 1910년 영봉화상과 안도월 처사 등이 육지에서 들어오면서 경남 통영 용화사의 불상과 각 탱화 등을 이운 봉안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봉려관 스님의 제주 불교 중흥에 대한 의지는 한결같아 누구도 따라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수행자로서 머무르지 않고 제주 전지역 불국토화가 스님의 목표였을 것이다. 도내 각처에 스님이 거치지 않은 불사가 없을 정도다.

1908년 아미산에 관음사를 창건 후 봉려관 스님은 김석윤 스님과 1911년 중문면 중문동에 법정산 법정사를 창건한다. 이어 봉려관 스님은 안도월 스님과 함께 1923년 제주시 원당봉에 불탑사을 창건했는데 초가 법당으로 지어졌다. 봉려관 스님은 1924년 제주시내 중심가(현 제주은행 본점 맞은편)에 관음사 포교소를 창건하는 등 전도에 걸쳐 많은 불사를 추진했다. 이어 봉려관 스님은 1926년에 구좌면 김녕리에 백련사를, 1932년에는 관음사 주지 안도월 선사와 함께 화주 고인경씨와 고효열 여사의 지원을 받아 월성사를 창건했다. 또한 봉려관 스님은 서귀포시 하원동 법화사 중창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는데 1921년 이회명 스님이 법화사에서 동안거 설법을 했다는 기록으로 미뤄 법화사 중창불사는 1910년대에 이뤄졌을 것이라 보인다.

봉려관 스님은 불법홍포와 불교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기 위해 육지에서 대덕스님들을 초청, 순회법회를 열었다. 당시 조선불교대회 법사인 이회명(李晦明) 선사를 통해 도내 순회포교를 다니며, 제주불교 발전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진원일 스님은 1967년 제주도지에 “그 당시 일반인들은 봉려관 스님 호칭을 ‘봉려관’ 이름을 부르고 불교도들은 ‘화주스님’이라고 했다. 일반사람에게 불교를 선전하여 신앙하게 하고 시주의 재물을 모아 절을 지었기 때문에 ‘화주’라고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화주스님’이란 표현에서 보듯 스님들도 화주의 역할을 맡아서 물질적 지원 등 도내 각 사찰을 창건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제주불교 중흥을 위해 헌신하던 봉려관 스님은 1938년 5월 29일 속랍 74세, 법랍32세의 일기를 끝으로 제주불교를 반석위에 올려놓고 다사다난했던 세상과의 인연을 내려놓게 된다.



5대 법손 혜전 스님이 전하는 ‘안봉려관 스님’

“봉려관 스님이 오늘날 제주불교 기틀제공

대덕 스님 초청 법연 위해 온갖 정성들여”

안봉려관 스님의 5대 법손인 혜전 스님(도남 보덕사 주지)은 “봉려관 스님은 묵묵히 활동하며 모든 불사에 말없이 지원했다”며 “이같은 기반 위에 불법을 전도를 마음껏 펼 수 있도록 함은 물론 제주불교를 바로 세우는 기틀을 제공했다”고 말했다.

혜전 스님은 “당시 불교와 무속이 혼재했던 상황에서 비구니로서 불법 홍포에 한계가 있었을 것”이라며 “정법 전도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백양사 만암 종헌 스님, 회명 스님 등 당대 유명한 대덕스님들을 초청해 전도를 순회하며 불법홍포에 나섰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혜전 스님은 만암 종헌 스님의 상좌인 백운 스님(부산 미륵사 주지)의 증언을 통해 봉려관 스님이 정법 전도를 위해 초청한 대덕스님들에 상당한 정성을 들인 일화를 소개했다.

백운 스님에 따르면 “은사 스님인 만암 종헌 스님께서 제주를 방문, 봉려관 스님을 만난 소감을 밝혔었다”면서 “봉려관 스님은 법문을 위해 육지에서 오신 스님들을 위한 방사를 실시했을 뿐 아니라 사찰에 머무는 대덕 스님들을 위해 온탕까지 시설할 정도였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전언했다.

당시 여건을 감안할 때 일반 가정은 물론 사찰에 온탕 시설을 갖춘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실정이다. 그만큼 봉려관 스님은 오로지 제주불교 중흥을 위해 대덕 스님을 초청, 법연을 열겠다는 의지가 강했고, 대덕 스님들을 위해 온갖 정성을 들였음을 엿볼 수 있다.

제주불교 중흥을 위한 봉려관 스님의 헌신이 오늘 제주불교를 있게 한 기틀을 제공하게 했다.

혜전 스님은 “봉려관 스님의 이같은 헌신은 법손들은 물론 도민들에게도 커다란 긍지와 신심을 불러일으키게 했고, 제주도를 정토화하는데 밑거름이 됐다”고 강조했다.

봉려관 스님 문하에는 화선, 대지월, 성혜, 길만, 원만 5명 제자가 있는데 현재는 입적했고, 제주불교 비구니 상당수가 법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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