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침에 이르는 길-대승불교의 지관수행법 - 천태의 지관 수행(17)
상태바
깨침에 이르는 길-대승불교의 지관수행법 - 천태의 지관 수행(17)
  • 제주불교
  • 승인 2008.12.23 18: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 천태원돈(天台圓頓)의 지관(止觀) 요령


《마하지관》의 원돈지관은 원교의 수행자를 위한 지관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원교 수행의 핵심은 원교의 법문에 ‘번뇌즉보리(煩惱卽苦堤)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이라고 설해져 있는 이상 지관법문에서도 본래 끊을 만한 번뇌도 새롭게 얻을 만한 보리도 없는 것이다.

《방편품》 ‘세간상상주(世間相常住)’의 게문이 표시되어 있는 것과 같이 세간상이 그대로 상적광토의 묘한 장엄이다. 거기에는 끊을 만한 번뇌도 새로이 얻을 만한 보리도 없는 번뇌 즉 보리로서 생활 그대로가 지관이고 수행이다. 일념불생의 마음을 깨달으면 고개를 수그리거나 손을 드는 것도 그대로 불도이고 지관이다.

이와 같이 원교의 지관은 지(止)도 아니고 관(觀)도 아닌 부지불관(不止不觀)이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작의 없는 현실생활 그대로가 절대지관이다.

이것은 원교에서 현실제법이 그대로 실상이라고 설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들이 꽃을 볼 때 꽃에서 3제의 진리를 파악하고, 소리를 들을 때 소리에서 3제의 묘리를 얻는다면 세상 인생은 전부가 진어의 나타남이 되고, 보고 듣는 모든 지혜와 경계가 절대 무한의 가치를 가지게 되는 것으로써 제법실상의 묘리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럼에도 번뇌를 끊지 못하고 이해에 그치는 것은 현실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기에 원교도 끊어야 할 혹(惑)으로, 견사혹(見思惑)과 진사혹(塵沙惑)과 무명혹(無明惑)이 상정되어 있다.

견사는 공적(空寂)을 격리하고, 진사는 화도(化導)를 장애하며, 무명은 법성에 미혹하는 것과 같다. 견사는 소연의 경계에 집착하여 공리를 장애하므로 이를 대치하는 것이고, 진사는 계의 내외 법문에 어두워 화도를 장애하므로 가관에 의해 이를 대치하는 것이며, 무명은 중도의 이치에 미혹하므로 중관에 의해 대치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3관(觀)에 의해 3혹(惑)을 끊는 것이므로 3혹을 끊으면 3지(智)를 얻는다.

즉, 공관에 의해 견사혹을 끊으면 일체지(一切智)를 얻고, 가관에 의해 진사혹을 파하면 도종지(道種智)를 얻고, 중관에 의해 무명혹을 없애면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얻는 것이다.

벌교에서는 3혹의 체(體)를 불상즉(不相卽)이라 하여 차례로 이를 타파하지만 원교에서는 3혹의 체는 하나로써 삼혹동시단(三惑同時斷), 삼지일시득(三智一時得)이라 한다.

더구나 이치 상으로는 끊어야 할 3혹도 없다. 그래서 원교의 수행을 ‘부단(不斷)의 단(斷)’이라고 하는 것이다. 부단의 단이란 3혹을 다 끊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전환하는 것을 말한다. 즉 번뇌를 바꾸어 보리하고 하는 것인데, 번뇌도 보리도 본성본구이므로 절대의 입장에서 보면 번뇌 즉 보리이며, 생사 즉 열반이므로 거기에는 끊어야 할 그 어떤 것도 없는 것이다.

미오(迷悟) 그 바탕은 하나인데 미혹하면 번뇌로 되고, 개오하면 그대로 보리로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교의 입장에서는 벌교와 같이 번뇌를 단제(斷除)하는 것이 아니라 삼천실상(三千實相)의 법체를 여실하게 알면 번뇌로 인정될 어떤 것도 없는 것이다. 이것을 단혹(斷惑)이라고 하는데 성덕본유(性德本有)의 법체에 눈뜨게 된 것이다.

이상으로 《마하지관》에 나타난 원돈지관에 대해 정리해 보았는데 원돈지관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장통별원(藏通別圓)의 사교(四敎)와 공·가·중 3관이 천태교관의 핵심이듯 장·통·별·원의 사교에 따라 지관도 사교지관으로 구분되는 가운데 원돈교상 즉 원교상에 철저하게 뒷받침되고 있다.

둘째, ‘부단의 단’이라 하는 원교라 할지라도 끊어야 할 번뇌가 있다. 즉 법성을 미혹케 하는 무명혹이다.

그러나 이때에는 무명 즉 법성이라는 이치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

셋째, ‘부증(不證)의 증(證)’이라 하는 원돈지관이라도 단계적인 위계를 설정하고 있다.

경론에 의해 오품위와 52위를 세우고 있는데 이때에는 6즉(六卽)이란 공·가의 계위척도를 가지고 재야 한다.

넷째, 닦아 올라 가야할 계위도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

바로 오품제자위를 거쳐 초주위로 진입하는 것이다. 초주위에 진입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성불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써 이것이야말로 천태지관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천태교관은 기본적으로 교리적 해석과 더불어 관심적 해석을 함께 하는 사교삼관이므로 선관과 교리의 통합이다.

이 가운데 원교와 일심삼관으로 이루어진 원돈지관법은 명실상부한 천태의 대표적 지관으로서 원융지관 또는 일승지관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원융적·일승적 지관법은 중국 선관에 획기적 전기를 마련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중국선(中國禪)은 오로지 선관계의 경전이나 논부에 의해 선관을 실수하였을 뿐이고 중국인의 입장에서 체계적으로 조직한 예는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당시에도 경론을 떠나 구체적인 선법을 보이고자 한 흔적은 다소 있지만 웅대한 교상 체계를 기반으로 하여 지관법문을 집대성하고 그 위에다 원돈법을 구성한 지관체계는 후대 중국 선관의 전형을 보였다고 할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