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단양 방곡사 회주 묘허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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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단양 방곡사 회주 묘허 스님
  • /정리=이병철 기자
  • 승인 2009.03.04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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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원을 기념해 ‘금강경 독송 100일 기도 및 10인 고승 초청 법회’를 진행하고 있는 제주시 오등동 오등선원(주지 제용 스님)은 지난달 28일 8번째 법좌로 충북 단양 방곡사 회주 묘허 스님을 초청, 법회를 봉행했다. 이날 묘허 스님은 법문을 통해 “육체가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 때 ‘참 나’를 발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법문 내용을 요약 정리한다.



“四相의 세계 닫아야 ‘본래 나’ 찾을 수 있어”

   
 
   
 
부처님은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에게 최초 법문을 설하고, 다섯 비구가 부처님께 귀의함으로써 승단이 구성됐습니다.

부처님은 다섯 비구에게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성법(四聖法)을 설했는데 부처님이 깨달은 후 최초로 설한 법문이라 하여 ‘초전법문’이라고 합니다.

초전법문은 모든 법문의 근본 진리이자 성스러운 진리라 하여 사성제(四聖諦)라하고, 우주 법계가 다하는 날까지 불법이 없어지지 않고 함께 굴러간다 하여 ‘초전법륜’이라고도 합니다.

부처님이 성불하신 후 이 사바세계를 보시고는 ‘아! 사바(娑婆)여’라고 하는데 이 말은 ‘이 세상 모든 것이 고통으로 이뤄져 있다. 참고 인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이다’라는 뜻입니다.

인간이 피할 수 없는 4가지의 괴로움은 생(生)․노(老)․병(病)․사(死)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노․병․사는 괴로움이지만 생은 축하할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태어남으로써 병들고 늙는 것이 바로 생에서 시작된다고 봅니다. 즉, 생이 노․병․사의 시작이고, 괴로움의 시작인 것입니다.

사고(四苦) 외에 삶의 과정에서 부수적인 괴로움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원증회고(怨憎會苦, 싫어하는 자와 만나야 하는 괴로움)․애별리고(愛別離苦, 좋아하는 자와 헤어져야 하는 괴로움)․구불득고(求不得苦,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오온성고(五蘊盛苦, 버리려 해도 버리지 못하는 괴로움) 등 4가지로 나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다음으로 추운 것, 더운 것, 배고픔 등의 괴로움을 말합니다. 이러한 괴로움은 바로 집착된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집착은 고(苦)의 원인입니다.

스스로의 집착된 생각에서 벗어나기 못하기 때문에 인간은 괴로움이 없는 이상의 세계를 추구하게 됐고, 이로 인해 종교가 탄생한 것입니다.

불교에서 강조하는 것은 멸도(滅道)입니다. 불교에서 도(道)는 팔정도(八正道), 육바라밀(六波羅蜜)을 통해 닦아나갈 수 있습니다. 팔정도와 육바라밀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방편이고, 깨달음은 도를 닦은 결과입니다.

멸(滅)은 모든 분별과 집착이 다 끊어진 반야의 상태, 열반의 상태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에 대해 부처님은 다섯 비구에서 최초로 설하셨고, 초전법문 후 21일 동안 7곳에서 9차례 《화엄경》을 설합니다.

그러나 중생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고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이 낙심해 있는 순간 문수보살이 “세존이시여, 과거칠불(過去七佛)도 부처님과 같이 깨달았지만 중생들의 근기가 짧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방편으로 대기설법을 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간청합니다.

그래서 12년 동안 중생의 근기에 맞는 쉬운 법문을 설했는데 그 말씀을 엮은 경전이 《아함경(阿含經)》입니다. 《아함경》을 통해 부처님은 인과의 이치, 원인 없는 결과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원리, 원인에는 반드시 결과가 따른다는 인과법을 설합니다.

《아함경》을 설한 후 중생들이 근기가 수승해짐에 따라 부처님은 8년 동안 《방등경(方等經)》을 설합니다.

《방등경》은 인연법입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연법에 의해 존재하고 멸한다는 내용입니다.

20년이 지난 후 비로소 부처님은 21년 동안 대승보살도를 설합니다. 이때 600부 반야경을 설하는데 ‘반야’는 지혜를 뜻합니다. 지혜를 증득해야 깨달음을 얻어 생사윤회의 이치를 깨달아 해탈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600부 반야경의 중심은 571번째 설한 《금강경》입니다. 《금강경》은 부처님과 공(空)사상의 제일인 수보리 존자와의 대화 내용입니다.

“마음은 본래 생사 없어 나고 죽음이 없지만 몸에 집착해 육체의 종노릇하며 업 짓게 돼”


“육체는 단지 지수화풍으로 이뤄진 형상일 뿐 六入處 길들여 본래진면목 찾는 종교가 불교”


공(空)은 모든 번뇌, 망상, 집착을 다 끊어버려야만 보살도를 성취할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그 가운데도 4가지 아상(我相), 인상(人相), 수자상(壽者相), 중생상(衆生相)을 끊어야만 성불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사상(四相)이 있으면 보살이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불자들이 사상을 끊어버리지 않으면 해탈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반야심경》에 ‘보리살타의 반야바라밀다(菩提薩陀依 般若波羅密多)’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서 보리는 각(覺), 즉 깨달음이고 살타는 중생을 뜻합니다.

   
 
   
 
보살이 되기 위해서는 4가지 집착을 버려야만 합니다. 첫째, 아상입니다. 나라는 생각, 내가 귀하다는 생각, 나에 집착하는 마음입니다.

둘째, 인상입니다. 너라는 생각, 남을 업신여기는 생각입니다.

셋째, 중생상입니다. 일체 모든 중생들의 생명 본질은 평등합니다. 하지만 중생마다 업이 다르기 때문에 업에 따라 인간으로 혹은 축생으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몸은 누가 보내서 온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지은 업에 따라 태어나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몸을 이끄는 것을 정신이라 하는데 이 놈을 바로 알고 가자는 것이 불교입니다.

일체 모든 중생의 생명 본질은 평등한데 몸이라는 육체에 뒤덮여 다른 생명을 차별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중생상은 남의 생명을 업신여기는 마음입니다.

넷째, 수자상입니다. 불교의 진리를 바로 알고 보면 내 몸은 시절 인연 따라 내가 쓰고 있을 뿐 본래 내가 아닙니다. 그러나 동서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은 몸을 내 몸이라고 말합니다. 이 몸은 본래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물질적 요소로 이뤄진 색신입니다. 이렇게 이뤄진 몸은 반드시 죽게 돼 있습니다. 이 육체를 부리고 이용하는 것은 ‘참 나’요, 주인공이자 본래면목인 것입니다.

이름을 붙이자면 ‘마음’입니다. 마음은 허공과 같아서 모양과 물질이 아니고 본래 생사가 없어 나고 죽음이 없습니다. 여여(如如)한 것이 ‘참 나’ 인데 우리는 몸에만 집착합니다.

중생들은 생사 없는 나를 착각해 육체에만 집착합니다. 일생동안 육체의 종노릇만 하고 업만 지어놓는 것입니다. 업이란 시절인연이 도래하면 다시 내가 돌려 받게 돼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업을 받기 위해 왔습니다. 그 업은 과거전생에 받은 것에서 끝이 아닌 다시 지어 가는 것입니다. 업은 과거 생각의 그림자요, 현재 실천한 업은 앞으로 내 인생의 모습입니다.

이렇듯 ‘참 나’는 불생불멸 하는데 육체에만 집착해 1초라도 더 살고 싶어하는 것이 생에 대한 집착입니다.

이 사상(四相) 가운데 산골짜기처럼 깊은 것도 있고, 덜 깊은 곳도 있는데 이 사상을 허물어 평야를 만들어야 그 가운데 ‘참 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보살이 되기 위해 사상을 없애려면 우리 눈앞에 보이는 형상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금강경》 사구게에서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가 다 허망하다 만약 모든 형상을 형상이 아닌 것으로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바로 볼 때 여래를 바로 볼 수 있고, 내 자성불을 볼 수 있습니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되어도 내가 ‘나’를 모릅니다. 우리는 육체만 알고 있습니다. 육체는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이뤄진 형상일 뿐인데 말입니다.

나를 유혹하는 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의 육입처(六入處)를 길들이고 ‘참 나’ 찾는 도구로 활용하자는 것이 불교입니다. 사상의 집착을 닫아 버려야 ‘본래의 나’를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참 나’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법당에 모신 것은 신앙의 대상일 뿐 부처님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법신은 그 육체가 깨달았던 그 자리, 우주 법계가 존재하는 진리, 그것이 곧 자성입니다.

《금강경》의 금강(金剛)은 단단하고 깨어지지 않은 지혜, 우리 마음에서 우러나는 영원한 지혜를 말합니다. 저 영원한 열반의 세계는 ‘참 지혜’ 라야 만 이를 수 있습니다.

육체가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만 ‘참 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묘허 스님은

지난 1943년 경북 의성에서 태어나 1957년 경북 상주 남장사에서 화엄(華嚴) 스님을 은사로 출가, 김천 청암사 고봉 스님 밑에서 경(經)을 익히고 1965년 통도사에서 월하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통도사 보광선원 등에서 11하(夏) 23안거를 성만했으며 ‘불교수행의 요제’와 불교설화집 ‘무명을 밝히려거든’, 선학입문서 ‘봄이 오면 풀은 절로 푸르리’ 등의 법문 자료집을 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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