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과 유물을 통해 본 제주의 역사와 문화 <1> - ‘고대 탐라의 고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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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과 유물을 통해 본 제주의 역사와 문화 <1> - ‘고대 탐라의 고고학’
  • 김현정 기자
  • 승인 2009.05.06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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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제주박물관 제8회 문화강좌 ‘유적과 유물을 통해 본 제주의 역사와 문화’ 강좌가 국립제주박물관 강당에서 개최되고 있다. 지난 1일 여섯 번째 강좌로 김경주 제주문화유산연구원 조사연구과장이 ‘고대 탐라의 고고학’을 주제로 강연했는데 강연 내용을 요약 정리했다.<편집자 주>








탐라, 해상 통해 주변국과 활발한 교류





   
 
   
 
고대 탐라(耽羅)에 대한 문헌기록이나 자료는 절대 부족하다. 그러나 최근 발굴조사를 통해 탐라의 실체 규명을 밝힐 수 있는 작업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고 있다.


2000년 이전에는 곽지패총 등의 유적을 통해 탐라시대는 기원전후부터 1105년까지로, 기원후 500년을 기준으로 전·후기로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인 정설이었다. 탐라시대 전기는 곽지리식토기, 후기는 고내리식토기로 구분해 왔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삼양동 유적 등이 발굴되면서 탐라시대를 초기·전기·후기로 구분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탐라시대를 구분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 있으나 여기서는 탐라시대를 탐라 성립기(형성기)와 전·후기로 구분해 시대별 사회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 1105년까지 명맥 유지





탐라 성립 이전 단계는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후 3세기까지다. 이 시기는 한국 고고학의 시대구분으로 살펴보면 초기 철기시대에서 원삼국시대에 해당된다. 당시 한반도 남부지역은 청동기문화(송국리문화)가 소멸되고 철기가 유입되기 시작했고, 남부지역은 진한·변한·마한 등 삼한(三韓)이 성립·전개되는 단계다.


탐라 성립기의 특징은 송국리문화를 수용해 주거지를 축조하면서 대규모 취락을 조성했다. 토기 형태에 있어서도 이전과는 전혀 다른 토기가 등장하고, 도구제작에서도 석기와 청동기 사용 비중이 줄고 철기로 대체됐다.


탐라 성립기 전기는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에 해당된다.


주거지 형태도 기존의 장방형계가 소멸하고 원형의 송국리형이 출현한다. 5∼6동 정도의 주거지가 복합세대단위로 구성되고, 취락내의 중심주거지가 뚜렷하게 확인되지 않아 신분계층의 불평등 수준은 미미한 것으로 나타난다. 대표적 유적으로는 한림읍 동명리, 용담동 먹돌로·용문로, 삼양동 유적 등이 있다.


탐라 성립기 중기는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1세기에 해당된다.


이 시대는 송국리형 주거지가 축조되는데 주거 공간이 생산·분묘·제의·생업·활동·폐기구역 등으로 구분된다. 취락내 중심주거지가 석벽 주거지 등 우월성이 강조되는 공간이 뚜렷하게 구분된다. 또한 전기에 비해 주거지 규모가 축소되는데 이는 세대단위별 주거가 뚜렷해짐을 의미한다.


지배자 주거지 중심으로 시설물이 집중 배치되고, 취락내 제의 및 분묘구역 등이 마련돼 사후세계 경외심이 증대됨을 알 수 있다. 대표적으로 안덕면 화순리 유적과 구좌읍 종달리·김녕리 유적 등을 꼽을 수 있다.


탐라 성립기 후기는 기원후 2∼3세기에 해당된다.


이 시대 또한 송국리형 주거지가 주를 이루는 가운데 ‘외도동형 주거지’가 출현한다. 외도동 유적을 통해 주거와 생산, 분묘공간 등이 구체적으로 공간분할된 대규모 계획도시가 등장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용담동 분묘유적을 통해서는 수장층이 등장했음을 알 수 있고, 경계석축은 취락 영역 등 수장층의 권위를 과시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배계층에 의한 취락 조성과 관리시스템이 가동되고, 최고조로 발달된 위석식의 지석묘와 대형 우물도 축조됐다. 철기가 확산되고 외래계 유물이 다량 유입돼 활발한 대외교류를 짐작케 한다. 대표적 유적으로는 외도동과 애월읍 하귀리, 용담동 분묘유적 등이 있다.


탐라 성립기 묘제의 변화를 살펴보면 기존 토광묘(삼화지구)에서 지석묘와 옹관묘가 집중적으로 축조(삼양동 유적)됐다. 특히 적석으로 묘역을 조성한 뒤 매장주체부와 옹관묘를 배치(화순리 유적)했다.


탐라 성립기 중기 이후 계층 분화가 이뤄지면서 각종 위신제와 주거지와 분리된 묘역이 배치돼 사후세계가 분리됐음을 알 수 있다. 산지항에서 출토된 각종 화폐를 통해 탐라 성립기 제주는 중국과 한국, 일본을 잇는 해상루트를 통해 활발한 교역을 펼쳤음을 알 수 있다.





   
 
  국립제주박물관 제8회 문화강좌 ‘유적과 유물을 통해 본 제주의 역사와 문화’강좌가 개최되고 있다. 지난 1일 여섯번째 강좌에서 수강생들이 청강하고 있다.  
 





탐라시대 전기는 4∼6세기로, 마한과 활발한 교역이 이뤄지는 시기다.


이 시기는 대규모 취락간 상호위계를 형성했는데 상위의 중심 취락은 취락간 네트워크 속에서 전체를 통제하는 시스템으로 변화됐다. 탐라 성립기 후기 보다 석축규모가 더욱 견고해지는데 이는 방어적 목적은 물론 내부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탐라 성립기 중기 이후 급속하게 진전된 계층구조의 불평등화가 이 시기에 최고조에 이른다.


대규모 취락의 최고위층인 유력자들이 성장하면서 대외교류과정에 개입하고, 장악하면서 부를 축적해 탐라의 핵심세력으로 성장해 나간다. 이들은 대외교류를 통해 다양한 선진문물을 탐라의 하층민에게 재분배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 4∼6C 小國체제로 전환





탐라시대 전기 취락구조는 중심취락 주변으로 크고 작은 취락이 급속히 증가했는데 이는 인구증가를 의미한다. 확실한 주거구조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지만 중문동 성천포 유적을 통해 송국리형 주거지의 전통이 잔존하는 원형계로 추정되고 있다.


묘제는 위석식으로 최고조로 발전된 지석묘가 축조됐다. 용담동 유적에서 알 수 있듯 옹관묘가 지속적으로 축조돼 대외교류를 통해 얻은 선진문물을 묘역에 매납해 피장자의 지위를 과시하고 있다. 아직까지 확인된 유물이 없지만 탐라수장층 묘역에 마한계 묘제가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탐라시대 전기는 제주 전역이 적갈색외반구연호(赤褐色外反口緣壺)의 곽지리식 토기문화권으로 단일화된 시기이나 원저단경호·조족문토기·이중구연토기·양이부호 등 마한계 토기도 유입됐다. 곽지패총 5지구에서 출토된 양이부호는 동체부가 원형보다 편구형에 근접하고, 저부형태 역시 원저보다는 평저와 원저의 중간 형태이며, 태토는 적갈색연질로 조성돼 전남 장흥 지천리에서 출토된 양이부호 보다 선행되는 4세기 유물로 추정되고 있다.


탐라시대 전기 도구의 변화를 살펴보면 철기 사용이 증대되고 식량처리구는 탐라 성립기 후기의 석기조합과 동일하다.


탐라시대 전기 사회는 대규모 패총이 등장(종달리·곽지리)하고 유적수가 급증해 인구가 급격히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소규모 취락이 증가해 중심취락의 기능과 역할이 증대됐다. 최고조로 발달된 지석묘가 집중적으로 축조돼 노동력의 집약화와 지배층의 위상이 더욱 강화됐는데 이같은 일련의 사회적 변화는 탐라의 대내외적인 성장을 시사한다. 탐라가 대외교류를 통해 부를 축적한 지배계층을 중심으로 소국(小國)으로 전환됐다.


탐라시대 후기는 7∼10세기에 해당되는데 백제 및 신라와 교역이 이뤄지는 시기다.





# 10C 독립국 지위 상실





6세기 중반 이후 마한은 백제에 합병되는데 탐라는 무녕왕 때(508년) 백제와 첫 통교를 했다는 기록이 신빙성을 갖는다. 538년 백제가 사비로 천도하면서 성왕은 고토(古土) 회복정책을 펼침에 따라 병합된 마한 세력은 일본으로 망명하거나 혹은 그 일부가 제주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제주에 양이부호·조족문토기 등 마한계 토기가 출토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사비 천도와 함께 새로운 토기제작법이 개발되는데 탐라에도 백제토기 성형방법과 유사한 고내리식토기로 전환된다.


고내리식토기는 심발형토기로 저부와 동체부의 분할성형 후 접합한 점과 구순부를 실과 같은 날카로운 도구로 절단한 흔적 등 규격화된 사비토기의 구성과 유사하다. 백제토기의 제작과 같은 대량 생산 등 획기적인 변화 양상을 보인다.


백제와의 관계는 7세기 중엽 신라의 삼국통일로 인해 두절된다. 신라와 왜(倭) 등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탐라의 지배계층 노력으로 결국 탐라는 신라의 속국으로 편입되고 조공을 바치게 된다. 당시 유적으로는 용담동제사유적, 고내리유적, 종달리패총 5지구 등이 있는데 탐라시대 전기에 비해 유적이 축소되는 경향을 보인다.


또한 8세기 중엽 이후 고내리식토기와 사각편병 등 통일신라토기가 동반 출토됨에 따라 전형적인 고내리식토기의 완성시점이 8세기 중반임을 알 수 있다.


10세기 탐라는 고려에 조공을 지속적으로 바쳤고, 11세기에 들어 고려 현종에게 주군의 예를 갖추고 속국이 될 것을 요청했다. 이 단계 이전부터 고려 중앙정부의 직접적인 간섭을 받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10세기 이후 탐라는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한 것으로 추정된다. 10세기 이후 탐라는 독립적인 ‘국(國)’체제를 유지하기 어려웠고, 신라 혹은 고려의 간섭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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