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문화아카데미- <4> ‘초토화 배경과 피해실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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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문화아카데미- <4> ‘초토화 배경과 피해실태’
  • 김현정 기자
  • 승인 2009.05.13 18: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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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평화재단은 ‘4·3’ 61주년을 맞아 4·3의 역사적 의미와 현재의 4·3 상황을 조명하기 위해 ‘4·3문화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다. 다섯 번째 강좌가 열린 지난 9일 김종민 제주4·3위원회 전문위원은 ‘초토화의 배경과 피해실태’를 주제로 강연했다. 이날 강연 내용을 요약 정리한다. <편집자 주>








“이승만 정부·미국 무차별적 학살 책임져야”





   
 
   
 
토벌대는 1948년 11월 중순부터 1949년 2월까지 4개월간 중산간 마을에 있던 집집마다 불을 지르고 80대 노인부터 젖먹이에 이르기까지 무차별적으로 학살하는 ‘초토화작전’을 자행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9년 1월 21일 국무회의에서 제주4·3사건 등에 대해 ‘가혹하게 탄압하라’고 명령했을 뿐 아니라 모슬포·성산포경찰지서를 신설하고 서북청년회 단원들을 경찰과 군대에 편입시켰다.





# 강경작전, 공산주의 방벽


구축 위한 美 의지 반영





1948년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됐는데 계엄령은 참혹한 초토화작전을 뒷받침했다. 계엄령은 법률이 제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통령령만으로 선포됨으로써 ‘불법 계엄령’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가혹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4·3사건을 완전히 진압해야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는 미국의 원조가 가능하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는 미국과의 교감 속에서 강경작전이 이뤄진 것임을 암시한다. 미·소 냉전이 심화되는 가운데 아시아에 공산주의로부터 방벽을 구축하겠다는 미국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초토화작전의 배경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우선 초토화작전 전후의 국내외 상황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초토화작전이 벌어지기 시작한 1949년 11월 중순은 남북에 각각 정권이 들어서면서 분단이 고착화되는 시기이며, 그런 가운데 김구·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통일운동이 여전히 일어나고 있었다. 친일파는 국내 정치기반이 미약한 이승만에게 가장 큰 정치적 배경이었는데 국회에서 ‘반민족행위처벌법’이 통과됨에 따라 지배세력간 갈등이 일어났다. 또한 여수 14연대와 대구 6연대 장병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 국내적으로 매우 혼란했던 시기였다. 논란 끝에 국가보안법이 제정된 것도 이때였고, 미·소 냉전이 심화되면서 양군의 철수문제를 둘러싸고 논쟁도 벌어졌던 시기였다.


대한민국의 국제적 지위 역시 불안한 상태였다. 유엔총회 회기 중에 정부가 승인을 받을 수 있을 지도 불투명했고, 이런 와중에 1948년 9월 15일 김구와 김규식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유엔총회에 전(全) 한국 총선을 요구하는 서신을 보내 이승만을 더욱 곤혹스럽게 했다. 같은 해 10월 13일에는 소장파의원을 중심으로 한 47명의 국회의원이 ‘외군철퇴 긴급동의안’을 제출했다. 이미 9월 15일부터 미군 일부가 비밀리에 철수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미국은 12월말까지 주한미군을 모두 철수시킬 방침이어서 이승만을 더욱 초조하게 했다.


이처럼 이승만이 국내외적으로 곤경에 처해 있을 때 소위 ‘여순사건’이 발발했다. 미군의 작전통제 아래 10월 27일 여수가 탈환됨에 따라 사태는 8일만에 마무리됐다. 이승만에게 여순사건은 위기였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반대세력을 일거에 제거할 기회였다. 민심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사태를 사실대로 보고해야 했지만 이승만 정권은 오히려 사태를 과장했다. 또한 항간에는 김구가 여순사건의 배후라는 낭설이 도는 등 이승만에게 여순사건은 반대 세력을 물리치고 최대 정적인 김구까지도 궁지에 몰아넣을 호재로 작용했다.


해방정국에서 보여줬듯 이승만이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내세운 최대 이슈는 ‘반공’이었다. 권력다툼으로 이승만과 결별했던 우익정당 한국민주당(한민당)도 이 점에선 이승만과 이해를 같이했다. 군(軍) 내부에 숙군(肅軍)선풍이 불었고, 11월 2일 대구 6연대가 반란을 일으키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러나 6연대의 반란사건은 숙군의 속도와 강도를 높여줬을 뿐이다.


11월 20일 국가보안법의 국회 통과는 이같은 분위기 속에서 탄생했다(12월 1일 공포). 국가보안법 국회 통과 하루전인 19일 국회는 주한미군 계속 주둔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국가보안법은 ‘일제치안유지법의 재판’이다. 소장파 의원들은 ‘이 법률이 발포되면 안 걸릴 사람이 없을 것’이라며 반대했지만 ‘피를 한 포기 뽑다 보면 나락이 다칠 때도 있다. 그렇다고 피를 안 뽑을 수 있느냐’는 논리에 밀렸다.


2차대전 종전 후인 1947년 3월 12일 미국은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함으로써 미소냉전이 시작됐다. 이때부터 주한미군 철수 문제는 미국의 한반도 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현안이 됐다. 이는 미국의 소련봉쇄정책이 유럽에 집중됐고 한반도는 부차적인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중산간지대로 피신한 제주 사람들(1948.5, 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초토화작전 기간에는 어린이와 여성, 노인들도 무차별적으로 학살당했다.  
 







# 1948년 11월 중순 이후


4개월간 무자비한 진압






1948년 8월 15일 미군정이 끝나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선포되었지만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은 여전히 미군이 갖게 됐다. 이는 1948년 8월 24일 이승만 대통령과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장군 사이에 체결된 ‘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에 따른 것이었다.


한국군을 지휘·통제할 주한미군의 핵심으로 임시군사고문단(PMAG)이 전면에 나서게 됐다. 임시군사고문단은 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이 체결됨에 따라 1948년 8월 15일 일반명령 제31호에 의해 공식적으로 출범했다. 고문단장으로는 로버츠 준장이 임명됐고, 제주도 고문관으로는 버제스 대위가 임명됐다.


로버츠 고문단장은 미군이 완전 철수 때까지 주한미군사령관이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은 물론 미군 주둔에 필요한 기지와 시설의 지배권을 갖는다는 사실을 당시 이범석 국방장관에게 분명히 주지시켰고, 이범석은 1948년 10월 28일 국회 보고를 통해 ‘국방장관인 자신조차 군의 작전·지도를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말했다.


4·3 당시 로버츠 고문단장은 CIA, 송요찬 9연대장, 서북청년회를 주목했고, 이들을 강경 진압작전의 핵심으로 활용했다.


로버츠 고문단장은 “수많은 무고한 민간인들이 제주도에서 죽어갔다. 그들의 대부분은 게릴라의 공격으로 살해당했으며, 약간은 의심할 여지없이 한국군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미 정보국 고문관 리드 대위의 보고 내용을 첨부해 1949년 2월 7일 로얄 미 육군 장관에게 보고하기도 했다. 비록 한국군에 의한 살해도 부분적으로 인정했지만 ‘게릴라의 공격으로 대부분 살해당했다’는 보고는 왜곡됐다.


1948년 11월 중순경부터 초토화작전이 전개됐다. 초토화작전 이전에도 무분별한 살육이 곳곳에서 벌어지긴 했으나 그 강도와 희생 규모 면에서, 그리고 전 지역에 걸쳐 동시에 벌어졌다는 점에서 ‘11월 중순 이후’의 상황은 이전과 뚜렷한 차이가 있다.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된 것도 이 시기다. 1948년 11월부터 1949년 2월까지 4개월 동안의 초토화작전으로 대부분의 중산간 마을이 불에 타 사라지는 등 제주도는 그야말로 초토화됐다. 특히 11월 중순 이전에는 주로 젊은 남성들이 희생된 데 반해 강경 진압작전 때에는 토벌대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주민들을 총살함으로써 제주4·3사건 희생자 대부분이 이때 희생됐다.


초토화작전에 앞서 군은 소개령(疏開令)을 내렸다. 소개령은 다수의 도민들이 ‘폭도의 정신적 가담자’라는 전제 아래 주민들을 집단이주시킨 후 ‘보갑제’라는 연대책임식 주민감시체계를 구축해 일반주민과 무장대를 차단시켰다.


그러나 일부 중산간 마을의 경우 진압군의 소개령이 전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가옥을 방화하고 주민들을 총살했다. 또한 일부 중산간 마을에 소개령이 전달돼 해안변 마을로 소개해온 주민이라 하더라도 가족 중 1명이라도 사라졌다면 ‘도피자 가족’이라 하여 총살했다.





# G2보고서 “무장대 지원


가정 대량학살계획 채택”





지난 1992년 구좌읍 송당리 ‘다랑쉬굴’에서 유골 11구가 발굴된 사건은 제주4·3사건 당시 은신자에 대한 무분별한 작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확인 조사결과 이들은 1948년 12월 18일 제9연대의 진압작전에 의해 희생된 ‘도피 입산자’로 밝혀졌다.


‘미군정보고서(G-2 보고서)’는 다랑쉬굴 학살 사건이 벌어진 바로 그 날 “12월 18일 제9연대 제2연대가 제주도를 떠나기 앞서 마지막 작전을 전개했다. 제9연대는 이 작전에서 민간인과 경찰의 도움을 받아 남자 130명을 사살하고 50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소총 1정과 칼 40자루·창 32개를 노획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9연대 잔류병력의 철수 마지막 주인 12월 21일부터 28일까지 1주일간 무려 463명이 총살되기도 했다. 사살자와 노획한 무기와의 납득할 수 없는 불균형은 진압작전이 얼마나 무분별하게 전개됐는지를 보여준다.


미군정보고서는 9연대 작전에 대해 “모든 주민들이 명백히 게릴라 부대에 도움과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마을주민에 대한 대량학살계획(program of mass slaughter)을 채택했다”고 기록했다.


이처럼 무차별적 학살의 초토화 책임은 당시 정부와 미군에게 있다. 이승만은 대통령으로 군(軍)통수권자이며, 미군은 당시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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