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문화아카데미-<5> ‘형무소 행방불명과 예비검속 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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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문화아카데미-<5> ‘형무소 행방불명과 예비검속 희생’
  • /이병철 기자
  • 승인 2009.05.20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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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법회의 적법성 여부 규명작업 필요”


제주4·3평화재단은 ‘4·3’ 61주년을 맞아 4·3의 역사적 의미와 현재의 4·3 상황을 조명하기 위해 ‘4·3문화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다. 여섯 번째 강좌가 열린 지난 16일 박찬식 제주4·3연구소장은 ‘형무소 행방불명과 예비검속 희생’을 주제로 강연했다. 이날 강연 내용을 요약 정리한다. <편집자 주>

   
 
  박찬식 4.3연구소장  
 
현재 제주국제공항에서 4․3희생자 유해발굴이 진행되고 있다. 유해발굴은 학살․암매장된 희생자들의 인권을 회복하는 일이자 행방불명으로 시신을 거두지 못한 유족들의 한을 푸는 일이다. 유해발굴은 땅 속 깊이 묻혀 온 역사의 진실을 드러내는 의미 있는 일이며, DNA감식을 통해 희생자들을 유족 품으로 돌려보낼 수 있으리라 확신하고 있다.

4․3 당시 신고된 행방불명인은 3000여명으로 집계되고 있지만 미신고 된 행방불명인을 포함할 경우 5000여명을 넘어 설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 행방불명인 5천여명 예상


행방불명인은 크게 7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4․3 전개과정에서 검거와 학살을 피하기 위해 도피했다가 행적을 감춘 사람들이다. 특히 일본으로 밀항한 사람들이 많은데 북송(北送)된 제주출신 재일동포들이 많을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북송 관련 외교문건이나 자료가 공개된 것은 없으나 증언을 통해 확인되는 만큼 향후 이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다.

둘째, 초토화작전 전개 시기 총살 암매장․수장된 사람들이다.

셋째, 입산해서 무장대로 활동하다가 사망한 사람들로 이들의 숫자는 미미할 것으로 보인다.

넷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총살 암매장 당했는데 이때 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 군법회의의 경우 군인들이 대상이지만 4․3 당시 계엄령으로 인해 희생자의 대다수는 민간인들이었다. 이들은 산사람에게 식량을 전했다는 이유로 군법회의에 회부됐는데 당시 군법회의 형량은 일반재판에 비해 무거웠다.

다섯째, 형무소 재소자 가운데 한국전쟁 직후 총살 암매장된 희생자들이다.

여섯째, 형무소 재소자 가운데 한국전쟁 직후 인민군에 의해 석방돼 행적을 감춘 사람들이다.

일곱째, 한국전쟁 직후 예비검속돼 총살․암매장된 희생자들이다. 제주는 타지방에 비해 예비검속의 피해가 가장 많았지만 정확한 자료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제주․서귀포지역 예비검속 희생자에 대한 자료가 없어 증언을 통해 유해발굴을 진행한 상황이다.

행방불명자들에 대한 진상규명 작업은 방치돼 있는데 이들은 언제 어디서 희생됐는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들이 산으로 은신하거나, 타 지역으로 피신해 있는 동안 이들의 가족들은 대리학살을 당했고, 살아남은 자녀들은 연좌제의 직접적인 피해를 당했다.

# 군법회의 두차례 열려


   
 
  예비검속으로 행방불명 된 것으로 추정되는 국제제주공항 유행발굴 현장  
 
4․3 당시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군법회의는 1948년 12월과 1949년 7월 두 차례 실시됐다. 군법회의 대상자는 1948년 871명, 1949년 1659명이었는데 형을 선고받은 민간인들은 서울․인천․대전․대구․전주․목포 등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 분산 수감됐다.

이처럼 군법회의 대상자가 1948년에 비해 1949년에 2배에 이르는 것은 1949년 2월까지 초토화작전을 통해 강경 진압하다 이후 사령관이 바뀌면서 ‘내려오면 살려준다’는 선무공작에 따라 하산한 청년들을 옥석을 가리지 않고 군법회의에 회부했기 때문이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부는 6월 25일 오후 2시 경 치안국장의 명의로 각 경찰국에 ‘전국요시찰인 단속 및 전국 형무소 경비의 건’이라는 제목의 전화통신문을 전달했다. 그러나 정부는 서울․인천 등 형무소에 대한 경비대책을 세우지도 못한 채 남하했고, 이 과정에서 경기도 평택 이남지역 형무소 재소자들은 집단총살 대상이 됐다.

제주에서 이송된 4․3 관련 재소자는 일반재판 수형인 200여명과 두 차례 군법회의 대상자 중에 만기출소자를 제외한 2350여명이 수감돼 있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행방불명됐다.

이처럼 큰 피해를 초래한 군법회의의 적법성 여부는 아직도 논란이 지속되고 있는데 향후 우리가 규명해야 한다.

2차례의 ‘4․3사건 군법회의’에 대한 다각적 조사 결과 △재판서(판결문)․공판조서 등 소송기록이 발견되지 않은 점 △불과 며칠 사이에 그 많은 인원을 정상적인 절차를 밟아 소송을 진행하고 판결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 △수형인 뿐 아니라 이들을 전국 각지 형무소로 호송한 경찰관의 증언에 의해 수형자들이 제주도를 떠나 타 지역 형무소로 이송된 후에야 형량이 통보되었다는 사실 △하루 수백명씩 심리 없이 재판하는 한편 불과 사흘만에 345명에 대해 사형을 선고한 점 △시신들을 철저하게 암매장한 점 등 당시 제반 상황을 미뤄 볼 때 군법회의는 법률이 정한 정상적인 절차를 밟지 않았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예비검속은 해방 후 폐지되어 정부가 공식적으로 시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전쟁 발발 후 제주지역 경찰은 내무부 치안국의 지시에 따라 어떤 법령이나 규정에도 근거하지 않은 채 예비검속을 불법적으로 자행했다. 예비검속 희생자들은 대부분은 제주4․3이나 좌익활동과 직접 관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의 자의적인 기준에 따라 분류되었으며, 무고나 밀고․경찰과의 불화․개인적 감정 다툼으로 예비검속된 경우가 많았다.

특히 총살을 집행한 해병대사령부(제주지구 계엄사령부)는 정부의 공식적인 계엄령 선포 이전에 불법적으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예비검속자의 구속이나 석방에 관한 최종 권한을 행사한 것으로 파악됐다. 또한 해병대사령부는 예비검속자 처리과정에서 계엄 관령 법령이나 포고를 전혀 적용하지 않은 채 희생자들을 불법으로 총살한 것으로 밝혀졌다.

예비검속으로 인해 1950년 7월 말부터 8월 하순 사이 제주읍과 서귀포․모슬포 등지에서 여러 차례 집단학살이 이뤄졌다. 이는 경남․부산지역이 언제 점령당할 지 모르는 상황에서 사전에 제주도를 반공지역으로 삼기 위해 예비검속자에 대한 처리를 단행한 것으로 보인다.

예비검속자에 대한 학살은 비밀리에 수행됐는데 대정면 송악산 ‘섯알오름 학살터’만이 주민들에 의해 발견됐을 뿐이다. 제주․서귀포경찰서에 검속됐던 사람들의 희생일시 및 장소 등 당시 상황은 철저히 기밀로 처리됐다.

# 예비검속 관련 자료 없어


제주경찰서 관내 제주읍․조천면․애월면 예비검속자 전체 숫자 및 희생자수는 관련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으며, 예비검속자의 시신을 수습한 유가족은 1명도 없다.

단지 목격자들의 입을 통해 유가족에 전해졌을 뿐이다. 예비검속자에 대한 첫 집행은 1950년 8월 4일 발생했다. 예비검속자 수백명을 제주항으로 끌고 간 후 배에 태우고 바다 한 가운데로 가서 수장시켰다. 두 번째 집행은 1950년 8월 19일 제주비행장(정뜨르)으로 끌고 가 총살 후 암매장했는데 유가족의 증언과 일치했고, 9월 중순 이후 석방된 생존자이 이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현재 제주국제공항 유해발굴에서 집단학살의 면모가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서귀포경찰서 관내 서귀면․중문면․남원면 예비검속자들에 대한 기록도 전혀 없는 실정이다. 이들 지역 예비검속자들은 서귀포 절간고구마창고에 수감됐었다가 제주비행장으로 옮겨져 제주경찰서 관할 예비검속자들과 함께 총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모슬포경찰서 관내 대정면․한림면․안덕면 예비검속자의 전체 숫자 및 총살 희생자 수에 대한 경찰 자료가 남아 있다. 또한 예비검속자 희생 당일 새벽 총살현장을 목격한 마을주민에 의해 삽시간에 유가족들에게 전해져 실태가 잘 알려지고 있다. 총 예비검속자 수는 344명이었고 이들 가운데 252명이 군에 송치돼 희생됐다.

한림․모슬포지역 예비검속자들은 1950년 8월 20일 일제시대 탄약고로 쓰이던 ‘섯알오름’에서 총살됐고, 한림지역 유족들은 시신을 비밀리에 수습해 ‘만벵듸 공동장지’에, 모슬포지역 유족들은 ‘백조일손지지’에 안장했다.

성산포경찰서 관내 성산면․구좌면․표선면으로 예비검속자는 76명이었으나 당시 문형순 성산포경찰서장은 군의 지시를 거부하고 이들 가운데 6명만 군에 넘겨 상당수가 목숨을 건졌다.

행방불명 희생자의 진실규명을 위해 첫째, 문서를 통한 진실찾기에 나서야 한다. 문서자료는 해방 직후 지역별로 다양하고도 격렬하게 전개된 대중투쟁 사례와 재소자 학살 실상을 연구하는데 필요하며, 행형(行刑)자료는 가장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행형자료를 활용한 연구는 일부에 불과한 실정이다.

둘째, 문서조사와 별도로 형무소 인근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한 증언 조사 및 학살터․암매장지 발굴사업이 병행돼야 한다. 관련 문서가 없는 상황에서 현지인의 구술 증언이 시급하며, 이를 이용한 데이터 베이스 구축작업이 필요하다. 행형자료에 대한 연구와 각 형무소 인근 암매장지 발굴 등이 확대 실시는 행방불명의 실체를 밝히는 방법이 될 것이다.

셋째, 보수정권 출범 이후 희생자 가운데 수형인은 제외돼야 한다는 보수단체의 소송 제기 등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를 근본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법률적 대비를 심도 있게 해야 한다.

특히 국방경비법․국가보안법 적용자 등에 철저한 법률적 검토가 필요하며, 보수단체의 헌법소원 제기에 대한 근본적인 대비책을 마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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