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법문 - 약천사 회주 혜인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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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법문 - 약천사 회주 혜인 스님
  • 승인 2009.06.10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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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귀포불교문화원 창립 2주년 기념식 및 한·아세안 특별 정상회의 성공개최 축하 기념 대법회가 지난 7일 약천사(주지 성원 스님)에서 열렸다. 이날 약천사 회주 혜인 스님은 ‘삶과 죽음’을 주제로 법문을 설했는데, 스님은 “불자들도 불법승을 잘 닦아 수행하면 오고 감에 걸림 없는 능력과 도가 생긴다”고 강조했다. /정리=김현정 기자



“마음 밭에 꽃씨 뿌려야 아름다운 꽃·열매 맺어”


   
 
   
 
석가모니 부처님은 인간의 생로병사에 큰 의문점을 가지셨습니다. 생사의 관문이 있다면 생사를 해탈할 수 있는 일도 있지 않겠느냐는 문제를 가지고 출가를 하셨습니다.

출가 후 6년 고행 끝에 도를 이루시고 생사 없는 열반의 이치를 우리 모든 중생들에게 일러주신 것이 팔만대장경이라고 생각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45년 동안 만나는 사람에게 진리의 등불을 전해주시다 79세 되던 해에 열반에 드셨습니다.

우리 중생들은 어디서 왔으며, 죽어서 가는 곳은 어디인지 모릅니다. 온 곳을 모르고 갈 곳도 모르고, 가는 날도 모르는 채 그냥 왔다가 가는 것을 죽는다고 합니다. 온 곳을 알고 갈 곳을 아는 등 눈 밝은 사람이 손바닥의 잡념까지 다 보듯이 많은 것을 알고 가는 것을 열반이라고 합니다.

여름이 되면 여름옷을 갈아입고 겨울이 되면 겨울옷을 갈아입듯 육체라는 옷을 벗어버리고 다른 옷을 갈아입은 것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오고 가는 것을 열반이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마지막 가시던 날 아난존자와 모든 제자들에게 “나는 오늘 이 사바세계의 인연이 다해서 가노라. 피곤하니 누워야 되겠다”고 말씀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시는 그 날 수발타라라는 노인이 살아계셨을 때 한번 찾아뵙기를 청하지만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때 부처님께서 이를 아시고 “아난존자야, 저 먼발치에 수발타라라는 나이 많은 노인이 왔을 것이다. 내가 아무리 피곤하다 하더라도 나는 그 사람의 면회를 받아 줄 것이니 문을 열어 주어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수발타라는 부처님의 얼굴을 보는 순간 부처님의 법문 한 마디를 듣고 도를 깨칩니다. 수발타라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부처님께 이 은혜를 보답할 길은 없고 제가 도로 통했으니 허공 중에 18가지 변상을 하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신통력으로 허공에 올라가 돌, 물, 무지개를 만들기도 하고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집을 만들기도 하고 가지가지 모양을 다 만들고 난 후 내려와서 “부처님이 저에게 내주신 이 은혜는 부모님의 은혜보다 더 큽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때에 부처님께서는 “선재선자라. 수발타라여. 나는 성도 이후에 아약교진여를 시작으로 다섯 비구를 제도를 했고, 제일 마지막에 그대 수발타라를 제도했으니 내가 할 일은 다했다”고 말합니다. 그 말씀을 하고 난 뒤 부처님은 유언을 하셨는데 그 경이 《유교경(遺敎經)》입니다.

욕심을 부리지 말아라, 짜증을 내지 말아라, 말을 곱게 하여라, 남에게 상처 주는 일 하지 말아라, 부모님께 효도하고 스승에게는 항상 공경하여라 등의 말씀으로 엮어진 것이 《유교경》입니다.

“육체의 옷 벗어버리고 다른 옷 갈아 입듯이
편안한 마음으로 오고 가는 것이 바로 열반”


부처님이 열반에 들었을 때 가섭존자는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뒤늦게 달려온 가섭존자가 통곡하는 순간 곽 밖으로 부처님의 두 발이 툭하고 튀어나옵니다. 이것이 유명한 ‘곽 밖으로 두발을 보이셨다’는 곽시쌍부(槨示雙趺)입니다.

이때 가섭존자가 부처님의 뜻을 아시고 “부처님은 오실 때 오신다 하지 않고 오셨고, 가셨을 때 가신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부처님은 옴에 온 바가 없고 감에 간 바가 없다. 부처님이 가셨다고 슬퍼할 일이 아니다. 부처님은 육체라는 이 옷만 벗었을 뿐이며, 법신은 상주불멸해서 항상 여여한 그 자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달마대사의 열반 모습을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가 양나라 임금 무제와 마주 앉아 점심공양을 하게 됐습니다.

이때 무제는 “달마대사여, 잘 오셨습니다. 나도 이 세상에 태어나 왕이 돼서 10리에 큰절을 짓고 5리에 암자를 지어 팔만대장경을 무수히 번역을 했고 나름대로는 많은 포교를 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달마대사는 “얼마 되지 않는 공덕을 가지고 자랑 하시오”라고 말합니다.

기분이 몹시 상한 무제는 “내 앞에 앉아 있는 자가 누구냐. 이 사람과 같이 밥을 먹기가 싫다”고 합니다.

달마대사는 소림굴에 앉아 9년간 벽만 바라보고 면벽수행을 했습니다. 중국 최고 고승 혜가대사가 몽중에 “너의 스승은 숭상 소림굴에서 벽만 바라보고 앉아 있는 분이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혜가대사가 그 스승을 찾아가 스승의 한 말씀에 도를 통했습니다. 혜가대사 한 명을 제도한 것으로 말미암아 중국 불교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달마대사가 가는 곳마다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달마대사를 그대로 나뒀다가는 임금자리도 위태롭게 될 것으로 우려해 달마대사를 죽이려 합니다.

“단비 내려도 접시에는 빗물이 적게 담기고
호수에는 넉넉하게 담기니 마음 넓게 써야”


수백명의 무리가 달마대사를 죽이려 달려들었지만 오히려 무리들이 혼비백산하는 등 무산됩니다. 여섯 차례나 실패하자 일곱 번째는 독약을 갖다놓았습니다. 달마대사가 독약이 든 잔을 들고 “모든 사람들은 들어라. 보약이라고 갖다 준 이 보약을 내가 여섯 번째 먹었다. 오늘 일곱 번째인데 내가 이것을 먹고 죽지 않으면 여러 명이 죽게 되니 내가 여러 명 방생하는 뜻에서 내가 죽는다”며 독약을 마시고 스스로 죽습니다.

“오본래자토(悟本來玆土)는 전법구미정(傳法救迷情)이니, 일화개오엽(一花開五葉) 결과자연성(結果自然成)하리라-내가 본래 이 땅에 온 것은 법을 전해서 모든 위대한 마음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왔는데, 그동안 내가 포교를 한 연고로 한 송이의 꽃이 다섯 꽃잎이 피어 결과는 자연히 이뤄질 것이다.”

“내가 간다고 해서 아주 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내가 가고 난 뒤에 땅을 파서 무덤을 만들지도 말 것이며, 이 육체를 태워 화장하지도 말라. 여기 웅이산에 돌이 많으니 나를 가운데 두고 내가 한 평생 짚고 다니던 지팡이와 짚신 한 켤레를 함께 묻어라.”

달마대사 말씀대로 웅이산 주변 크고 작은 돌로 무덤을 만듭니다. 3년 후 송운이라는 대신이 달마대사가 지팡이에 짚신 한 짝을 걸고 갈대를 배 삼아 강을 건너는데 가라앉지 않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양 무제에게 말합니다. 이에 무제는 “3년 전 돌무지 속에 들어간 달마대사가 그럴 리 없다”며 달마대사의 무덤을 파보게 하는데 그곳에는 짚신 한 짝만 남아있었습니다.

이 도(道)라는 것은 스님들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불법승을 잘 닦아 수행을 하면 얼마든지 생사해탈의 오고 감이 자유스러운 능력이 생깁니다.

불교는 마음을 찾는 종교요, 마음을 보는 종교요, 마음을 아는 종교요, 마음을 깨닫는 종교요, 마음을 잘 사용하도록 가르치는 종교입니다.

마음이 밝아지면 모습이 달라지고 관상이 바뀌면 내 운명과 팔자도 바뀝니다. 아무리 더러운 오물이라도 흙으로 덮어주고 묻어주면 훌륭한 거름을 만들어 내듯이 잘못한 사람을 덮어두고 묻어두고 이해하고 용서하면 훌륭한 복전이 만들어집니다. 단비가 허공 가득히 내리더라도 접시에는 물이 적게 담기고 큰 호수에 물이 넉넉하나니 마음을 크게 씁시다. 마음을 넓게 씁시다. 마음을 자비롭게 씁시다. 잡초를 심는 사람에게는 잡초만이 무성하고 꽃을 심는 사람에게는 아름다운 꽃과 열매가 열립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힘들고 어려울 때 생각하고 되새기는 말이 있습니다. 8백년 전 보조국사께서 일러주신 구절입니다.

“얼음이 많으면 물도 많고 얼음이 적으면 물도 적다.”

세상을 살아나가는데 난관이 생기면 거기에 좌절하지 마십시오. 얼음이 많으면 물도 많기 때문에 시련을 극복하고 이겨내면 행복의 열매도 더 크고 많습니다.

혜인 스님은


1943년 서귀포시 안덕면 화순리에서 출생했다. 스님은 1956년 대구 팔공산 동화사에서 일타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수지했다. 1962년 가야산 해인사에서 자운 율사를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한 후 해인사 강원을 졸업했고 제방선원에서 안거를 성만했다.

스님은 1971년 해인사 장경각에서 108만배 기도를 성취했다. 1996년 서귀포시 대포동에 약천사를 창건했다.

현재 조계종 계단위원과 약천사·충북 단양 광덕사 회주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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