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의 아침 - 이 시대의 부모은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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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토의 아침 - 이 시대의 부모은중경
  • 승인 2009.09.02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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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양로원이 이전되기 전 제주시 영평동에 위치해 있을 때 필자는 가족과 함께 3년 동안 어르신들을 모시고 생활한 적이 있었다.

지금에 비해 시설이나 지원 등 생활여건이 썩 나은 편은 아니지만 식사, 청소, 겉치레 일 등의 생활은 부모가 없는 나에게는 큰 위안이었고, 어린 자녀들에게는 친손자 이상으로 돌봐주신 기억이 엊그제 일처럼 스쳐지나간다.

그때 모셨던 어르신들을 지금은 거의 찾아뵐 수 없다. 살아 계셨을 때 자주 뵙지 못한 게 바쁘다는 핑계일지 모르지만 죄송하고 미안할 따름이다.

무더웠던 여름이 가고 이제 초가을이다. 신문사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고 당시에 경험했던 안타까운 실화를 소재로 삼는 것이 좋을 듯싶어 기억의 시간을 되돌렸다.

그 시절 이 맘 때 즈음 파출소에서 전화가 왔다. 내용인 즉 제주공항 인근에서 길 잃은 할머니를 발견했는데 이름과 연락처를 밝히지 않는 치매성 노인인 것 같다며 가족이 나타날 때까지 당분간 보호해달라는 부탁이었다.

파출소 직원이 모셔온 할머니는 첫 모습이 단정해 보였고, 제주 분은 아닌 듯 싶었다. 치매 정도는 심각하지 않았지만 신분증도 없었다.

“할머니 이름과 주소, 연락처를 말씀해보세요?”라고 물었더니 그 할머니는 “모른다”는 대답으로 일관했다. 파출소 직원이 가버린 후 낯선 분위기에 힘들어하는 할머니를 안심시키려고 노력하던 중 할머니가 눈물을 훔치는 모습을 보였다.

몇 시간 후 안정을 찾은 할머니는 필자에게 “육지에서 아들과 며느리하고 여행을 왔다가 길을 잃었다”고 하시면서 “자식한테는 연락하지 말라”며 주소와 전화번호 등 일체 함구하는 것이었다. 그 할머니는 초기치매인 노모를 제주도 관광시켜준다며 모시고 왔다가 버리고 가버린 이른바 ‘현대판 고려장’의 피해자였다.

그러면서도 그 할머니는 자식에게 누가 될까봐 “그냥 여기서 살게 해 달라”며 한동안 모셨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또 다른 사례로 제주에 사는 자식이 치매 어르신을 보호해 달라며 수 차례 하소연해 결국 시설에 모시기로 했는데 몇 달간은 1주일에 한 두 차례 노모를 찾아오곤 했다.

그 후 이 어르신이 중병으로 간병하기 힘들어 가족의 힘이 필요할 것 같아 연락을 했더니 “그런 사람 없다”며 연락이 두절됐다. 결국 어르신은 병을 이기지 못해 몇 달 뒤 운명하셨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족에게 연락했더니 “마지막으로 자식노릇 할 수 있도록 해 달라”면서 “집에서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시신을 모시고 가겠다”고 했다.

자식이 모신다는데 부탁을 들어줬고 조문하러 갔는데 형제들끼리 역할분담을 놓고 옥신각신하는 모습을 보며 ‘품에 있을 때 자식’이라는 옛말이 틀린 게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다 지난 일이지만 필자는 내 주변의 자식이나 후배에게 이런 얘기를 전해주면서 내가 지금하고 있는 모습이 다음 생애 내 모습이라고 생각하며 살아 계실 때 부모님을 잘 모시라고 강조한다.

요즘 자식에게 효도를 받으려면 돈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말을 흔히 한다. 그러나 내가 부모에게 효행을 실천하면 자식들이 그 모습을 보며 따라한다는 인지상정을 알면 걱정 할 필요는 없을 듯 싶다.

필자가 존경하는 모 대학 학장님의 말씀이 새롭다. ‘나무는 고요하고 싶으나 바람이 가지를 흔들어버리고 자식이 효도하고 싶으나 기다려주지 않는 게 부모더라.’

추석 전 조상 묘소를 찾아 벌초도 해야 되는데 ‘벌초 대행’이라는 광고를 보면서 세상이 무심함을 느껴본다.

‘조상꼭두에 풀 베지 않는 자는 자식이 아니다’라는 제주 속담이 있듯이 예로부터 벌초풍습은 제주사람들에게는 효의 근본이자 미풍양속으로 이어지고 있다. 아무리 바쁘다는 이유로 벌초마저 돈으로 해결하고, 심지어는 ‘골총 무덤’으로 방치되고 있는 묘소도 자주 보여 씁쓸하기만 하다.

올 추석에는 후손들에게 ‘불설대보 부모은중경’ 한 권씩 선물하는 것이 어떨는지….

조 인 석<사회복지법인 춘강 어울림터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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