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경 스님의 승만경 강설<24> 제4장 바른 가르침을 체득함 (5) 섭수정법장(攝受正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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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경 스님의 승만경 강설<24> 제4장 바른 가르침을 체득함 (5) 섭수정법장(攝受正法
  • 승인 2009.11.18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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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운데서 전자(前者)는 불교에 연(緣)이 없는 사람, 불법을 듣고자 하는 귀를 갖지 않은 사람이다. 이러한 부류도 또 둘이라고 생각된다.

하나는 물론 다른 종교를 굳게 믿고 불교를 믿지 않는 부류를 말하고, 다른 하나는 불교를 포함하여 모든 종교를 무시하는 부류의 사람이다. 특히 후자는 흔히 세간에서 말하는 ‘연(緣)이 없는 중생[無緣衆生]’이다.

그러나 ‘연이 없는 중생은 제도하기 어렵다’라고 말하듯 전혀 무연(無緣)의 사람은 문제 밖이라 도외시해서는 진정으로 섭수정법자(攝受正法者)라고는 말할 수 없다. 이러한 무연의 사람이라도 정법을 섭수하기 위해서는 짊어지고 갈 것이 요구된다.

불법을 믿지 않는 사람 중에는 불법을 들을 기회를 갖지 않았다는 이유의 사람들도 있을 것이며, 설령 청문할 기회가 있어도 정면으로부터 부정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일지라도 사회의 일원으로서 생존하는 한 사회의 도덕, 윤리를 무시하고는 살아갈 수 없다.

또한 살아가는 동안 사회의 은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으로서의 도덕·인륜의 대도(大道)에 위반할 수는 없는 것이다. 적어도 인간이 사회 구성원인 한 위의 것들은 엄연한 사실이며 인간 생활의 대전제가 되는 것이다.

그 기본적 입장에 선다면 인간의 행위와 행위의 결과를 연결하는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사상도 부정할 수 없다.

과연 불교의 사상은 ‘이 법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렵고 세상(당시의 사상)의 흐름에 거역되는 것도 있다’라고 붓다의 말씀에 있었던 것과 같이 이해하기 어렵고[難解]·들어가기도 어려운[難入] 법이다.

따라서 깊고 깊은 미묘한 법을 불교에 연이 없는 사람에게 최초로 설할지라도 그것을 받아들이기는 불가능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붓다가 가진 상대방의 근기에 알맞은 대기설법(對機說法)과 순서에 따라 설법하는 차제설법(次第說法)이 갖는 의미가 있다.

모든 사물에는 순서가 있다. 산에 오르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의 준비를 갖추지 않을 수 없다.

100개의 돌계단도 한 걸음씩 올라가야 올라갈 수 있다. 수영에서는 물에 뛰어들기 전에 준비운동이 중요하다. 석존께서 세상에 계실 당시 재가(在家)사람들이 붓다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여러 곳에서 모여 왔다.

그 중에는 출가하여 석존의 제자가 된 사람도 많았으나 그러한 경우 석존은 재가사람들에 대해서 직접 연기(緣起)·4제(四諦)와 같은 깊고 깊은, 가장 뛰어난[最勝] 법을 설하지 않았다.

석존이 설한 것은 당시의 사회통념으로서 일반사회의 윤리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던 생각들을 우선 긍정하여 재가의 사람들을 서서히 불교의 큰 바다[大海]에 들어 올 수 있게 노력하고 있다. 이것을 차제설법(次第說法 : Anupubbikatha)이라 한다.

“사회구성원 사회윤리·도덕 무시할 수 없듯
행위와 결과 연결하는 인과응보 부정 못해”


“묘목이 자라기 위해 토양이 필요한 것처럼
인간에 있어서도 비옥한 마음의 토양 필요”


이를테면 속가의 신자에 대한 교화 즉 야사(耶舍) 및 야사의 어머니, 이교도인 브라흐만·폭카라사티에 대한 대화, 거사(居士) 우바리(優婆離)에 대한 대화 등에서 볼 수 있는 동일 형식이다.

그 내용은 보시의 이야기(dana-katha), 훈계[戒]의 이야기(silakatha), 천계(天界)에 태어나는 이야기(sagga-katha)라는 것이다. 여기에 시(施)·계(戒)·생천론(生天論)이라고 하는 사상은 재가자의 이상이며 목적이 되는 것이어서 천계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보시와 계(戒), 즉 사회도덕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하는 사상이다.

그것은 불교가 지향하는 열반과는 서로 어긋난 것이다.

따라서 석존의 입장에서 말하면 생천(生天)의 윤리는 재가자에게는 필요한 것이지만 출가자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석존은 재가자에 대해서 이러한 생천의 윤리를 설하여 사회 통념을 긍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훈화를 함에 의해서 그것을 듣는 사람이 순종하는 마음·유화(柔和)한 마음·편견에 사로잡히지 않는 마음·환희의 마음·맑게 갠 마음을 구비할 때에 비로소 제불(諸佛) 최승(最勝)의 법이라는 4성제의 가르침을 설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법을 설하기 위해서는 법을 받아 들일 수 있는 바탕이 듣는 사람의 마음에 육성되는 것이 선결 문제이다. 그 근기가 성숙됨을 기다리는 감내하는 마음이 요청된다.

묘목을 심기 위해서는 그 묘목이 잘 자라기 위한 토양이 필요한 것처럼 인간에 있어서도 또한 마음의 토양을 필요로 함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이리하여 법에 접하지 않은 사람들, 길을 잘못 걷는 사람들에 대해 법을 받아들이는 토양으로서의 인간의 길, 선악 인과의 도리를 우선 설하여 인간의 행복, 내세의 모습을 설함에 의해서 그러한 사람들과 연을 맺는 것이 중요하다.

정법을 널리 펴려고 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이와 같은 노력을 통하여 무문비법(無聞非法)이라는 연(緣)이 없는 사람들의 마음의 버팀목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을 우선 섭수정법자(攝受正法者)가 취해야 할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다음에 제2의 그룹 사람들인데 이 쪽은 이미 불법과 접촉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대처하는 방법도 자연히 별도의 것이 요구된다.

이미 앞에서 이에 관해 설한 바와 같이 불교에서는 인간의 성질, 능력에 성문, 연각(또는 獨覺), 보살이라고 하는 3가지의 범주를 세운다.

성문은 스승의 가르침을 듣고 깨닫는 사람의 부류이고 연각은 스승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서도 자기 홀로서 불교의 진리를 깨닫는 사람을 가리키며 보살은 스스로의 깨달음을 얻는 데에 그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을 교화하여 함께 깨달음으로 들어가도록 한다. 소위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의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이다.

대승을 구하는 사람들이란 이 입장에 선 사람들을 말하지만 섭수정법자는 이 3가지에 속하는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그들에게 각각 연을 맺게 한다는 처방전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가르친다.

이 경우 중요한 것은 이미 어떤 고정관념을 가진 사람들, 또는 자기가 살고 있는 방식이 최고의 것이라고 고집하는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화담정사 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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