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오신날의 의미를 되새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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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오신날의 의미를 되새기며
  • 희정 스님<불탑사>
  • 승인 2010.05.26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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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은 온갖 생명이 약동하고 갖가지 예쁜 꽃들이 만발하는 계절이다. 때문에 노랫말에도 있는 것처럼 봄바람이 불면 우리들 마음은 어쩐지 좋은 소식이 들릴 것 같아 설렌다.

우리는 살면서 여러 가지 선물을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물질적인 형태의 선물, 마음의 선물 등 갖가지 선물 가운데 가장 값진 선물은 무엇일까. 아마 이 세상에 안 계신 줄 알았던 부모님이 살아계신다는 소식을 듣는 것만큼 기쁜 선물은 없을 것이다.

법화경에는 중생들을 부유한 부모를 어려서 우연히 잃어버리고 구걸하면서 살아가는 빈궁한 아이에 비유하고 있다.

본래 원만구족한 자신을 잃어버리고 늘 무엇인가를 갈망하면서 쫓기듯 살아가는 중생은 항상 마음이 배고프고 춥기 때문에 이렇게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며칠 전 바로 부처님 오신날이 지나갔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뜻은 무엇일까.

부처님 탄생게에는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라 하였고, 법화경에는 ‘여래출현 일대사인연 개시오입 불지지견(如來出現 一大事因緣 開示悟入 佛之知見)’이라고 하였다.

앞의 구절은 해석하면 하늘 위와 하늘 아래 가장 존귀한 존재가 삼계 속에서 괴로움을 당하고 있으니 내가 이 중생들을 편안하게 하겠다는 뜻이다. 현대적으로 말하면 온 우주 가운데 더없이 훌륭하고 가장 존귀한 존재인 중생들이 삼계인 이 세상에서 괴로워하고 있으니 내가 구제하겠다는 것이다.

뒤의 구절은 여래, 즉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가장 큰 사명은 바로 중생들에게 부처님과 같은 지견(지혜의 눈)을 열어 보이고 깨닫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출가하신 동기를 ‘사문유관(四門遊觀)’이라 한다. 사문유관은 부처님의 왕자시절 궁 안에만 있다가 궁궐의 동서남북 네 성문을 통해 세상 구경을 나갔던 일을 말한다.

즉 싯달태자는 거리에서 병든 환자, 늙어서 운신하기 힘든 노인, 죽은 시체 등 이 세상의 대표적 네 가지 괴로움인 생노병사를 목격했고, 그로 인해 출가를 단행하게 되었다. 결국 부처님께서 출가하신 동기는 인생의 근본적인 괴로움 때문이며, 괴로움을 해결하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 부처님의 출가 목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부처님 성도 후 가르침을 설하시는 데에도 인생의 근본적인 괴로움을 해결하는 것을 출발점으로 하고 있다. 부처님의 첫 가르침인 사성제(四聖諦) 가운데 첫째가 바로 고성제(苦聖諦)라는 것에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 모든 괴로움을 한데 모아 한마디로 ‘삼계(三界)는 고해(苦海)다’라고 하셨다.

그러면 이 세상은 왜 괴로운 것이며 괴롭다고 하는 근거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경전 가운데 ‘제행무상 시생멸법 생멸멸이 적멸위락(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이라는 구절이 있다. 즉 일체 모든 것이 무상한 이유는 생멸법이기 때문이며, 그 생멸하는 법이 멸한 자리는 그대로 극락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중생에게 있어서 생노병사 하는 등 생겨나고 없어지는 생멸의 현상을 보는 것은 곧 괴로움이다. ‘나’라고 하는 존재가 아프지도 않고 늙지도 않고 변함이 없이 젊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니 괴로운 것이다.

형상이 있는 모든 것이 변하기 마련이라는 것은 세상의 이치이고 질서이다. 그러므로 형상있는 모습을 보면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변하고 싶지 않은데 변하는 모습을 보고 있는 곳에 괴로움이 있게 되는 것 또한 당연한 것이다.

부처님 최초 가르침인 사성제에서는 이 괴로움이 있게 되는 원인을 바로 집착이라고 한다. 집착은 바로 형상에 매달리는 마음을 가리킨다. 이런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로 앞 게송의 뒷 구절인 ‘생멸멸이 적멸위락’ 이다. 즉 생멸이 소멸한 자리는 바로 극락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생멸의 모습 속에 감추어져 드러나 있지 않은 불생멸의 당체를 보게 되면 그 자리에는 괴로움이 붙을 여지가 없게 되는 것이다. 생멸의 모습을 보는 것은 괴로움이지만 불생멸의 모습을 보는 것은 곧 마음의 부동이고 안정이다.

경전에서는 이런 이치를 금에 비유하고 있다. 금은 반지도 되고 목걸이도 되고 쟁반도 되는 등 온갖 모습으로 변화되지만 금 자체의 성질은 절대 변하는 적이 없다.

이처럼 금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과 같은 마음은 생멸을 보는 마음이고, 금 자체의 순수한 모습을 아는 것은 불생멸을 보는 마음이다.

우리들 마음속에 감추어져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모두 이러한 불생멸의 불성을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불성을 내가 지니고 있는 줄 모르고 살아가기 때문에 부처님은 우리를 궁자라고 표현하셨다.

우리들 존재가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인 이유는 바로 우리 각자가 부처님과 같은 성품인 불성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중생 각자가 불성을 지닌 존귀한 존재이며, 자신의 불성을 개발할 때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해탈할 수 있음을 깨우쳐 주기 위함이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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