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법문-대효 스님 <원명선원 선원장>
상태바
지상법문-대효 스님 <원명선원 선원장>
  • 제주불교
  • 승인 2011.04.27 17: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aaaaa참선aaaaa준비없이 바로 구경에 이르는 길


   
 
   
 
사람들이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힘들고 어렵게 살아가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이 힘들고 어려운 길을 가고 있습니다.

몸이 건강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몸을 망가뜨리고 있습니다. 몸이 망가지니까 마음이 편안할 수가 없습니다. 몸과 마음이 편치 않으면 세상사가 다 귀찮습니다. 다 짜증이 나요. 몸과 마음이 불편하면 그 다음에 오는 것은 반갑지 않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준다 해도 소용이 없어요. 몸과 마음이 제자리에 놓여 있을 때, 작은 것도 아름답고 큰 것도 기쁠 수가 있습니다.

몸과 마음은 나누어지는게 아닙니다. 나누어질 수가 없습니다. 사람에게만 몸이 있고 마음이 있는게 아닙니다. 이 세상 모든 만물은 하나도 빠짐없이 몸과 마음을 다 지니고 있습니다. 몸은 마음을 움직이게 하고 또 마음은 몸을 움직이게 합니다. 마음을 바로 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바로 해야 되고, 몸을 바로 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바로 해야 됩니다. 몸이 비뚤어지면 마음도 비뚤어지고, 마음이 비뚤어지면 몸도 비뚤어져서 상하게 됩니다.

몸과 마음은 자동차와 자동차를 움직이는 운전수와의 관계입니다. 새 차를 뽑았는데, 운전수가 실수해서 낭떠러지로 몰고 가면 한 순간에 그 차는 망가지고 맙이다. 그러나 낡은 차라도 운전수를 잘 만나면 수리하고 보수해서 새 차 못지않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이 차에 운전수를 제대로 제자리에 놓을 수 있게 하는 그런 법이 있습니다. 불법에는 있습니다. 운전수가 제대로 된다면 차가 조금 고장 났어도 별 문제가 없습니다. 운전수가 제대로 되면 고장 난 차도 얼마 안 가서 정상적인 차로 돌려놓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괜찮은 차인데 운전수가 제자리 돌아가는 이 법을 올바로 받아들여서 신념을 갖고 나가는 사람은 드물어요. 다 함께 마음을 새롭게 바꿔놓을 수 있는 이 법을 잘 받아들여서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은 불교에서 최상승으로 일컬어지는 참선에서 준비가 필요없이 바로, 구경(究竟)의 목표점에 이르는 그런 법입니다.

그럼 구경이 뭐냐? 모든 사람들이 이루려고 하는 행복의 종착점, 그게 바로 구경입니다. 그 종착점인 구경이 깨달음이에요. 사람들은 이 구경을 모르기 때문에 힘들고 어렵게 살아갑니다. 사람들이 행복하기 위해서 산다는 걸 알고 있다면 몸을 함부로 하지 않고 또 마음을 함부로 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도 몸을 함부로 하기 때문에 건강이 깨지고 마음을 함부로 하기 때문에 마음이 어지러워집니다. 이것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바로 챙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행복하기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을 망각하는 겁니다.

우리가 숨쉬고 사는 것도 살려고 하는 것도 행복하기 위해서입니다. 행복을 저버리는 행동은 아무것도 없어요. 비뚤어져 가는 사람 붙들고 얘기해 보세요. 한참 얘기하면 금방 돌이켜 보지요. ‘아, 내가 해서는 안 될 건데 잊고 이걸 하고 있구나.’다 알고 있어요. ‘내가 몸을 망가뜨려서는 안 될 건데 하고 있다.’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 길에 접어들어서 이게 습관이 되고 습관이 된 걸 뭐라고 그래요? ‘길들여진다’고 그러죠. 안해야 될 거 길들여지면 그 다음에 어떻게 되요?

슬피우는 사람을 옆에서 보니 너무 안됐어요. 몸이 망가지고 마음이 망가질 것 같아요. 그래서 말리는 겁니다. 그만 울라고 그러면 울던 사람이 울음을 뚝 그칩니까? 그걸 안 고칩니다.

그 사람은 길들여져서 그래요. 길들여진 게 뭡니까? 한 걸음 한 걸음 이렇게 나아가서 길들여져요. 길들여진다는 것은 시간이 걸린다는 거예요.

길들여진 것을 고칠 수가 있느냐? 이건 고치기가 힘들어요. 그래서 이 세상에는 준비운동 안하고 이루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판사 검사가 되려고 하면 공부를 많이 해야 되요. 책장을 많이 넘기는 준비를 거쳐야 되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다른 행동을 할 때, 이때는 몸과 마음가짐을 바꿔야 되요. 이를테면 수영을 하려고 수영복을 입고 곧바로 물속에 들어간다면 몸에 쥐가 나든지 심하면 심장마비가 오든지 몸에 이상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준비운동을 하고 미리 손발에 물을 묻히고 들어갑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이 하려고 하는 참선은 그런 게 아니에요. 준비가 없이 된다는 거예요. 준비 없이 되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 깨달음을 이루지 못하냐? 그렇게 준비도 안하고 되는 게 바로 참선인데, 왜 깨닫지 못하는냐 이겁니다.

그 이유는 길을 가르쳐 주는데 그 길로 안가기 때문에 그래요. 그 길을 안갑니다.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하냐? 이렇게 생각해요. 그러니까 길을 가르쳐 주는데 ‘나 같은 사람’해서 그 길을 안 간다는 겁니다. 안 받아들입니다. 못 받아들여요.

그러다보니까 가르쳐주는 것도 어떤 법만 남았느냐? 준비하는 법이 주로 횡행하고 있어요. 사회가 준비하도록 하는 걸 가르치고 있어요.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준비없이 바로 이루는 이 길을 안가고 어떤 길을 가려고 그래요? ‘나는 죄인인데, 죄인이 감히, 언감생심 어떻게 이 성스러운 걸 받아들여.’그러면서 안 받아들이는 겁니다.

준비를 반드시 거쳐서 깨닫도록 되어 있는 건 아니다 이거죠. 준비해야 참선이 되는 게 아니다 이겁니다.

깨달음에 이르는데, 준비없이 바로 깨달을 수 있느냐? 불교에서는, 선에서는 그걸 얘기하고 있어요. 참선에서는 바로 깨닫는 경우가 허다하게 많아요. 준비를 거쳐서 하다보면 준비하는 데 뭐가 되요? 길들여져요. 준비하는데 또 길들여지는 겁니다.

불교에서 보면 길들인다는 게 뭐냐면 죄를 지었다 업을 지었다 이겁니다. 업보중생이다 죄업이 많다, 그래서 죄업을 씻어야 깨달을 수 있다 이렇게 하는 겁니다. 불교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이 어떤 말을 하냐? “나는 업이 두터워서 금생에 못 깨달으니까 내생에 깨닫겠다.” 불교를 조금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금생에 못 깨닫고 내생에 깨닫겠다는 겁니다. 그게 무슨 얘기겠어요. 금생에 깨닫는 걸 포기하는 거예요. 이 말은 포기한다는 겁니다.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라고, 어떻게 해서 만난 불교인데 무엇부터 확정하는 겁니까? 포기부터 확정하는 겁니다.

여러분, 선(禪)은 그런 게 아닙니다. 선은 그런 게 아니에요. 선에서는 포기하도록 전혀 하지 않아요. 그런 말을 안 써요. 그래서 깨달은 게 뭐냐? 어린애가 깨달은 거에요. 어린애가. 하지만 어려서 본인이 깨달은 줄 몰라요.

보물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보물 속에서 일생동안 산다면 보물을 보지 못한 사람이 보면 ‘야 저 사람은 보물을 엄청 많이 가지고 있구나.’, ‘보물 속에 살고 있구나.’이렇게 생각하는데 어려서 보물 속에 태어나서 보물 속에 묻혀 사는 사람은 그게 보물인지 아닌지 몰라요. 딴 사람이 귀하게 여기면 ‘야, 이거 정말 귀한가 보지.’라고 아는 겁니다.

어린애가 깨달으면 그렇게 보는 겁니다. 깨달은 어린애는 어리석음과 깨달음을 나눠보지를 않아요. 나누는 걸 몰라요. 그래서 어린애가 깨달으면 어떻게 사느냐? 깨달음이라는 것은 몰라도, 깨달음의 마음을 쓰고 살아요.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뭐냐? 아는 게 아닙니다. 아는 건 관념이에요. 그래서 관념으로 ‘깨달았다’ 그러면 진짜 깨달은 도인은 뭐라고 얘기 하냐? 틀렸다고 그래요. 금강경에 보면 ‘깨달았다 해도 깨달음이 아니다.’ 이런 말을 쓰는 겁니다. 이 말 뜻을 이제는 이해하시겠습니까?

배고픈 사람이 밥을 먹으면 배가 불러요. 그런데 배고픈 사람이 마음속으로 밥을 그려요, 마음으로 그려요. 그리고 먹는 생각을 내요. 그러면 그 사람 배가 부르겠어요, 안 부르겠어요? 배가 안 불러요. 깨달음이라는 말이 안 맞아요.

깨달은 사람은 그걸 알아요. 그래서 동자가 깨달았다 하더라도 이 동자에게는 깨달음과 어리석음 그런 거는 머릿속에 없어요. 그런데 무슨 마음을 쓰느냐? 깨달음의 마음을 써요. 이게 깨달음이에요. 그래서 깨달음은 그냥 서 있다가 이웃집 사람이 오면 고개 들어서 이렇게 보는 거와 같아요, 이게 깨달음이에요. 이웃집 사람이 오는 데 눈을 씻고 봐야 되요? 그냥 보면 되지. 눈을 돌리면 보게 되어 있어요.

위로 쳐다보면 허공이 보이고 밑을 내려다보면 땅이 보이게 되어 있는 거에요. 이게 뭐냐? 깨달음이에요. 한마디로 얘기하면 ‘깨달음’이 뭐겠어요? 그냥 마음을 쓰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가 마음만 쓰면 바로 그게 깨달음이에요. 드러누워 있으면 천장을 보고 앉으면 앞이 보이고 또 옆이 보이는 거에요. 이게 바로 깨달음이에요. 그러니까 뭐냐? 준비가 필요없다 이거에요.



대효 스님은

제주도 원명선원과 경기도 활인선원을 이끌고 계시는 스님은 간화선 수행법을 바탕으로 단식과 참선을 병행하는 수련으로 공부를 지도하고 있다. 특히 스님은 재가불자들이 공부하면서 일어나는 갖가지 궁금한 것을 물을 수 있도록 항상 법회가 끝나면 대화시간을 따로 마련한다. 이런 지속적인 대화는 통해 불자들 스스로 자신의 허점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서 인식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도록 지도해 주신다.

현재 봄 가을 일년에 두 번 활인선원에서 대중화 선회가 열리고, 주말마다 행복참선학교가 열린다. 원명선원에서는 매주 일요일마다 참선법회를 열고 있으며 선불장 대학이 있어 1년 과정의 수련에 참가할 수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