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큰스님 사자후를 하소서-서옹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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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큰스님 사자후를 하소서-서옹 스님
  • /제주불교
  • 승인 2011.07.07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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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 인간의 궁극적인 참 모습 개발하는 것


   
 
   
 
기원전 5세기를 전후하여 인도에서는 부처님, 중국에서는 공자, 중동에서는 이사야와 같은 훌륭한 성인들이 나오셔서 혼란한 질서를 잡아 주고 인류가 평화스럽게 살 수 있는 도리를 가르쳐 주어 오늘날까지 우리의 생활과 사상에 영향을 주고 있다. 그러나 서양에서 중세기까지는 성경이 모든 진리의 규범이 된다고 믿었으나 과학이 발달할수록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영국은 1662년 자연과학학회인 로열소사이어티를 조직하여 “종교를 연구해서는 인류에 이바지할 수 없다. 오히려 과학을 연구하여 인류에 이바지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으로 과학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원동이 서양에서 처음 일어난 까닭은 동양의 종교는 불교와 같이 철학적인 합리성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인지(仁知)와 모순되는 것이 없었으나, 서양에서는 종교에 모순이 많아 그 모순을 대체할 수 있는 과학의 필요성이 컸기 때문이다. 서양에서는 과학문명이 발생하고 난 후에야 비로소 인간이 이성을 개발하면 얼마든지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오늘날은 과학문명을 고도로 발전시킴으로써 세계가 한 집안처럼 되어 지구촌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또 물질은 풍부해지고 교통 ․ 통신이 발달되었다. 과학문명의 좋은 점은 미래에도 발전시켜 나가야겠지만, 인류는 복잡한 과학문명에 매달린 나머지 인간의 마음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인간이 참된 자아를 잃어버리면 현실 생활에도 큰 혼란이 올 뿐만 아니라 미래 역사를 훌륭하게 창조할 수 있는 능력도 사라지게 된다.

그래서 인류가 과학문명의 주인이 되어 올바르게 문명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인류의 역사는 대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으며 부분이 아닌 전체적인 인간의 입장에서, 전체적인 우주의 입장에서 대 창조력을 개발해야 한다.

철학자 니체는 훌륭한 창조력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첫째, 낙타와 같은 생활을 해야 한다고 했다. 낙타는 사막에서 무거운 짐을 나른다. 우리는 사람을 위해서 좋은 일을 많이 해주는 짐승으로 흔히 소를 생각하는데 소는 물과 풀이 있는 좋은 환경에서 살지만 낙타는 물도 풀도 없는 뜨거운 사막에서 사람들의 무거운 짐을 나른다.

이와 같은 고된 인욕을 하는 낙타와 같이 사람은 첫째로 인내를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낙타와 같은 인내를 가지면 과거의 잘못을 비판할 수 있는 자주적인 비판력이 생기게 된다. 그러한 자주적인 비판력을 가지려면 용기가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니체는 낙타와 같은 생활 뒤에는 사자와 같은 생활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무거운 짐을 진 낙타가 비판력을 발휘하면 용맹스러운 사자가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깊이 연구해서 옳다 ․ 그르다를 깨닫게 되면 창조를 개발하게 된다. 그렇게 하다 보면 많은 사람들은 시기하는 마음이 생겨 헐뜯으며 적으로 돌아서기가 쉽다. 이러한 시련을 극복하려면 사자와 같은 용맹함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위대한 인간일수록 적이 많으며, 고독과 절망에 빠지기 쉽다. 그런 고독과 절망에서 사자와 같은 용맹함으로 불행을 극복하기 때문에 위대한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 진리를 추구하는 것처럼 커다란 용기는 없다. 또한 창조를 위해서는 사자와 같이 용맹스럽기만 해서는 안 된다. 어린아이와 같은 천진난만함도 있어야 한다. 사심(私心)이 없으며 모든 것을 놀이처럼 즐겁게 생각하고, 깊이 공부해 들어가면 자아의 깊숙한 곳에 있는 마음의 힘이 발동하여 창조력이 되는 것이다.

창조한다는 것은 비판만해서는 안 되고 자아의 심층에서 직관해야 한다.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렇고 따지는 것이 아니다. 또 이성의 입장에서 비판하는 것도 아니다. 창조에 필요한 직관은 무한한 능력이 갖추어진 잠재의식에서 발휘된다.

이성과 직관의 한계는 다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창조력을 개발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인류의 역사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과학자들은 과학원리를 처음 개발할 때 비판적으로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잠재의식을 통해 직관적으로 떠올린다.

참선은 인간의 근본바탕을 깨닫는 것이다. 즉 잠재의식마저도 초월한 인간의 궁극적인 참모습을 개발한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에서 말하는 창조란 잠재의식에서 직관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며 더 근원적인 창조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가장 근본바탕에서 나오는 창조야말로 참된 창조라고 할 수 있다.

니체는 이와 같이 인생을 낙타․사자․어린아이의 세 단계로만 말했지만 거기에는 중요한 것이 빠졌다. 그것은 인생의 목표, 꿈, 이상과 같은 인간의 의지이다. 인간은 이러한 의지가 있기 때문에 낙타와 같이 인내하고 노력하며, 사자와 같이 용맹스럽게 행동하며, 어린아이와 같이 천진난만한 마음으로 창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불교에서는 원력이 되는 것이다.

우리 민족은 깊은 참선의 경지를 어느 민족에게도 뒤지지 않게 개발해낸 역사를 가지고 있다. 즉 잠재적이고 심층적인 창조력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는 것이다. 창조력이 풍부한 민족이라야 참선이 개발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깊은 참모습에는 과거․현재․미래의 시간적인 구별이 있을 수 없다. 모든 우주, 삼라만상을 창조하는 근본자리에 이르러서야 어느 것에도 끄달리지 않고 활발하게 살 수 있다. 그 경지에 이른 것을 가리켜 근원적인 주체성․참나․진실한 자아라고 한다. 이 자리라야 과학문명의 병폐를 극복하고 올바른 문명을 창조할 수 있는 것이다. 참선을 통해서 개발한 ‘참나’야말로 오늘날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근본원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선법문을 한마디 하겠다.



임제(臨濟) 스님의 법손 중에 풍혈(風穴)이라고 하는 선사가 있었는데 풍혈 스님이 하루는 대중에게 말하기를, “만약 한 티끌을 세운다면 나라가 흥성하고 한 티끌을 세우지 못한다면 나라가 쇠망할 것이니라”

이에 설두(雪竇) 스님이 주장자를 잡고 이르되, “도리어 생사를 같이 할 납승이 있느냐?”하셨다.



설두 스님이 송(頌)하기를



시골 노인으로 하여금 이맛살을 펴지 못하게 하나

다시 국가의 웅기(雄基) 세움을 도모하도다.

지모(智謀)있는 신하와 용맹한 장수는 이제 어디에 있는고?

만리청풍은 다만 스스로 알 뿐이로다.



내가 여기에 대하여 착어(着語)하겠다.



독이 묻은 북을 와서 두드리고

혼을 살린 향을 거둠이로다.

하늘을 찌르는 새매가

옛 둥지를 생각하지 아니하도다.



할!



서옹 스님

1912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남.

1932년 장성 백양사 만암 대종사 문하에서 득도.

1964년 동국대 선학원장을 거쳐 74년까지 동봉산 무문관, 동화사, 백양사, 봉암사 조실을 역임하였으며 조계종 5대 종정을 지냄.

2003년 12월13일 좌탈입망(坐脫立亡)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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