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야기가 있는 김상남의 실크로드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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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야기가 있는 김상남의 실크로드⑤
  • /김상남
  • 승인 2011.09.29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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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파른 협곡 위에도 부처님은 계셨다


   
 
   
 
   
 
   
 
2010년 9월29일 여행은 벌써 5일째로 접어들었다. 이제야 좀 익숙해진 듯한 여행길이 마지막 여정만을 남겨 두고 있다.

며칠 동안의 일정에서 나는 우리가 달려온 먼 거리의 속도만큼을 쫒아 가기 버거워 하며 관광버스가 이끄는 데로 몸을 움직여 방향 감각이 둔해진 듯 했다. 그래서 아침 공양을 마친 후 버스에 올라 차창 밖 풍경을 가늠해 보며 여행사에서 나눠주었던 안내 책자의 지도를 들춰 보았다. 지금 우리가 있는 곳 난주는 중국 내륙의 한가운데이다. 그제서야 여행하는 이방인으로서 낯선 땅에 발붙일 용기가 새삼 솟는데, 이 낯선 느낌이 사라지고 고향에 대한 향수가 그 틈을 메우려 할 즈음, 이 여행은 곧 마무리되니 아쉽다. 남은 일정은 정말 잘 보고 느끼리라.

오늘은 유가협과 병령사 석굴을 볼 것이다. 그리고 둔황 가는 기차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된다. 오전 10시쯤 병령사 석굴을 가기 위해 선착장에 도착하니 저 멀리 수평선이 보인다. 황하의 상류 지역에 해당하는 이 곳 난주에는 1960년대 중국 최대 규모의 큰 댐이 건설되었고 지금 우리는 댐에 의해 막힌 거대한 저수지위에 배를 타고 유가협을 유람하게 된다. 병령사 석굴은 배를 타고 1시간 정도 유가협을 지나야만 하므로 일행은 엉성하게 구명조끼를 입고 작은 쾌속 유람선에 나눠 탔다. 물살을 가르며 빠르게 가는 배의 창문 사이로 들어온 찬 공기와 튀어 오르는 물살이 정신을 번뜩 깨게 하며 다시 여행의 설램을 느끼게 한다.

처음 한참 동안은 망망대해처럼 그저 물밖에 보이지 않다가 점차로 유가협의 절경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협곡은 사암과 석회암이 층을 이뤄 가로로 긴 띠 문양이 새겨진 듯 한데, 석회암층이 오랜 시간에 걸쳐 녹아 세월의 통로들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라 한다. 또한 그로 인해 바위에 균열이 가고 조각들이 떨어져 나가며 사이사이 자연스럽게 동굴이 형성되어 있어서 기묘한 형태의 유가협의 풍광은 중국 산수화의 절경을 떠올리게 하는 장관이었다. 이 협곡들은 아주 오랜 세월 이전에 바다에서 융기하여 생겼다고 한다. 그래서 소금을 품은 바위 협곡엔 풀이 잘 자라지 않는다. 하지만 그 때문에 사람들은 내륙에서의 귀한 소금을 얻을 수 있었고, 가파른 바위를 잘도 오르락 거리는 염소들에게도 필수 염분을 공급해 주고 있다.

푸른 하늘 사이로 빛을 받으며 보이는 가파른 협곡 위에는 문득 부처님이 앉아 계신 듯하다. 사막 위, 옛 시대의 우거진 수풀 가운데 협곡을 떠올리면서 바리의 여정을 그린다.



바리는 사막 한 가운데서 푸른 바다를 만난다.

많은 사람들이 배를 타고 푸른 바다 한 가운데로 향해 가고 있는 모습이 어리둥절하다.

“저 바다 한 가운데 무엇을 찾아 가고 있나요? 저는 길을 알 수 없습니다.”

바다 깊숙이 가라앉은 바리의 눈물은 물방울에서 연꽃으로 변하여 수면 위로 떠오른다.

바리가 수면 위로 떠오른 연꽃을 집어 강물을 치니 바위산이 융기하며 바다는 거대한 협 곡으로 변한다.

협곡 사이를 걸어가는 바리의 눈앞에 협곡 위에 앉아 있는 부처님이 보인다.



“과거 심 불가득

현재 심 불가득

미래 심 불가득”



바리는 세상의 모든 것들에 대한 십만 게송을 염한다.

하나의 게송이 끝날 때 마다 협곡의 작은 부처님이 사라지고

모든 게송을

끝냈을 때 협곡 또한 사라지고 그 곳은 다시 바다가 되었다.

   
 
   
 


   
 
   
 
[그림51]병령산 협곡 끝 선착장에 다다랐다. 병령은 티베트어로 ‘십만불’이란 말이다. 그만큼 이 곳 석굴에 많은 부처님이 모셔져 있기에 천불동, 만불동 보다 더 많은 수를 의미하는 이름을 붙인 듯하다. 석굴을 보기 위해서는 여기서 다시 조금 걸어 올라가야 하는데 가는 길에 작은 들꽃이 우리를 반긴다. 서진 시대( AD 400년경) 부터 조성된 석굴은 거대한 규모부터 매우 작은 규모까지 각각의 특색 있는 모습을 지니고 있으며 시대적 특성을 반영하여 인도조각의 영향을 받은 형태에서 티베트 불교의 형식까지 다양성을 담고 있다. 이곳에 오기 전 찾아 본 자료에서도 많은 불상이 훼손되어 복구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불상들은 마치 깁스를 하고 있는 모습처럼 작업에 쓰이는 철근과 목조에 둘러 싸여 있었다. 또한 석굴들을 관리 보호하기 위해 각각의 문을 달아 놓고 옆에 검정색으로 크게 식별 번호를 써 놓아 조금은 눈에 거슬렸다. 암벽위에 흙을 덧붙여 다시 처리하는 형태의 반소조상들이 훼손된 모습들이 안타깝기도 하지만 천년 이상 그 오랜 시간을 버티어 왔다는 것에 또다른 감동을 느꼈다.

불상은 언제부터 만들어졌을까? 석가모니 부처님의 열반 이후 약 600년 동안 부처님의 모습은 어디에도 표현되지 않았다고 한다. 단지 불타의 전기를 소재로 그려내는 불전도에서 불타를 빈자리나 발자국 등 상징표현으로만 처리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후 그리스 문화가 인도 간다라 지역에 영향을 주게 되면서, 불상은 신앙의 중요한 표현으로 자리매김을 했고 이 시기에 처음 중국으로 부처님 법을 전한 가섭마등과 축법란도 42장경과 함께 석가불 입상을 백마 등에 싣고 왔다고 한다. 따라서 중국 불교의 시작은 불상과 같이 했다고 볼 수 있는데 수행의 장소인 석굴 안에 부처님을 모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였다. 그 결과 천년의 세월을 걸쳐 이렇게 후대의 우리들은 이름도 없이 아름다운 정신의 결정체만을 남긴 옛 사람들의 흔적을 경이롭게 만날 수 있는 것이다.

협곡 사이를 주욱 따라 올라가며 석굴을 살펴보고 내려오는 길에 라마승 한분을 보아 가볍게 목례하며 합장을 하고 인사를 건네니 반갑게 응한다. 내친 김에 같이 사진도 한 장 찰칵 찍고 선착장으로 돌아오는 길, 사진집을 파는 아주머니들이 여럿이 거의 애원하다시피 붙잡는다. 생각보다 비싸다는 생각에 감정적으로 흥정을 하고 조금은 찌뿌둥한 기분으로 그 곳을 나서게 됐다. 지역의 문화를 보기 위해 온 사람들에게 길을 터 준 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데 종종 그 마음이 비껴가기만 한다.

이제 마지막 여정 둔황행 기차를 타러 난주역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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