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큰스님 사자후를 하소서- 법정 스님
상태바
아! 큰스님 사자후를 하소서- 법정 스님
  • /제주불교
  • 승인 2011.10.13 10: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맑고 은은한 운판의 소리처럼 살아라"


며칠 전부터 나는 마루 위 보에 매달아놓은 운판(雲版)을 이따금 한번씩 치면서 파적(破寂)을 삼는다.

이 운판은 엉뚱한 짓을 잘하는 내 ‘음악담당 보좌관’이 보내준 것이다. 음악담당 보좌관이라고 거창하게 말을 했지만, 그는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으면서도 음악이나 문학쪽에 더 관심이 있어 가끔 내 산거(山居)로 녹음한 음악테이프를 보내오는 데서, 자칭 타칭으로 그렇게 붙여진 이름이다.

지난 6월 상순께 서울에 갔을 때 볼일을 마치고 우리는 영동에 있는 씨네하우스에서 ‘레인맨’을 함께 보았었다. 우리는 그 극장에서 그전에도 몇 편의 좋은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인사동쪽으로 왔었다. 인사동 나름의 특유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는 그 거리를 거닐다가 한 유기점에 들렀었다.

거기서 이 운판을 보고 신기해서 한번 쳐봤더니 그 울림이 아주 맑고 은은했다. 언젠가 티베트를 다녀온 한 스님이 그곳에서 가져온 종을 쳤을 때 소리에 성스러움이 밴 그때의 투명한 그 울림이 연상되었다.

그 운판은 지름이 50센티쯤 되는 놋쇠판으로 아무 장식 없이 망치로 두들겨 만든 것, 형태는 가운데 구멍만 뚫리지 않았을 뿐 음반에 아주 흡사하다.

그때 나는 맑고 은은한 소리가 마음에 들어 살까 했지만, 놓아둘 자리가 마땅치 않아 생각을 접어두고 말았었다. 며칠 전 큰절에 내려갔더니 종무소 툇마루에 커다란 상자가 하나 버티고 있는 걸 보고 나는 의아했다. 수취인이 내 이름으로 되었고, 발송인은 그 보좌관인 왕군의 이름이 씌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원주스님의 장에 갔다오면서 찾아온 것인데, 고속버스 편으로 보내온 짐이라고 했다.

커다란 상자를 풀기까지는 내용이 무엇인지 궁금했었다. 율원(律院)에서 지내는 두 스님이 들고 올라와 풀어놓았을 때, 거기 운판과 치는 망치와 운판의 몇 곱이나 되는 등나무로 만든 커다란 받침대가 들어 있었다. 그의 엉뚱한 소행에 거듭 놀라면서 한편 기특한 생각도 들었다. 여기저기 헤아리던 끝에 운판은 마루 위 보에다 못을 박아 매달아두었고, 받침대는 놓아둘 자리가 마땅치 않아 다시 돌려보내기로 했다.

그날 저녁 예불 시간에 운판을 치면서 나는 종송(鐘頌)을 외웠다.



이 종소리는 듣는 이마다 번뇌를 끊고

지혜 기르고 보리심을 발해서

지옥 고통 여의고 윤회에서 벗어나

부처를 이루어 모든 중생 건져지이다.



오늘 아침 채소밭 가에 있는 치자나무에서 올 들어 처음으로 꽃을 피웠다.

윤기가 흐르는 초록빛 잎새에 정결하게 피어난 다소곳한 하얀 꽃의 모습과 뼛속에까지 스며들 듯한 그 향기가 내 발걸음을 오래 멈추게 했다. 마루에 올라와 운판을 한번 쳤다. 치자꽃 향기와 운판의 울림이 하나가 되어, 말고 은은한 향기를 지닌 메아리가 온 뜰에 번지는 것 같았다.

어떤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우리들의 삶에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장바닥의 시끄러움과 차들이 내닫는 굉음은 우리를 몹시 피곤하고 짜증스럽게 한다. 무엇을 단속하느라고 불어대는 호루라기 소리나 바위를 뚫는 착암기 소리는 신경을 곤두서게 한다. 산골짜기를 흐르는 시냇물소리와 숲속에서 우짖는 새소리는 우리들의 마음을 아주 편안하게 감싸준다.

만약 교회나 절에서 종 대신 사이렌을 울린다고 한다면 거기에 찾아갈 사람이 몇이나 될지 한번 상상해 볼 일이다. 소리는 이와 같이 우리 생활에 적잖은 영향을 끼친다.

우리가 누구의 말이나 어떤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남의 말이나 소리를 듣지 못한다. 겉으로는 듣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전혀 듣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떤 사람이 말을 할 때 우리는 자기 자신의 언어의 틀에 끼워 맞추고, 자신이 기왕에 알았던 사실과 견주면서 판단하고 평가하고 긍정 아니면 부정을 한다. 이런 것을 듣는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참으로 남의 말을 들으려면, 무엇으로도 거르지 않고 허심탄회한 빈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야 한다. 어떤 이름이나 개념에 옭아매지 않고, 말의 그물에 가두지 않고, 어떤 취향이나 편견을 보탬이 없이 있는 그대로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사물의 실상과 진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인식할 수 있다.

남의 말을 들을 때 그 사람을 보지 않고, 스스로 눈을 감고 있는 사람들은 겉으로는 열심히 듣고 있는 것 같지만 안으로는 자신의 체를 가지고 말을 거르면서 딴전을 펴고 있는 것이다.

자유와 이념과 이익을 챙기기 위한 투쟁에는 머리띠를 두르고 분연히 일어서면서도, 생명의 신비인 아름다움에는 무감각한 이 시대의 우리들, 오늘날 우리들은 그만큼 무디어 있고, 인간적인 여백이 비좁고 메말라간다.

우리가 보다 인간적인 영역을 가꾸고 일깨우려면 아름다움에 대한 감수성과 통찰력이 있어야 한다. 아름다움은 결코 외부의 사물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안에 사랑이 깃들여 있어야 그 아름다움을 받아들일 수 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모든 생명이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따뜻함과 부드러움과 말고 향기로움이다.

이와 같은 사랑을 발산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중심적인 틀에서 벗어나 빈 마음을 지닐 수 있어야 한다. 원초적인 침묵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사랑에는, 아름다움에는 원초적인 그 침묵이 스며있다.

얼마 전 부여에 사는 한 친구한테서, 한지에 연필로 베껴 쓴 시가 몇편 보내져왔다. 김상옥 시화선집 <향기 남은 가을> 중에서 고른 것인데, 흰색과 연두빛과 누런 색지를 책으로 매어 연필글씨로 또박또박 옮겨 쓴 시편에서 색다른 시의 운치를 느낄 수 있었다. 무더운 삼복더위에 맑은 바람이 될 이런 시편들은 청량음료에 못지않게 우리들의 정신을 시원하게 맑혀 줄 것이다.

베껴 쓴 시집을 대하니, 우리가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헐벗고 궁핍했던 시절, 어디서 한권의 시집을 빌려오면 밤을 새워 공책에 베껴가며 외우던 일이 문득 떠오른다. 김영랑의 4행시와 이상화와 이육사의 시들도 베껴서 읽었었다.

보내온 시 속에 ‘그 문전(門前)’이란 시가 들어 있다.



모처럼

지는 꽃 손에 받아

사방을 둘러본다



지척에

아무리 봐도

놓아 줄 손이 없어



그 문전(門前)

닿기도 전에

이 꽃잎 다 시들겠다.



극도로 정제된 언어 속에 시인의 은은한 마음씨가 배어 있다. 지는 꽃잎을 받아 전해 줄 ‘그 문전’을 마음속에 지니고 있는 사람은, 어디서 무슨 일을 하며 어떻게 살지라도 삼복더위 속에 한줄기 시원한 바람을 가꾸면서 아름다운 삶을 누리고 있다.

모국어를 사랑하려면 모국어로 된 시를 외우라. 시는 눈으로 스쳐서는 안 되고 두런두런 자신의 목소리로 외워야 한다. 그래야 행간의 울림까지도 함께 느낄 수 있다.

옛사람들에게는 따로 시인이란 직업이 없었다. 글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시를 즐겼다. 바람과 달을 누구나 사랑하듯이, 그것은 한 파적이기도 했었다.

그 ‘음악담당 보좌관’한테서 150대 1의 신문기자 시험에 최종 합격했다는 소식이 오늘 왔다. 누나와 형이 결혼해서 다 떠나가고 자기마저 유학을 가면 어머니와 아버지를 누가 모시겠느냐고 걱정하더니 잘되었다. 합격 소식을 듣고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다시 한번 운판을 쳤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